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64)
배드 본 블러드-164화(164/197)
164
나는 층 하나를 독채로 쓰는 앙귀스 레지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방만 여덟 개라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대단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나 보네.’
거실은 차량 두서너 대를 주차하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쟈파 상사와 관련된 제품이 장식장에 수두룩했다.
‘침입이나 싸움의 흔적은 없다.’
나는 벽면을 두르듯 이어진 장식장을 따라 걸었다. 앙귀스 레지나의 모습이 찍힌 광고 사진과 영상이 디지털 액자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캐릭터 상품도 베개나 옷, 단말기 등등으로 다양했다.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멀고, 출장청소부도 쓰지 않아.’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깔끔한 성격은 아니라는 거다. 청소부를 쓰지 않는 걸 봐선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고.
집안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나는 부엌을 살폈다. 쟈파 상사의 프랜차이즈 음식 봉투가 구석에 잔뜩 쌓여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간이식품이나 음료도 쟈파 상사의 제품이었다.
“애사심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무심한 건지…….”
직접 요리를 한 흔적도 없었다. 조리도구는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옷방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옷들이 걸려 있었다. 내 입장에선 이게 옷인가 싶은 기이한 천 쪼가리가 다수 있었다. 신발도 어찌나 종류가 많은지 수백 켤레는 넘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발에 옷가지가 차여서 불편할 정도였다.
난 다른 방도 전부 살폈다. 그녀의 침실은…… 일일이 설명하기 민망한 부분이 많았다. 다 큰 성인 여자니까 뭐, 취미 생활도 많은 법이지. 장난감도 쓸 수 있고.
침실을 살피던 내가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에 찍힌 자국.’
나는 침실의 벽을 보았다. 벽의 일부가 손톱만큼 찍혀 있었다. 찍혀서 드러난 내벽에선 산화의 흔적이 없었다.
스륵.
허리를 숙인 나는 바닥을 살폈다. 찍힌 벽의 부스러기가 손끝에 걸렸다.
내벽의 산화 상태나 부스러기로 봤을 때, 근래 손상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주변을 더 살폈다.
‘파손된 플라스틱.’
난 바닥에서 플라스틱 조각을 확인했다. 색깔은 분홍이었다.
위이잉.
나는 단말기로 망막 디스플레이에 영상과 사진을 연달아 띄었다. 근래 앙귀스 레지나의 활동 모습이었다.
‘앙귀스 레지나가 쓰는 단말기의 파손 흔적.’
앙귀스 레지나는 분홍색 단말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단말기를 벽에 던진 거겠지.’
나는 앙귀스 레지나의 신장을 계산하며 뒤로 물러났다.
휙!
내가 단말기를 던지는 흉내를 냈다. 얼추 각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침실에서 단말기를 던지는 이유야 뻔하지.’
통신 중에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애인? 아니면 가족?’
앙귀스 레지나의 인적 사항까진 알 수 없었다. 네트워크에도 정보가 없었고, 집 안에도 가족관계를 추론해 볼 만한 흔적이 없었다.
저벅, 저벅.
난 앙귀스 레지나의 동선을 추측했다.
‘벽에 단말기를 던지고…… 다시 줍는다.’
앙귀스 레지나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바닥이 옷가지나 잡동사니로 지저분해서 오히려 동선을 알아내기가 더 쉬웠다.
‘옷방으로 가서 외출복을 갖춰 입었다.’
앙귀스 레지나가 맨션 출입구로 나간 흔적은 없다.
여긴 19층이다. 지하 통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갈 곳이라곤 창문이었다.
난 창틀을 하나하나 살피며 먼지가 쓸린 창을 찾아냈다. 사람 하나가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는 크기의 창이었다. 창틀을 보니 앙귀스 레지나의 손자국을 따라 먼지가 지워져 있었다.
‘공중차량을 이용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증언과 기록이 남았을 테니까.’
나는 창문을 열고선 아래를 응시했다. 맨션 뒤편은 정원이라 나무와 흙이 보였다.
‘뛰어내린 건가?’
쟈파의 말대로라면 앙귀스 레지나는 기계적으로든 생체로든 별다른 강화 시술을 받지 않은 인간이다. 자사 소속 아이돌이니 이런 정보는 확실할 것이다.
‘설사 강화 신체를 가졌어도 19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야. 나도 실수하면 죽을 높이니까.’
나는 쟈파의 말을 떠올렸다.
‘쟈파는 내게 쉬운 일거리일 거라 했다.’
정말로 어렵진 않았다. 방문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서 대략적인 흐름이 보였다.
‘사람을 풀면 금방 찾아내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거야.’
‘사생활이 중요한 아이돌이라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창문 아래를 보다가 심호흡했다.
휙.
내가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끼이이이이이익!
성능이 좋은 내 의수가 벽과 마찰을 일으키며 속도를 적당히 줄였다. 나는 가까워지는 지면을 보았다. 5층 높이에 이른 내가 벽을 박차며 한 바퀴 돌았다.
퉁!
나는 몸을 숙이며 가뿐히 착지했다.
‘뛰어내리면 대충 이 정도 범위.’
내가 낙하 범위를 둘러보며 확인했다. 사람의 발자국이 움푹 들어간 흔적이 있었다. 발의 크기로 봐선 덩치가 제법 컸다.
‘누군가가 떨어지는 앙귀스 레지나를 받아냈다.’
앙귀스 레지나의 통화 기록이 있다면 일 처리가 쉬울 터다. 쟈파에게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말만 했다. 주기 싫은 게 아니라 앙귀스의 단말기는 일회성 통신 네트워크라 데이터가 증발한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히도 사생활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주는군.’
쟈파의 성격은 굉장히 꼼꼼했다. 그러니 사업가로 성공했겠지. 타지룬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기도 할 터다.
‘19층 높이에서 앙귀스 레지나를 받아낸 자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신체를 강화한 사람일 거야.’
‘앙귀스 레지나도 그 사람을 신뢰하기에 몸을 맡긴 거지.’
‘발자국으로 봐선 덩치가 크다. 인간 종족이 아니라면 가늠하기 힘들지만, 인간이라면 가브리엘 정도.’
덩치가 크다면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띌 것이다.
……나는 아크바란을 떠올렸다. 거기선 이 정도까지 했으면 사람을 금방 찾을 수 있다. 감시 카메라와 드론, 순찰 안드로이드 따위가 발에 차이듯 널린 곳이 아크바란이다.
반면, 보더시티는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행정과 시스템, 통신이 파편화되었다. 통합 시스템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에 옛 사냥꾼들처럼 불확실한 단서와 직관에 의존해 목표를 찾아야 했다.
‘키누안이 여기에 머무는 이유도 알 것 같아.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도시다.’
나는 맨션의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 뒤편에는 도로가 있었는데 도보 옆으로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콰직! 깡! 위이잉!
나는 주차된 차량들의 문을 깨부수며 내부 컴퓨터를 하나씩 꺼냈다. 소란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주로 보이는 이들이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군가는 총을 꺼내려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다들 이걸로 차나 한 대씩 새로 뽑으세요. 쟈파 상사의 보증 크레딧칩입니다. 적당히 양심껏 알아서 금액 적어요.”
나는 쟈파가 나눠준 백지 크레딧칩을 차주들에게 던졌다. 크레딧이라는 명칭은 같아도 제국과 벨라토의 통화체계는 달랐다.
차주들은 크레딧칩을 단말기에 넣어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횡재했다는 표정이었다.
삑, 삑.
내 망막 디스플레이 구석에서 쟈파의 이름이 떠올랐고 단말기도 울렸다. 쟈파가 내게 긴급히 연락하고 있었다. 돈이 빠지는 걸 확인한 모양이었다.
나는 쟈파의 연락을 무시하며 차량의 내부 컴퓨터를 챙겼다.
-루카 씨! 당신한테 준 크레딧칩이 왜…….
쟈파가 강제로 내 단말기 통신을 개방했다. 나는 옷깃을 올리며 부착된 통신기에 입을 댔다.
“조사 비용이야.”
-어떻게 조사하길래! 호요오!
“끊어. 바쁘니까.”
나는 케이블이 늘어진 컴퓨터를 여러 대 쥐고선 터벅터벅 걸었다.
* * *
쟈파가 내게 준 장비는 하나같이 최고급이었다. 단말기의 성능도 뛰어나서 홀로그램 영상도 열 개나 분할 출력이 가능했다.
나는 차량 컴퓨터에서 뽑아낸 주차 영상을 홀로그램으로 투사했다. 며칠간 주차된 차량도 있어서 ‘덩치 큰 사내’와 앙귀스 레지나로 추정되는 여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영상을 확대하니 사내가 자세히 보였다.
고전적인 이레즈미 문신이 사내의 가슴과 어깨, 나아가 두피까지 뒤덮고 있었고, 문신의 눈이나 뿔 같은 곳에선 임플란트칩이 반짝거렸다. 팔다리는 의체가 아니었고, 기초적인 외골격 장치를 덧대 근력을 강화한 형태였다.
난 쟈파에게 연락을 취했다.
-무식하게 차를 부숴서 물어줄 건 없잖아요! 메모리칩만 구매하면 되지! 호욧, 호욧. 내 피 같은 돈이, 돈이!
쟈파가 따지고 들었다.
“번거롭고 귀찮은 건 질색이라서. 돈 몇 푼 더 주고 빨리 처리하는 게 속 편해.”
-돈 몇 푼이라고 치부할 금액이 아니잖습니까!
“내 월급에서 까.”
-월급도 없으면서!
“부자면서 쩨쩨하게 굴지 마.”
-저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 거지, 쓸데없는 지출까지 반기는 건 아닙니다!
“하여튼 지금 영상을 보냈으니 확인해봐. 누군지 알겠어?”
앙귀스 레지나는 유명인이기에 행동반경과 인간관계가 좁을 것이다. 어지간해선 쟈파도 아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벌써 찾으신 겁니까? 당신에겐 쉬운 일일 거라 예상했지만 하루도 걸리지 않을 줄이야. 제가 사람을 잘 봤군요.
“댁이 작정하고 사람을 풀었으면 더 빨랐을걸.”
쟈파는 영상을 확인하는 중인지 침묵했다.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앙귀스의 전 매니저입니다. 아니, 전전전 매니저라 해야 할까요. 전전전전이었나? 호욧.
“매니저가 얼마나 자주 바뀌는 거야?”
-분기에 한 번꼴로요. 일단 신상정보와 주소를 보내겠습니다.
* * *
정보를 받았으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쾅!
나는 잠긴 문을 걷어찼다. 안쪽에선 걸쭉한 수증기가 자욱했다. 너저분한 소파에는 흡입기로 약물을 흡입하는 사내가 보였다.
“쟈파 상사의 의뢰로 앙귀스를 찾으러 왔다, 도스타바.”
난 앙귀스의 전 매니저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도스타바는 해롱해롱한 눈으로 날 보다가 외골격을 장착하려 했다. 약에 취한 터라 그 동작은 굼떴다.
“너, 누구야, 난, 새끼, 불법, 침입이잖아.”
도스타바가 엉거주춤하게 벽에 거치된 외골격에 등을 댔다. 넓게 펼쳐졌던 외골격이 그의 관절에 맞게 접히고 있었다.
콰직!
나는 느긋하게 나아가서 외골격의 실린더를 하나씩 잡아서 부러뜨렸다. 기동하던 외골격이 멈췄다.
“나와, 이 자식아.”
난 도스타바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팔뚝 살이 내 손자국을 따라 뭉개졌다.
“카악, 컥! 너, 너!”
“약에 취한 건 알겠는데 정신 차려. 대답 뭉개거나 딴소리할 때마다 팔다리 하나씩 부러질 줄 알아.”
“꺼어어억, 컥.”
내 말을 이해 못 한 모양이다.
나는 발을 들어서 도스타바의 손을 짓눌렀다.
콰드득!
손뼈가 부러지다 못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반대편도 부러뜨려줘?”
“정신, 정신 차렸습니다! 정신 차렸다고요! 흐끄으윽, 끅.”
이제야 도스타바의 혓바닥이 잘 굴러갔다.
“앙귀스 레지나는?”
“저, 저도 몰라요. 어제 떠났다고요!”
나는 도스타바의 침실을 보았다. 앙귀스 레지나의 승강기에서 맡았던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남자친구야?”
“남자친구요? 그 여자한테 남자친구가 어딨어요. 매니저들이랑 다 잤을걸요.”
나는 도스타바를 일으켜 세워서 소파에 던졌다. 그는 과할 정도로 벌벌 떨며 나를 보았다.
도스타바가 딱히 겁쟁이인 건 아니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야성적인 감각이 있어서 내게서 풍기는 살인마의 비린내를 맡았다. 살인과 폭력을 망설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다, 다른 매니저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점 없었고?”
“그러고 보니, 자기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묻더라고요. 평소에도 이상한 소리를 하도 하는 여자라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어. 치료비와 수리비는 이걸로 청구해. 쟈파 상사가 보증하는 크레딧칩이다. 정신적 위자료까지 넉넉하게 챙겨.”
내 말을 들은 도스타바가 아픔도 잊고선 화색이 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앙귀스 레지나의 매니저 노릇을 했기에 쟈파 상사의 재력을 아는 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싸구려 공동주택의 낡은 복도가 보였다. 벽면은 페인트칠이 다 벗겨지다 못해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삑.
쟈파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또 돈은 왜……!
“앙귀스 레지나의 매니저들 신상정보를 전부 보내. 내게 불만이면 사람을 풀어서 찾던가.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면 돈이 더 든다는 건 그쪽도 잘 알잖아.”
-……알겠습니다.
음, 솔직히, 나쁜 말이긴 한데, 이거 꽤 재밌다. 이 맛에 부자들이 돈을 쓰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