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71)
배드 본 블러드-171화(171/197)
171
나는 떠오른 공중차량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보더시티의 야경은 밤이 무색할 정도로 빛기둥이 환하게 치솟고 있었다.
‘오래된 잡동사니 상자를 털어 넣은 듯한 도시.’
보더시티에는 규칙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규격과 양식도 제멋대로였다. 심지어 도로의 크기도 제멋대로라 멀쩡히 주행하다가 폭이 줄어들어 막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당연히 이럴 것이다.’라는 수준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도시였다. 어딜 가도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투성이고, 변수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도시였다.
‘환경에 순응해라.’
나는 아래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를 얽매는 상식을 비우고 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관념적인 규격에 얽매여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
현실은 늘 우리의 예상보다 더 복잡하고 다변적이다. 유연하지 못한 사고는 기상천외한 현실을 만나면 부서지고 만다.
현실이란 말도 안 되는 일들로 가득 찬 부조리한 제비뽑기 상자다. 똑같이 손을 넣어 뽑더라도 누군가는 한 번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행복을 얻고, 누구는 열 번을 뽑아도 고통만 맛본다.
‘부조리한 현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치열하게 더 노력한다고 정직하게 보답해 주지 않는다. 결과는 기대를 배반하기 일쑤이고, 노력은 그때마다 헛되이 증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그런 부조리에 절망하지 않고…… 한 번이라도 더 제비뽑기 상자에 손을 넣는 것이다.
행복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불행으로 그득한 상자에 손을 넣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니까.
뽑고, 뽑고, 또 뽑는다.
대부분은 불행이겠지만, 어쩌다가 행복이 나오길 바라면서.
-가브리엘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군. 보더시티 서쪽이다.
엔이 공중차량을 휙 돌리며 말했다.
“벌써 찾은 건가?”
-쟈파 상사의 영업장은 보더시티 전역에 퍼져 있다. 거긴 전부 24시간 영업이 기본이지. 특정이 쉬운 사람이라면 금방 찾아.
특정이 쉽긴 하다. 팔다리가 기계이고, 덩치가 크며…… 험상궂고 못생긴 남자.
공중차량은 낮게 날면서 건물 사이로 빠져나왔다.
위이잉!
공중차량이 우아한 선회를 뽐내며 5층 건물 위에 섰다. 착륙할 비행장은 없었다.
-내려.
엔이 조작 장치를 누르며 차량의 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어떻게 내릴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이군.”
나는 문틀을 잡으며 아래를 보았다. 엔도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해서 묻는데 밧줄이라도 필요한 건 아니지?
“설마.”
내가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난 적응형 입체기동 성적이 우수하다. 불규칙한 장애물이 많은 도심지나 숲, 그리고 지금 같은 낙하 상황에서 유용한 기술이다. 나는 복잡하게 얽힌 설비와 건물을 단번에 인지해 최적의 경로를 찾아냈다.
키리릭, 쿵!
나는 손끝으로 전신주를 긁으며 착지했다.
쿠- 웅!
엔은 더 거칠게 착지했다. 덩치만큼이나 요란하고도 묵직했다. 그의 전투복도 같이 출렁거렸다.
덜컹.
우리는 건물 1층에 입점한 쟈파 피자 12호점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의자와 탁자가 제자리인 게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벌써 놈이 도망갔다고요.”
점주 모자를 쓴 인간 남자가 나오더니 엔에게 따지듯 말했다. 쟈파 상사의 용병 업무 중 하나가 사업장 경비인 듯했다.
-어디로 갔지?
“뱀 한 마리 피자를 세 판이나 훔쳐 먹었습니다. 뱀 효소 맥주도 다섯 잔이나 마시고요!”
-흠, 먹을 줄 아는 놈이군. 그래서 다시 말하는데 놈은 어디로 갔지?
“생긴 것부터 먹고 도망갈 것 같은 놈이라 피자에 추적기를 넣어뒀습니다.”
점주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칩을 엔에게 던졌다. 단말기에 칩을 꽂으니 추적 방향이 잡혔다.
-조만간 승진하겠어. 본사로 갈 준비를 해둬.
엔이 그리 말하며 가게를 나왔다.
나와 엔은 거리를 뛰며 가브리엘의 흔적을 쫓았다. 병원에서 막 일어난 가브리엘은 거동이 느렸기에 멀리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브리엘의 뒤통수가 보였다.
철컥.
목표를 발견한 엔이 등에 부착된 총기를 꺼내서 어깨에 견착했다. 자연스러운 전술 사격 이행이었다. 훈련을 제대로 받은 놈이라는 게 느껴진다.
-안심해라, 마취탄이다.
엔은 그리 말하며 사격하려 했다.
퉁!
내가 발끝을 뻗어서 엔의 총신을 올려 찼다. 엔은 용케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나를 보았다.
-뭐 하자는 거지?
“험한 수단을 쓸 필요는 없어. 가서 대화만 하면 돼.”
-앙귀스 레지나의 무릎을 날려 먹은 놈이 할 말인가?
“그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니까.”
-흠, 말이 되는군. 하지만 가브리엘도 내 지인이나 고용주가 아니지. 다치든 말든 알 바가 아니라는 소리다.
“나와 싸울 생각이면 시도해 봐.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그 팔을 박살 낼 테니까.”
엔의 전투 헬멧 안광이 가늘어졌다.
-네놈이 떠드는 사이에 표적이 도망간다. 우리를 발견했어.
엔의 말대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나’를 알아본 가브리엘이 부리나케 도망가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허름한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들어갔다. 그가 인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브리엘은 덩치가 크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수준에서 이야기다. 외계종족 중에선 표준 체격이 가브리엘인 놈들이 수두룩해서 인파에 섞이고 있었다.
-나는 위쪽으로 올라가겠다. 네가 놓칠 것 같으면 쏠 테니까, 잘해 봐.
엔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가장 높은 건물로 향했다.
곧 새벽인데도 거리의 인파는 득실거렸다. 생각해 보면 야행성인 종족도 많으니 이상할 게 없다.
‘망할, 가브리엘.’
난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며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가브리엘은 그 큰 덩치로 먼저 인파를 빠져나가더니 냅다 뛰었다.
‘정말 그냥 쏴버릴까.’
손가락이 벌써 근질근질했다.
‘좋아, 길이 보인다.’
주변이 눈에 익자마자 경로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적응형 입체기동 덕분이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단번에 거리를 좁힐지 상상의 선이 이어지며 보이는 듯했다.
나는 코트로 들어가던 손을 다시 꺼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위잉.
다리의 출력이 산뜻하게 올라갔다. 매번 느끼는데 사용감이 정말 경쾌하고 가벼운 의체였다. 금속을 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탓!
뛰어오른 나는 돌출된 간판을 붙잡았다. 그리곤 악력만으로 몸을 끌어 올리면서 이중 도약하듯 솟구쳤다.
단번에 인파가 내 발아래에 있다. 그러나 내가 착지할 만한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 여럿을 병원에 보내지 않으려면 다음 발판을 찾아서 내디뎌야 한다.
으적!
나는 눈앞에 보이는 발코니의 난간을 밟았다. 철제 난간이 내 발자국을 따라 찌그러졌다. 몸을 살짝 웅크린 나는 난간을 부수듯 뛰쳐나갔다.
콰직!
이건 무조건 부서졌군. 자칫하면 발코니에 금이 갔을 수도 있겠다.
가속을 붙인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벽을 따라 이동했다. 남들이 보면 벽을 타고 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 같은 재주는 내게 없다. 지형지물을 붙잡으며 발판 삼아 계속 나아가는 거다.
파직!
내가 지나간 자리로는 크든 작든 간에 파손이 일었다.
“저 새낀 뭐야?”
“놔둬, 미친 새끼인가 보지.”
이 정도면 내게 이목이 쏠릴 만한데도 흘깃 보며 중얼거리는 게 다였다. 여기도 만만찮게 사건 사고가 일상인 듯하다.
건물의 외벽을 타듯 나아가니 가브리엘이 금방 가까워졌다. 뒤뚱뒤뚱 달리는 가브리엘의 뒤통수가 빤히 보인다. 머리털의 개수조차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퉁!
내가 벽을 박차며 가브리엘을 덮치듯 뛰어올랐다.
쿠- 웅!
나는 떨어지면서 가브리엘의 등을 어깨로 밀었다. 나와 그는 뒤엉키면서 철퍼덕 넘어졌다. 물론 정신이 없는 건 가브리엘뿐이다.
콰드드득!
나는 뒹굴면서도 가브리엘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꺾었다. 큼직한 기계 부품이 바깥으로 이탈하며 통통 튀었다.
“카악, 컥! 루, 루카? 젠장, 역시 진짜 너였구나, 꿈이 아니었어. 빌어먹을!”
가브리엘이 날 알아보더니 기겁했다.
“진정해, 가브리엘.”
“미,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라고!”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
나는 가브리엘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렸다. 의수의 출력이 높아지면서 거구가 내 손에 끌려 나왔다.
“그냥, 날 죽여줘. 난 다 잊고 싶어. 나, 난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고.”
가브리엘은 밑바닥에 널린 부랑배처럼 이를 딱딱 떨고 있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간의 공백은 매서웠다. 눈앞의 사내는 내가 아는 가브리엘이 아니었다.
내 기억 속의 가브리엘은 자존심이 강한 놈이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부정할 정도로 심약하지 않았다.
먹먹한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난 화가 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저 서글펐다.
“잘 들어, 가브리엘. 정말 뒈지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내겐 공백이 있다. 남들이 다 겪은 12년을 나만 몰라. 그러니까 말하지 않으면 널 고문해서라도 알아낼 거다. 어차피 뒈질 생각이니까 내가 무슨 수단을 써도 불만은 없겠지?”
나는 가브리엘의 멱살 대신에 목을 쥐었다. 단단하게 고정된 내 손가락이 가브리엘의 피부를 밀어 올렸다. 목덜미의 피부가 찢어질 것처럼 벌겋게 충혈됐다.
“커억, 끄윽, 꺽!”
가브리엘은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였다. 그제야 그가 주먹을 들어서 나를 치려고 했다. 난 반대편 손을 뻗어서 가브리엘의 주먹을 쳐냈다.
캉!
소리가 차갑게 퍼졌다.
“좋아, 공격성은 남아있네. 그렇다는 건 아직 살아갈 힘이 있다는 거다.”
내가 가브리엘을 벽까지 밀 듯이 내던졌다. 등부터 벽에 처박힌 가브리엘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커헉, 컥! 아프잖아, 이 자식아.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보니 진짜인가 보네.”
가브리엘이 붉게 달아오른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진짜가 맞아. 몇 번이나 그 소리를 하는 거야?”
“다들 네가 회복할 가망이 없다고 했거든. 그 잘난 황실의 의사들도 똑같이 말했어. 엄청나게 잘난 척하는 인간들 말이야.”
이제 대화가 좀 통할 것 같았다. 내가 알던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지젤이 행방불명될 때, 네가 경호 책임자라고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약속해줘, 루카.”
“무슨 약속?”
“말을 듣고 나서 날 죽이지 않겠다고.”
“설마 네가 지젤을 납치한 범인이라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내가 친구의 여동생을 납치할 정도로 막돼먹은 새끼로 보여?”
그렇긴 하다. 가브리엘이 얼빠진 새끼이긴 해도, 사악한 인간은 아니다.
“그럼?”
“지젤이 행방불명이 된 날, 나는 여자랑 놀고 있었거든. 그래서 기억이 없어.”
“비번이었어?”
가브리엘이 머쓱하게 뺨을 긁었다.
“그랬다면 비번이라고 했겠지. 그냥 땡땡이친 거야.”
나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누구에게도 내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새카맣게 타오른다. 성질 같아선 가브리엘의 뼈 마디마디를 가루로 쪼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가브리엘은 내 공격성을 일부러 자극한 거다.
“얼빠진 새끼인 척 굴지 마.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가 보지? 하지만 그 감정을 날 통해서 해소하려고 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지젤은 가브리엘을 계속 경호 책임자로 데리고 다녔다. 가브리엘이 그 정도로 무책임하게 일하진 않았다는 거다.
만약, 가브리엘이 비번이 아닌데도 놀러 나갔다면 ‘함정’에 빠진 거다.
“……가브리엘, 잘 들어. 그날 너와 같이 놀았던 여자를 기억해?”
“나도 지젤이 행방불명되자마자 이상해서 그 여자를 찾으러 갔어. ‘함정’에 빠졌다는 걸 나도 알아챘거든.”
아까도 느꼈지만, 가브리엘도 성장했다. 깊이가 있는 사고를 통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여자와 어떻게 만난 건데? 그것부터 말해.”
“지젤이 보더시티에 자주 출장을 나갔고, 나도 매번 따라오다 보니 여기서 사귀는 여자가 생겼어. 나중엔 홀로 키우는 애가 있다고 나한테 고백하더라고. 뭐, 내가 그런 거 따지는 성격은 아니잖아? 괜찮다고 했지. 그러다 보니 양부 같은 느낌으로 그 애와도 교류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보가 들어오니 사고가 폭주하며 이야기가 맞물린다.
‘가브리엘은 정이 많아.’
공사 구분을 못 하고 사적 감정에 휘둘리는 건 가브리엘 본인의 장점이자 약점인 기질이다.
“루카, 나, 나는…….”
지금까지 말을 잘하던 가브리엘이 다시 벌벌 떨었다. 그가 양손을 교차하며 자신의 목덜미를 감더니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벅벅 긁어댔다.
‘트라우마.’
외상 후 스트레스가 가브리엘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마약굴에 파묻힌 건 단순한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됐어. 나중에 이야기해.”
이대로 부정적 기억을 되살리다간 가브리엘의 정신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 그가 약물에 의존한 건 오히려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들어봐, 난, 그 애의 생, 생일파티라고 갔어. 30분이면 된, 된다고 했지. 너무 기대하길래 안 갈 수가 없었어. 선, 선물만, 주고, 오려고 했거든. 술, 술도 마실 생각이 없었고. 으, 어, 아아아, 아아아으끅, 흐윽, 나는, 난, 아, 아…….”
가브리엘이 벌벌 떨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그가 울먹거리면서 날 보고 있었다.
“……다, 다 죽었어. 내 부하도, 내 여자, 시렌도, 그리고, 그 애, 아, 루니아도, 아, 여자애인데, 죽었어, 아직, 어린데, 아아.”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가브리엘의 정신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의 진짜 트라우마에 비하면 나에 대한 죄책감은 사소한 수준이었다.
난 조용히 손을 들어서 가브리엘의 턱을 밀다가 짧게 쳤다. 뇌가 요동치면서 녀석의 의식을 끊겠지.
툭!
가브리엘이 날 붙잡은 채로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