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7)
배드 본 블러드-17화(17/197)
017
키누안과 나 사이에서 응어리진 침묵은 매서운 칼날처럼 내 목 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껄끄러운 상황이다.
내 자의적 판단으로 무얼 하기도 힘들었다. 근위대장 헤일라스의 명령을 받은 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이 꼴이었다.
“임무는 맡았으나 아는 게 없으니 대응의 방향성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군.”
키누안이 넌지시 말했다. 나는 무표정을 고수했다.
키누안은 사소한 언행만으로도 타인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의 통찰력은 독심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보를 아예 주지 않는 게 내가 내놓은 해답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키누안에겐 단서이자 정보였다.
난 주도권을 빼앗긴 채로 일방적으로 휘말릴 수밖에 없다. 정보의 비대칭이 심각했다. 나는 지금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속에서는 구역질처럼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루카, 난 자네를 탓할 생각이 없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오히려 자네의 판단은 하나같이 올바르네. 한정된 선택지 내에서 최선만을 고르는 걸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나. 하지만…….”
뒤통수와 등만 보이던 키누안이 고개를 틀어서 나를 보았다.
난 속내를 읽히기 싫어서 차라리 눈을 감았다. 이것도 좋은 판단은 아니다.
“……정답지만 고르는 사람이기에 사고의 흐름을 읽기가 쉬워. 자넨 공격성도 뛰어나고 성취 욕구도 상당해. 그러면서도 분별력과 자제력이 있어서 상부의 골칫거리가 되진 않지. 그야말로 제국이 요구하는 모범적 군인의 표상이야. 과연 두 자리 숫자 보육원에서 올라온 이레귤러다워.”
결코, 칭찬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키누안의 눈을 봐선 안 된다. 나는 애써 눈꺼풀을 계속 닫고 있었다.
눈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내던진 말에 반응하는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감정의 방향성을 알 수 있고, 그 깊이와 강도는 눈꺼풀의 떨림과 동공의 축소와 확대로 드러난다.
키누안이 나긋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중후하면서도 부드럽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내게 접근한 게 과연 자신의 의지인지부터 생각해보게나. 자네가 보조 연산장치도 없이 탄도통제술을 사용할 때부터 상부에선 준비를 시작했을 거네. 나와 같은 이레귤러이면서도 아키에스 전투술의 적성을 갖춘 자가 나타났으니 말이야.”
나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내 몸은 감정의 일렁거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내 자유의지다. 나는 정찰 임무 중 강대한 적을 만났다. 힘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관들의 기록을 뒤져 훈련을 도와줄 특별한 사람을 찾았다.
이 모두가 내 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내 선택에 다른 사람의 개입은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제가 선택한 겁니다.”
난 참지 못하고 눈과 입을 열었다.
“루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의 노예네. 자신이 노예라는 걸 아는 자와 모르는 자만 있을 뿐이지. 자유의지란 내 의지로 선택했다고 착각하는 상상의 산물이니까.”
키누안이 무릎을 잡으며 일어섰다. 그는 내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전투 반사를 억누르며 그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걸 용납했다. 극도로 경계하는 상대에게 신체적 접촉을 허용하는 건 내게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훈련을 받았으니까.
“돌아가세나. 헤일라스에게 보고하고 싶다면 보고해도 되네.”
나는 근위대장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키누안의 말은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몹시도 불온하다.’
키누안의 말을 고스란히 보고한다면, 상부에선 내 심리검사를 다시 시행할 터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만큼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나는 흔들리고 있다.
키누안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레이.’
그 녀석의 영향도 있었다.
나는 앞서가는 키누안을 따라갔다. 우린 복귀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일레이는 불순분자다.
비록 녀석이 내 친구일지라도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일레이를 멀리했을 것이다.
일레이는 때때로 제국의 체제에 의문을 품고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녀석을 고발할 생각은 없지만, 동조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제국은 나를 인정했어.’
밑바닥의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제국의 체제 덕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난 그 수혜자이며 제국이 건전하다는 증거다.
어차피 모두가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없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자, 그리고 바깥의 적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엘리트 군인들이 더 많은 걸 가지는 게 당연하다.
제국에 필요한 능력을 가진 자가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이견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요즘 들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후우…….”
나는 정좌한 채로 명상을 했다. 그간에 있었던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키누안의 말을 몇 번이고 상기했다.
‘키누안과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게 맞아.’
미적거렸다간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미보고는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겪은 걸 고스란히 상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군인이다.
‘하지만 내게 심리검사를 시행할 거야.’
불온한 사상에 전염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피할 순 없다.
분명히 예전보다 심리검사에서 낮은 점수가 나올 거다. 차라리 점수가 처음부터 높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낮아진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다. 나쁜 사상에 오염되고 있다는 거니까.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키누안도 이걸 노린 건가?’
나는 키누안이라는 사내에 대해 점차 알게 되었다. 그는 과거와 추억에 젖은 노병이 아니다. 발톱과 이빨이 빠진 맹수도 아니다.
키누안은 아직도 맹렬하게 불타고 있는 화마였다. 불꽃과도 같은 갈기를 바짝 내려 숨기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근위대장도 키누안을 경계하고 있다. 그 본질적 이유까지야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말이다.
‘일단 키누안 곁에서 아키에스 전투술을 습득해 두는 게 좋아. 효율이 나쁠 뿐이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뇌의 기능 이상이 올 정도로 수련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터다. 그 기미가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먼저 아키에스 전투술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근위대장에게 보고하려면 심리검사를 통과할 준비를 해야 한다.’
결단이 끝났다. 나는 눈을 떴다.
“일레이, 시간 좀 내줘.”
나는 곧바로 일레이를 호출했다.
* * *
일레이는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케이블이 주렁주렁 달린 헬멧을 쓰고 있었고, 팔다리와 탈의한 상체에는 전극이 박혀있었다.
간헐적으로 일레이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의 근육은 진짜 움직이듯이 꿈틀꿈틀 경련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핏 봐도 훈련 강도가 굉장히 높았다.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될 터다.
‘일레이가 저렇게 열심히 훈련하다니, 별일이네.’
일레이는 단련을 설렁설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초에 군인이 되는 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타고난 재능으로 열정의 부족을 메꾸고 있을 뿐이다.
‘일레이는 두 자리 숫자 보육원에서 자랐어도 근위대 생도로 뽑혔을 놈이야.’
나는 정말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일레이를 보다 보면 가끔 화가 났다.
치이익!
일레이의 시뮬레이션 헬멧 틈새에서 증기가 흘러나왔다. 유압 실린더가 움직이면서 헬멧이 위로 올라갔다. 그의 팔다리에 박혀있던 전극도 툭툭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일레이는 젖은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턱과 머리카락을 따라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몇 시간이고 뛴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나 마셔.”
나는 훈련실로 들어서며 음료를 던졌다. 일레이는 보지도 않고 손만 뻗어 음료를 받았다. 그의 동공이 흐릿했다.
나는 일레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가상 시뮬레이션에 빠졌던 뇌가 현실로 복귀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현실을 점층적으로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뇌를 속이는 것.’
시뮬레이션 돌입은 뇌를 속이는 일이다. 현실로 돌아오는 건 뇌가 속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다. 몇 번 해보면 알지만,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
일레이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현실 복귀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생도 평균보다 회복이 두서너 배 빨랐다. 정신의 회복 탄력성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뭐, 내가 필요해서 부른 거니까. 당연히 기다려야지. 급한 건 아니니 씻고 와.”
나는 샤워실로 걸어가는 일레이를 보며 말했다. 다른 생도도 그러하듯 일레이도 잘 단련된 근육질이었다. 팔다리 의체의 인공 피부는 위화감 없이 어우러졌고, 접합부는 흔적조차 찾기도 힘들었다.
샤워실 내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가만히 서 있으면 세척부터 건조까지 알아서 끝나는 자동식이다.
일레이는 금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벽에 걸린 생도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하하, 네가 날 먼저 찾아오다니 무슨 날이야? 생일 선물만큼 반갑네.”
일레이가 가슴팍에 걸친 윗옷을 잡아 내렸다. 그의 웃음을 보니 시뮬레이션의 피로를 완전히 떨친 듯했다.
“나가서 이야기해.”
나는 턱짓하며 시뮬레이션 훈련실을 먼저 나섰다. 바깥은 한적했다. 담벼락 너머의 연병장에선 아래 기수의 생도들이 보였다.
“날씨가 좋네. 여자애나 불러서 외출할 걸 그랬나.”
일레이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일레이, 너도 훈련을 따로 하긴 하는구나. 다시 봤다.”
“저번에 너한테 처참하게 발렸잖아. 꽤 열 받더라고.”
그런 거였나. 일레이도 사내이긴 한가보다. 비슷한 수준인 줄 알았던 놈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력하게 지면 향상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저번에 명문가에선 선별검사를 조작한다는 말을 네가 했었지?”
나는 운을 뗐다. 내가 먼저 이런 불온한 말을 할 줄이야. 2, 3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암암리 다 아는 사실이야. 어차피 미달인 녀석은 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걸러지지만.”
참고로, 선별검사에는 심리검사도 포함되어 있다.
“넌 심리검사를 어떻게 통과한 거지?”
나는 빌빌 말을 돌리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찌 보면 해선 안 될 말이기도 했다.
‘넌 선별검사를 조작했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심리검사는 기만과 거짓말로 통과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일레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심리검사를 통과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눈동자만 움직여 나를 쳐다봤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일레이도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터다.
나는 일레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말했다.
“방법이 있다면 당장 가르쳐줘. 지금 내게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불순한 의도를 내놓고 드러냈다.
“이걸 물어보는 이유는 묻지 않을게, 루카.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네가 먼저 말했을 테니까.”
“심리검사 조작을 묻는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제국에게 득이 되는 일이야.”
나는 내 충성심이 변치 않았다는 걸 강조했다. 쓸데없는 오해는 피하고 싶었다.
일레이는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패턴화된 자신을 외부 세계로 내세우고, 자의식은 관측자로 내면에 배치하는 거야. 그러면 심리검사를 넘어갈 수 있어.”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일레이의 말을 곱씹었다. 곧 나는 인상을 구겼다.
“……뭔 개소리야?”
일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