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8)
배드 본 블러드-18화(18/197)
018
“지키고 싶은 자아를 밀봉하듯 내면에 보관하는 거지. 정신 통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도 어떤 충격으로 기억을 잊거나 인격이 나뉘는 경우가 있어. 우리의 경우에는 그걸 의식해서 하는 거야.”
일레이가 부차적으로 설명했다. 내 표정은 더더욱 나빠졌다.
이론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신은 육체처럼 구분하기 좋게 나뉘지 않는다. 조금만 통제가 흐트러져도 형체가 무너지며 뒤섞이는 액체나 마찬가지다.
“그게 가능한……. 젠장, 가능하니까 네가 말하는 거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루카, 우리가 미소를 지으면 뇌는 즐거운 일이 없는데도 즐겁다고 생각해. 생각보다 우리의 뇌는 멍청한 거지. 속이려고 한다면 속일 수 있어. 심리검사는 겉으로 드러난 표층의식까지밖에 들여다보지 못해.”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
일레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제국에 충실한 군인이라고 자신을 세뇌하듯 행동 양식과 사고를 패턴화해. 충실한 군인인 자신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거지. 그러면 정말로 표층의식에 충실한 군인의 자아가 덮어쓰기를 시작해. 가짜로 시작한 게 진짜가 되는 거지. 뇌는 우리의 행동을 따라가며 사고하니까.”
반복된 연기가 정신에 영향을 미쳐 연기한 캐릭터를 뇌가 진짜인 것처럼 인식한다.
듣고 보니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주의점은?”
“그 가짜 자아를 오랫동안 유지하면 점차 떼어내기가 힘들어지면서 원래 자아가 심층의식 아래로 깊이 가라앉아. 바닷속에 잠긴 상자가 녹슬어 열리지 않는 거지. 설사 열리더라도 가짜로 만든 자아와 뒤섞여 분리조차 불가능해져.”
“가짜, 진짜라고 나눠서 불러도 사실은 둘 다 진짜인 거니까 그렇겠지.”
내 말에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역시 이해가 빠르네.”
“넌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다른 나라의 책과 데이터에서. 특히 벨라토에는 재미난 옛 기록이 많아. 지구에 살던 시절의 인류 기록 말이야.”
그럴 만했다. 마지막까지 지구에 남아 있던 인류의 후손이 벨라토 연방이다.
“루카, 나는 선별검사가 있기 두어 달 전부터 내 아버지를 따라 했어. 내가 아는 가장 충실한 군인이거든. 일어나면 아침마다 역대 황제의 이름을 한 명씩 언급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일레이가 자신의 방식을 설명했다. 나는 그 말을 다 듣고선 잠시 생각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남을 따라 할 것도 없어.’
과거의 나를 연기하면 된다. 그때의 나는 심리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니까.
제국에겐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불온한 말엔 적개심을 불태우던…….
괜히 입맛이 썼다.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게 새삼 다시 느껴졌다.
“조언 고맙다.”
“천만의 말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조심해라, 루카.”
“너한테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탄식이 절로 나왔다.
“넌 나와 달리 귀족도 아니니 지켜줄 배경이 없잖아. 나보다 더 조심해야 하지.”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일레이는 정말로 날 걱정하고 있었다.
심리검사 조작이 걸려도 일레이는 명문가 출신이기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장이다. 팔다리 의체를 빼앗긴 채로 길바닥으로 나앉는 건 당연하고, 어쩌면 지도에 나오지도 않는 곳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강제노역을 당할지도 모른다.
일레이에게 등을 돌린 나는 대답 없이 손만 들어 인사했다.
* * *
내 외부 자아 구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거의 나를 고스란히 투영하면 된다. 과거라고 해봐야 현재의 나와 엄청 다른 것도 아니다.
지금 심리검사를 받더라도 점수 자체는 그렇게 낮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내 점수가 지나치게 높았던 게 문제지.’
상부는 내 점수가 낮아진 걸 보고 불온사상의 전조 증상이라 판단할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일레이와 접촉을 끊었다. 일레이도 그 이유를 알기에 굳이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일레이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반제국적인 유형이었다.
그러나 키누안과의 만남과 훈련은 빼먹으면 안 된다. 난 그에게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키누안은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굴면서 평범하게 나를 대했다.
키누안은 종종 나를 데리고 하층 구역으로 내려갔다. 대부분 훈련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러했다.
“루카, 20초를 주마. 내부 인원을 전부 제압해라.”
키누안이 하층 구역의 스산한 건물 앞에서 말했다. 그는 그 어떠한 부가 설명도 하지 않았다.
기이잉.
나는 팔다리 의체의 출력을 적당히 끌어 올렸다. 기계의 미미한 진동이 생체 부분까지 전해졌다.
덜컹.
건물 입구의 문고리는 꺾이지 않았다.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내겐 상관없다.
우드득!
내 의체의 악력은 철판조차 뜯는다. 나는 손잡이를 꺾어 잠금장치를 박살 냈다. 동시에 문을 걷어차 시야를 확보했다.
자,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단숨에 뇌에 때려 박다시피 했다, 메마른 해면체가 물을 빨아들이듯.
인간은 원래 집중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러나 나는 시야를 더 넓힌 상태에서 집중력까지 끌어 올렸다. 아키에스 전투술 특유의 감각 인지 확장이다.
지끈, 지끈.
벌써 두통이 생기고 있었다.
‘갱단의 사무실.’
갱들이 낡은 사무실에 너저분하게 앉아있었다. 벽면 디스플레이에선 남녀의 정사 장면이 영상으로 나오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데이터칩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탁자에는 도란도란 앉아 카드 도박에 빠진 갱이 세 명이 있고, 침대에는 약에 취한 듯이 탁한 눈으로 누워있는 갱이 한 명, 다 뜯어진 소파에서 정사 동영상을 보는 놈도 하나, 그리고 화장실에서도 인기척이 있었다.
갱단이 있을 거라곤 어느 정도 예상했다. 문을 열기 전부터 총기의 화약 냄새와 에너지 병기 특유의 쌉싸름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었다.
아직 1초도 지나지 않았다.
내 관측은 끝났다. 다음은 통찰이다. 그리고 판단을 한다.
갱의 생김새와 분위기, 무장의 상태를 보고 위험도를 파악하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곧 머릿속의 정리가 끝났다.
나는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억눌렀던 전투 반사를 해방했다. 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쩌억!
나는 몸을 굽히며 땅을 박찼다. 내가 서 있던 콘크리트 바닥이 찢어지듯 부서졌다.
산탄총을 든 갱과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어, 어어!”
갱의 입장에선 문이 열리자마자 내가 다가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의 사고는 일시적 공백이었다. 판단도 끝내지 못했으니 전투태세에 들어가지 못한다.
캉!
나는 갱의 총구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위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총을 든 팔도 같이 올라가면서 가슴이 환히 열렸다.
콰득!
내 주먹이 갱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의 피부 아래에는 충격 흡수를 위한 젤이 진피층을 대신하고 있었다. 물이 찬 듯한 흉부근을 볼 때부터 이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 주먹의 충격을 전부 흡수하진 못했다. 그의 등이 새우처럼 굽었다.
얻어맞은 갱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잠금이 걸린 기계 손가락 덕분에 총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콰드득!
나는 갱의 손가락을 꺾어서 뒤집었다. 가동 범위를 넘어간 손가락들이 우르르 부러졌다.
휘릭!
나는 떨어지는 산탄총을 잡아채서 오른쪽으로 겨누었다. 보지 않아도 적의 위치는 뻔했다. 내 머릿속엔 모든 정황이 보였다. 내 뇌 내에서는 주변 환경과 적들이 3차원 입체 지도로 훤히 보였다.
아직 제대로 움직이는 갱이 없기에 변수도 없었다.
산탄총을 인지한 내 오른팔에서 변화가 일었다. 팔꿈치에서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면서 관절은 기름칠을 덜 한 것처럼 뻑뻑해졌다.
타앙!
나는 견착도 없이 한 손으로 산탄총을 쐈다. 관절부가 잠긴 오른팔은 반동을 고스란히 버텨냈다. 이래서 같은 출력이라도 비싼 고급 의체가 좋다는 거다. 자질구레한 보조 기능이 은근히 도움이 된다.
키잉!
산탄총의 탄피가 멋스럽게 튀어 올랐다. 탄피의 궤적을 따라 열기가 아른아른 흩어졌다.
“끄아아아악! 내 소오오오오온-!!”
날카로운 비명이 퍼졌다. 사격하고 나서야 내 시선이 목표를 확인했다.
내가 쏜 총알이 침대에 누워있던 갱의 손을 통째로 날렸다. 생체 부위였는지 살점과 피가 튀었다. 터진 손목 단면에선 하얀 뼈가 애처롭게 드러났다.
“뭐, 뭐야! 시발! 시발!”
이제야 갱들이 반응했다. 벌써 두 명이 당한 뒤였다.
탕!
3초가 지나서야 나를 향한 첫 사격이 들어왔다. 성인물 영상을 보던 갱이 뒤늦게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아직 바지도 올리지 않아서 흉한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났다.
“피, 피해? 뒈져어어어! 뒈지라고!”
사격했던 갱이 기겁하며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고개를 젖혀 총알을 피한 나는 시큰둥한 시선으로 놈을 보았다. 전부 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폭력으로 입에 풀칠한다는 놈들이 이리도 안일할 줄이야.
심지어 당황해서 쏜 총알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빗나갔다.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무슨 이런 엉터리 같은 사격이 있단 말인가.
나는 대응 사격을 했다. 저놈은 가슴 보호대를 차고 있으니 죽진 않을 터다.
탕!
갱은 산탄을 맞고 벽면 디스플레이까지 날아갔다. 디스플레이가 깨지면서 여인의 교성도 노이즈에 섞여 사라졌다.
이걸로 총을 든 갱들은 모두 당했다. 나머진 칼과 전기봉 따위로 무장한 상태였다. 당연히 산탄총을 든 나를 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저 머저리들을 보니 총알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산 팔다리가 부서지기 싫으면 스스로 기절해라.”
전기봉을 든 갱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턱을 지졌다. 나머지 갱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어진 전기봉을 주워서 따라 했다. 그들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픽픽 쓰러졌다.
한바탕의 희극이 끝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응시했다.
‘남은 건 화장실의 수상한 인기척…….’
나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쪽으로 집중하자마자 내부의 소리와 냄새가 이질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인의 옅은 신음과…… 알고 싶지 않은 냄새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상상을 자극했다.
“망할 새끼들이…….”
지금 나는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에 걸리는 갱들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리고 싶었다.
끼익.
나는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넝마 같은 천 쪼가리를 입은 여인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족쇄와 연결된 사슬은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인중에는 코피가 몇 번이나 흐르다가 마른 흔적이 있었다. 그녀의 가랑이와 발아래에는 오래된 정사의 흔적과 악취가 눌러 붙어있었다.
으득.
나는 이를 갈았다. 내가 쥐고 있던 화장실 문고리가 으스러졌다.
카앙!
나는 벽에 박힌 족쇄를 잡아서 뜯어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박혀있었는지 군데군데 녹슬어있었다.
난 여인을 보았다. 그녀의 인지 능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야생 짐승처럼 욕조 구석까지 도망가더니 둔탁한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잘했어, 굿보이. 12초 정도 걸렸군.”
뒤늦게 키누안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냥 이 새끼들을 다 죽여버리면 안 됩니까?”
키누안은 화장실의 꼴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나신의 여인을 발견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라도 나름의 역할이 있지. 우린 외부인이네. 지나치게 개입해 이 바닥의 질서를 흩트리면 안 돼.”
“이딴 양아치들이 무슨…….”
나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너무 달았다. 냉정하지 못한 상태다. 화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세상엔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자가 많네, 이 여인도 마찬가지고. 힘이 없다면 이렇게 되는 거지.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나?”
키누안이 윗옷을 벗어서 여인의 어깨를 덮으며 말했다. 그의 동공에선 찰나지만 감정의 빛이 흘렀다.
‘키누안이 아는 여자인가?’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지인이 이런 꼴을 당했는데 저렇게 침착하게 말할 수 있을까?
여인은 힘이 없기에 처참한 꼴을 당했다. 나도 저렇게 살기 싫어서 악착같이 발버둥 쳐서 여기까지 온 거다.
평소라면 저런 여인을 경멸했을 터다. 제국이 준 기회를 붙잡지 못한 머저리라고.
하지만 가까이서 본 지금은 아무런 비난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연민과…… 부조리한, 이 사회의 구조에, 화가 났다.
혼란스럽다. 심리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갈무리했던 정신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먼저 나가겠습니다.”
나는 산탄총을 내던지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