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69)
배드 본 블러드-169화(169/197)
169
“몸에서 약물을 완전히 빼는 데 사나흘은 걸릴 겁니다. 해독제를 계속 집어넣고 있지만…….”
가브리엘의 주치의가 내게 설명했다. 그는 비싼 치료비만큼이나 반듯하게 차려입고선 모니터와 차트를 가리켰다.
“온전하게 회복할 것도 없어. 대화만 할 수 있으면 돼.”
“그게 사나흘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렇군.”
난 따지지 않고 납득했다. 전문가의 의견에 토를 달아봐야 가브리엘의 회복력이 올라가진 않을 것이다.
‘마약굴에 있을 때부터 가브리엘의 정신은 혼미했지.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긴 했어.’
재촉해 봐야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난 가브리엘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킬 정도로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병원을 떠나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돌아갔다. 내 곁에는 어린 크롤러, 보얀도 함께였다.
쟈파 상사의 규모를 본 보얀이 겁에 질린 듯 건물을 올려다봤다.
“저, 저는 이제부터 루카 씨와 함께 지내는 건가요?”
“내가? 너하고? 웃기고 있네. 이 건물에 남은 방이 하나 정도는 있겠지. 비바람만 피하게 해주고, 끼니만 먹여주면 내 할 일은 끝이다. 공부든 뭐든 나머진 네 몫이야.”
나도 마땅한 계획이 있어서 보얀을 데려온 건 아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무리한 게 맞다.
‘하지만 레고르와 함께 슬럼가에 머물다간…… 좋은 꼴을 보진 못했겠지.’
그걸 알기에 레고르도 내게 선뜻 보얀을 맡긴 것이다. 보더시티에서 자신이 오래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걸 본인도 알았을 것이다. 우직하다 못해 요령이 없는 자였다.
‘제아무리 잘 싸운들 폭력만으로 버티지 못한다. 살아남으려면 폭력과 지략을 겸비해야 하지.’
내가 본 강자는 늘 그랬다. 다들 문무를 일류까지 갈고닦은 초인이었다.
나는 잡다한 생각을 하며 쟈파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그의 탁자 주변에는 홀로그램이 구름처럼 자욱하게 떠 있었다. 업무를 바삐 보는 중이었다.
“호욧,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쟈파가 나와 보얀을 쳐다봤다. 특히 보얀에게서 시선이 잠깐 멈추더니 세로 동공을 가늘게 떴다.
“먹고 싶으면 먹어. 눈치 보지 말고.”
나는 맹독맛 사탕을 힐끔힐끔 보는 보얀에게 말했다. 보얀은 머뭇거리다가 사탕을 하나씩 까먹었다.
“……이상하고 신기한 맛이네요. 그리고 혀가 살짝 아려요.”
미묘한 맛인 듯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쟈파의 업무가 끝나길 기다렸다. 곧 쟈파가 손을 저어 홀로그램을 일제히 내렸다.
“루카 씨, 거하게 움직이셨더군요.”
쟈파가 타박하듯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잖아.”
“‘업’을 너무 쌓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루카 씨가 뛰어난 군인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최강의 전사는 아니죠. 폭력은 업보를 쌓는 법이고 그 끝은 결국 파멸입니다. 적어도 키누안을 찾기 전까진 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쌓으시길 바랍니다. 키누안을 찾은 다음에야 제 알 바 아니지만요, 호욧. 그리고…….”
쟈파가 보얀을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보얀의 어깨를 팔꿈치로 쳤다.
“사정은 네 입으로 설명해라, 보얀. 명석한 언변으로 후원자를 설득해봐. 쟈파가 도와주지 않으면 공부하기 힘들 거다.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싸움뿐이거든.”
놀란 보얀이 입에 머금고 있던 사탕을 꿀꺽 삼켰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처음에는 더듬거렸으나 금방 유창하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 쟈파도 보얀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유심히 바라봤다.
“……이상입니다.”
보얀의 말이 끝났다. 나도 어렴풋이 예상만 하던 사정을 직접 들었다.
‘레고르와 보얀은 부족이 보낸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다. 레고르는 보얀을 보호하기 위해 같은 부족의 동족을 몇 명이나 죽이고 보더시티에 은거했다.’
생각보다 더 험한 과정을 거쳐서 보더시티에 온 듯했다.
“이런 말은 좀 종족차별주의자 같아서 실례이긴 한데…… 정말 크롤러가 맞긴 합니까?”
“가면은 쓴 건 아니더라고.”
내가 보얀의 뺨을 꼬집어 당겼다. 보얀의 신음이 짧게 퍼졌다.
“그간 용케도 살아남았군요. 당신의 아버지가 우수한 전사라서 버틸 수 있었던 거겠죠. 연방의 관료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쟈파가 갈라진 혀를 내밀며 웃었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다. 쟈파는 기꺼이 보얀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딱히 성인군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가브리엘, 보얀.’
보더시티에서 벌써 내 지원이 필요한 인물이 둘이나 생겼다. 책임질 게 많고 엮인 게 많으면 훌쩍 떠나지 못하고 배신도 힘들다. 그렇게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학생 하나를 후원하는 건 쟈파의 재력으론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게 빚을 지우는 건 어려운 일이지.
‘작은 투자로 내게 빚을 만들 수 있으니 쟈파에겐 남는 장사다.’
쟈파는 이미 속으로 결정했으면서도 뜸을 들였다. 고민 끝에 내리는 결론이라는 듯이 말이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장사치인 게 보인다.
“루카 씨가 생면부지의 타인을 도울 줄이야. 의외의 면모로군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인 줄 알아? 나도 불쌍하다는 감정 정도는 느껴.”
“그런 사람이 앙귀스 레지나의 무릎을……. 거참, 어쨌든 보얀을 쟈파 상사의 장학 재단에 등록해 두겠습니다.”
쟈파가 투덜거리면서 홀로그램을 열었다. 이어서 집무실 천장이 열리더니 드론 한 대가 내려왔다.
위이잉.
드론이 격자무늬 레이저로 보얀을 스캔했다.
덜컹.
얼마 있지 않아서 쟈파 상사의 직원이 보얀을 데리러 왔다. 보얀은 다소 두려운 얼굴로 나를 보다가 직원을 따라갔다.
나와 쟈파만 집무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직 할 말이 남으셨나요?”
쟈파가 의자에 앉은 채로 손톱만 딸깍딸깍 부딪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보얀이나 가브리엘이 내 발목을 잡는다면 나는 기꺼이 저들을 버릴 거다. 만약 저들의 안녕을 인질로 잡아서 내게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한다면…… 그게 네 숨통을 끊는 ‘업’이 되겠지.”
“지인을 보살펴 달라고 말할 때는 협박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겁니다.”
“방금 한 말은 ‘부탁’이야. 난 협박할 때는 팔다리부터 하나 부러뜨리고 시작해.”
“제국식 부탁은 매섭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 * *
가브리엘이 회복할 때까지 내겐 여유 시간이 있었다. 그간 가브리엘의 뒷조사를 했다. 가브리엘의 행적은 딱히 기밀도 아니기에 어렵지 않았다.
‘지젤은 7년 전에 행방불명됐다. 당시의 경호 책임자는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지젤을 지키지 못했다. 이후 그는 아크바란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더시티에 머물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보더시티에서 황폐한 삶을 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생을 완전히 놓은 듯이 쾌락만 탐하다가 밑바닥의 종착역 중 하나인 마약굴에 처박혔다.
난 가브리엘을 안다. 녀석은 밑바닥 인생에 잘 어울리는 성품을 가졌다.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도 없으며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기까지 한다. 항상 눈앞의 즐거움이 우선이었던 인간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망가질 부류는 아니었다. 일과 관계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고,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과 선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나는 가브리엘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지.
실제로 가브리엘은 갱 생활을 청산하고 건실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았다. 지앤지 사이버네틱스는 가브리엘을 경호 전문기업에 위탁교육을 보내 훈련도 시켰다. 전투 감각과 일머리는 원래 있던 놈이니 의지만 있다면 적성에 맞았을 것이다.
순조롭던 가브리엘의 인생이 무너진 건 지젤의 행방불명 때문이다.
“……죄책감.”
이게 가브리엘의 추락을 이끈 감정이었다. 자신을 부술 정도로 무거운 죄책감이었다.
‘지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엔 복잡한 사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나에 대한 의리일 것이다. 가브리엘은 그런 녀석이니까.
삑.
난 미간을 깊게 누르며 탁자를 눌러서 띄워둔 홀로그램을 껐다. 홀로그램이 사라지니 방이 어두워졌다.
‘공백이란 매섭군.’
1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아크바란에서 사람들과 알고 지낸 기간은 기껏해야 4년 남짓이었다.
‘세 배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난 모른다.
나는 어두운 방에서 가만히 생각했다. 그저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을 더 깊게 가라앉혔다. 심해의 느릿한 거수처럼, 천천히 묵직하게, 그리고 우울하게 나를 바닥까지 내린다.
내 의식에서 불티가 튀지 않는다. 불씨조차 꺼져 한없이 차갑고 어둡다. 나는 분명 깨어있고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 같았다. 아무리 죽음과 삶이 표리일체라지만, 지금 내겐 그 경계조차 없었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다.
이 생각이 수없이 치민다. 냉소적인 게 아니라 무기력했다.
이래선 안 된다.
과거를 떠올려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과거의 나. 끝없이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어쩌면 그 시절에 너무나 많은 걸 태워버렸는지도 모르지.’
이 또한 패배주의적인 생각이다. 나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계하는데도 드문드문 드는 비감을 참기 힘들었다.
따각, 따각.
나는 문 너머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내 방으로 오고 있었다. 발소리의 형태로 봤을 때 쟈파나 엔은 아니었다. 라피스도 아니고, 보얀은 더욱더 아니었다.
치익.
문이 열렸다. 굳이 잠가두진 않았지만 무례한 방문이었다. 뭐, 이런 일로 무례를 운운하기엔 나도 적잖게 무례한 짓을 하고 다니긴 했다.
“벌써 다 나았나 보네. 보더시티의 의료기술은 범상치 않군. 아니면 돈을 처발라서 그런 건가?”
내가 소파에 기댄 채로 말했다.
방문자는 앙귀스 레지나였다. 그녀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로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다.
끼릭.
앙귀스 레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권총을 들더니 내 다리를 향해 겨누었다.
“내 다리는 의체야. 복수하고 싶으면 거기 말고 몸이나 머리를 쏴. 개의치 않아도 돼. 원래 복수엔 이자가 붙는 법이거든.”
내가 심장과 미간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앙귀스 레지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에게 총을 쏴본 적이 없군.’
총알에 맞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긴장하며 집중할 것도 없다. 앙귀스 레지나는 나를 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
‘아마 앙귀스 레지나도 키누안과 관련이 있겠지.’
그래서 새로운 ‘탐정’이 오자마자 능력을 시험했다. 내가 키누안을 쫓을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세상에 절대란 없죠. 제가 당신을 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나요?”
“내 판단이 틀렸으면 그땐 죽는 거지. 앙귀스 레지나, 목숨을 건 싸움을 해본 적은 있어? 전투에선 판단의 실수가 곧 죽음이야. 완벽하게 예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확신 없는 판단에 목숨을 맡기는 건 일상이지.”
“지금은 전투 상황이 아니죠.”
“삶은 매 순간이 투쟁이야. 쏠 거면 쏘고, 아니면 꺼져. 난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 가서 우스꽝스럽게 춤추고 노래나 하라고. 그게 그쪽 직업이잖아?”
앙귀스 레지나가 권총을 내리더니 품에 넣었다.
거봐, 쏘지 못하잖아.
나는 그 말을 내뱉으려다가 삼켰다. 무의미하게 도발하는 건 관두자. 호의든 악의든 저 여자와 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알아요?”
“잘 알지. 14시 21분.”
나는 시계도 보지 않고 말했다.
“낮이잖아요. 대낮에 어둡게 사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요.”
앙귀스 레지나가 문을 닫더니 창문으로 걸어갔다.
촤악.
내 허락도 없이 앙귀스 레지나가 커튼을 활짝 젖혔다. 눈이 아찔할 정도로 방이 밝아졌다. 이어서 그녀는 전등을 조작했다.
창과 전등의 빛이 적절하게 배치되면서 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도 내 방이 이렇게 멋진 곳인지는 처음 알았다. 쟈파가 좋은 방을 주긴 했군.
“쏘거나 꺼지라고 했지. 들어오라고는 안 했어.”
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가 당신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죠. 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럼 저번처럼 총을 쏘시던가요.”
앙귀스 레지나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로 턱을 괴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쟈파의 지원이 끊어지는 건 그쪽도 싫을 거잖아요. 쟈파가 두 번이나 봐줄까요?”
“네가 쟈파의 애인이라도 되는 건가? 이종족 간의 성관계? 뱀 같은 남자가 좋다는 게 그런 의미였어?”
내 모욕에도 앙귀스 레지나는 오히려 코웃음을 흘렸다.
“배를 잡으며 웃을 말이네요. 스스로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는지 나중에 혼자 곱씹어 보세요.”
앙귀스 레지나는 소파 옆에 있는 캐비닛을 열어서 술병을 꺼냈다. 나는 거기에 술이 있는지 몰랐다. 그녀는 이 방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여기서 산 적이 있나?”
“여기만이 아니라 당신이 박살 낸 방에서도 지낸 적이 있죠. 전 지금까지 온 ‘탐정’과 전부 잠자리를 가졌었거든요.”
나는 앙귀스 레지나가 탁자에 올린 술병을 보았다. 이것도 쟈파 상사의 제품이었다. 병 내부에는 뱀 한 마리가 통째로 술에 잠겨있었다.
병 라벨에는 꼬리로 우뚝 선 뱀의 그림이 있었다. 뱀 주제에 피부 혈관이 돋아있었다. 이게 뭘 상징하는지는 문구를 읽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력에 좋다는 뱀술이에요. 뭘 넣었는지는 몰라도, 체감상 효과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앙귀스 레지나가 술잔 두 개를 손아귀에 낀 채로 흔들었다. 입가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요염하게 휘어 있었다. 그녀는 어려운 여자였다. 뱀처럼 내게 들러붙을 것 같았다.
정조의 위기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유감이로군. 난…… 남자를 좋아해.”
“올해 제가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재밌었어요.”
앙귀스 레지나의 입꼬리가 더 깊게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