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82)
배드 본 블러드-182화(182/197)
182
난 내 방으로 돌아가서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검토했다.
‘가브리엘은 의무도 다하지 못했고, 처음으로 생긴 가족도 잃었다.’
그 때문에 가브리엘은 아크바란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더시티에서 방황했다. 길다와의 연락조차 끊고 살아온 듯했다.
‘회사로 돌아갈 염치가 없었겠지.’
사정이야 어쨌든 가브리엘은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웠다.
‘가브리엘은 내 예상보다 유능한 경호원이었어.’
폐인이 된 이후에도 예전과 다른 면모가 녀석에게 번뜩이듯 드러났다. 훈련과 교육을 받고 경험이 쌓인 덕분이었다.
‘길다와 지젤의 사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이지. 어쩌면 적대적인 사이일 수도 있고.’
길다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면, 그녀에게 접근하는 건 몹시 위험한 행동이다. 그녀가 제국의 상층부에 내 행방을 말한다면 나도 자유로이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지젤…….’
그 이름 너머의 단어와 문장을 머리에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불안하다. 가브리엘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지젤이 성치 않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난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생각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파괴할 것 같았다. 내가 망가질 때까지 세상을 부수는 것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란 건 나도 안다. 그러나 감정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삑.
망막 디스플레이에 쟈파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기야 쟈파 말곤 내게 연락을 보낼 사람이 없긴 하다.
-저번의 약속 기억하시죠?
어니스트를 추적하며 쓴 돈이 많아서 잡일을 몇 개를 해주기로 쟈파와 약속했다. 솔직히 내가 쓴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돈 해야 나도 마음이 편했다.
“말만 해. 누굴 은밀하게 죽여줄까?”
-사람을 죽일 거면 당신을 쓰지 않을 겁니다. 암살자란 본디 총알과 같죠. 암살엔 버려도 되는 사람을 쓰는 법입니다.
“제법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군.”
-호욧, 아차, 아차. 말실수하고 말았네요.
말실수는 개뿔.
“본론이나 말해.”
-앙귀스 레지나의 보더시티 내부 투어가 있습니다. 그동안 경호를 맡아주시죠. 그러면 지금까지 제 피 같은 돈을 물 쓰듯 쓰신 것에 대해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그 여자의 경호를? 무릎에 총알구멍을 더 내달라는 뜻인가?”
-제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요. 저도 화낼 줄 압니다. 그리고 제 응징은 매섭겠죠.
“뭐, 좋아. 일을 해주겠다고 한 건 나니까. 그런데 그 많은 에퀘시안을 놔두고 굳이 날 쓰겠다는 건가?”
-앙귀스 레지나가 당신을 밀접 경호로 지정했죠. 그리고 지금 앙귀스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합니다. 여태 본업에서 이탈한 적은 없으나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죠. 그쪽 방면으로도 부탁합니다.
“감시 겸 경호로군.”
-무릎에 총을 쏘진 말고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무릎이든 팔이든 어디든 간에 말이죠.
나도 이번엔 쟈파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 요즘 쟈파의 인내심이 한계라는 걸 정말로 느끼고 있다.
“알았어. 자세한 일정은 정리해서 보내둬.”
-그리고 보얀을 그렇게 팼어야 했습니까? 크롤러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상대가 에르겐 윌터였어. 돈으로 매수할 수도 없고, 놈을 때려 팰 수도 없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 괜찮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크롤러 한 명을 퇴학시키려고 선생부터 학생, 그리고 보호자까지 벼르던 상황이었어.”
-보얀이 제 후원을 받는 학생이라는 걸 알고도 고압적으로 나오던가요?
“네 재단에 후원받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웃더군. 네가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
-저도 보통은 신경 쓰지 않겠죠, 호욧. 어쨌든 알겠습니다. 저도 근래 타지룬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 같군요. 제 이름을 내보이고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말입니다.
목소리 너머로 쟈파의 서늘한 미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
나는 옷장에 걸린 검은색 코트를 보았다.
가사 안드로이드가 주기적으로 방문해 내 방을 정리하고 옷도 세탁한다. 옷의 손상이 심하면 새 걸로 바꾸기도 했다. 물론 같은 디자인과 색상이다.
‘다른 옷을 준비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딱히 요청하고 싶지도 않았다. 옷차림과 외모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니까.
나는 알싸한 약품 냄새가 나는 코트를 걸쳤다. 보더시티에 머문 지 시간이 제법 지났다. 원래도 길었던 머리카락은 더 중구난방이었다. 이젠 묶어도 머리카락이 삐죽거리며 새어 나올 정도였다.
‘근위대에선…….’
생각해 보니 적당히 머리를 다듬어주는 기계가 있었다. 거기에 5분만 서 있으면 정돈이 끝났다. 은근히 편리한 기계였으나 보더시티엔 그런 게 없었다.
돈과 시간을 들여 가며 이발소를 방문하고 싶지 않으나 여기서 머리가 더 자라면 고려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좋아, 오늘도 그럭저럭 칙칙한 인간이구나, 루카.’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장비를 점검했다. 화광예도, 자동추적 권총, 단검. 이 정도면 내겐 차고 넘치는 장비다.
‘앙귀스 레지나의 보더시티 투어 공연.’
일정을 상기했다.
앙귀스 레지나는 2박 3일 동안 도시 전역에서 공연을 한다. 일정한 콘서트장이 있는 게 아니라 쟈파 상사의 업장을 돌며 판촉을 겸하는 일이었다.
투어 기간에는 쟈파 상사의 매출이 두 배 이상 오를 정도였고, 쟈파에게도 중요한 행사였다.
끼릭.
나는 평소와 달리 전투 가면을 썼다. 쟈파 상사 소속의 에퀘시안 용병이 쓰는 전투 헬멧과 안면부가 흡사한 형태였다. 다만, 인간 크기에 맞춰져 있었다.
전투 가면은 부차적인 기능으로 에퀘시안 용병과의 독립회선 통신과 시야 공유를 지원했다.
에퀘시안들은 공연구역 전체의 경비를 맡았고, 나는 앙귀스 레지나의 밀착 경호원이었다.
‘이 여자가 그만큼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고?’
제국 출신인 내겐 실감이 가지 않았다. 제국에도 이런 연예 직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직종은 아니었다.
나는 앙귀스 레지나의 빌라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승강기에서 내리며 나를 훑어봤다.
“가면을 썼네요.”
“경호 유니폼이야.”
“맨얼굴보다 낫네요. 덜 사나워 보여요.”
짙은 화장의 앙귀스 레지나가 방긋 웃었다. 그녀의 동공은 별빛을 담은 듯이 특이하게 반짝였다.
‘가식.’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난 앙귀스 레지나의 어둠을 봤다. 아이돌의 모습은 전부 가짜였다.
앙귀스 레지나는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지나치게 밝은 모습을 연기했다. 연기자로서도 대성했을 것이다.
‘앙귀스의 어둠은 키누안과 관련이 되어있다.’
나도 앙귀스 레지나에 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내가 열람 가능한 정보 내에서는 그녀의 과거를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제안을 하나 할게요. 절 데리고 에퀘시안들을 따돌려주면 제가 아는 키누안에 대한 정보를 넘겨드리죠. 쟈파와 키누안의 관계도요.”
앙귀스 레지나가 앞만 보고 걸으며 말했다.
“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
나도 곁에서 중얼거렸다.
“자력으론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우리와 키누안이 어떤 형식으로 얽혀 있는지 말이죠.”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뭐라도 돼?”
“네?”
“넌 쟈파와 내 거래의 부산물일 뿐이야. 단독으론 아무런 영향력도 없지. 내 의체를 만들어주지도 못하고, 내 뒷바라지도 못 해. 그저 춤만 추고 노래만 할 뿐이지. 혼자선 무엇도 못 하고 생산성도 없는 주제에 나와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 마라. 넌 쟈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존재야.”
앙귀스 레지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틀어서 나를 노려봤다.
“제가 무능하다는 건 당신의 비좁은 제국적 사고방식이죠.”
“내 생각을 바꿀 만큼 활약한다면 생각을 바꿔보지. 생각보다 난 유연한 인간이거든.”
나와 앙귀스 레지나는 빌라를 나섰다. 공기의 압이 바뀔 만큼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건물의 창문이 흔들릴 정도였다.
“와아아아아아-!!”
“앙귀스으으으으! 레지나아아아아!! 사랑해요-!!”
“뱀의 여왕을 찬양하라!”
에퀘시안 경호원이 안전선을 이루며 인파를 막아서고 있었다. 심지어 폭력 사태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친 몸싸움이 일어났다. 에퀘시안에게 당해 머리가 깨져 피를 줄줄 흘리거나 기절해 짓밟히는 이도 있었다. 분명히 사망자도 생길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앙귀스 레지나를 향한 열망을 토해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것 또한 광기로군.’
난 앙귀스 레지나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외계종족조차 앙귀스 레지나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영향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앙귀스 레지나에겐 힘이 있었다. 대중과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강력한 힘이다.
제국의 황실도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국가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다. 그들의 협조와 노동력 없이는 국가를 원만하게 운영할 수 없다.
또각, 또각.
앙귀스 레지나가 에퀘시안으로 이뤄진 원 중심에 섰다. 그녀는 철저하게 계산된 동작으로 손을 크게 뻗더니 곱게 맞잡았다.
“여러분…….”
앙귀스 레지나가 아련하게 말했다. 연민을 건드리는 특정한 주파수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전자 초커에는 확성기 기능이 있는지 목소리가 간지럽게 울려 퍼졌다. 대중의 소란조차 관통할 정도로 소리가 중첩되며 넓게 퍼졌다.
“……사랑해요! 모두를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쟈파 버거의 앙귀스 세트와 쟈파 피자의 레지나 세트를 사시면 포옹 추첨권이 있어요. 그걸로 저를 만나주세요.”
너무나 뻔한 상업적 발언이었다. 이딴 말에 호응하고 감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보더시티에 살면 지능 지수가 떨어지기라도 하는 건가?
“무조건 살게요! 오늘도 10세트를 샀어요!”
“10세트? 웃기고 있네. 난 100세트를 샀어! 냉동해서 일 년 동안 먹을 거야!”
“100세트든 1000세트든 당첨될 때까지 먹을게요! 반드시 당신을 만날 거예요! 앙귀스 레지나!”
성별, 나이, 종족 가릴 것도 없었다. 모두가 앙귀스 레지나에게 열광했다.
나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앙귀스 레지나를 경호했다. 내 얼굴을 가리는 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앙귀스 레지나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신상을 파헤치고 죽이려 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제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앙귀스 레지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나를 향해 입만 뻥긋거렸다.
쟈파가 앙귀스 레지나에게 절절매며 편의를 봐주는 이유를 알았다. 단순히 앙귀스 레지나를 감정적으로 아끼는 것만은 아니었다. 앙귀스 레지나는 그만한 효용성이 있는 인재였다.
‘앙귀스 레지나 같은 부류의 인간을 나도 안다.’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 크라치아가 앙귀스 레지나와 동류였다. 철저하게 계산된 언행은 하나하나가 타인의 환심을 낚아채고 있었다.
타고났다는 것만으로는 그녀의 인기와 카리스마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앙귀스 레지나는 프란세크와 비슷하게 표적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특정 역할을 맡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교정하고 개조한 사람.’
내가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