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83)
배드 본 블러드-183화(183/197)
183
보더시티는 다양한 종족이 상주하는 도시다. 노바스 행성에서 이보다 더 혼란한 다종족 거주지는 없을 것이다.
다양성의 원칙을 내세우는 벨라토 연방도 결국은 인류 중심의 국가다. 실제로 내가 본 고급 학교나 관료, 상류층 거주지에선 인간이 다수였고, 빈민가로 갈수록 외계종족의 비중이 높았다.
‘보더시티의 종족 다양성은 지나칠 정도다.’
종족이 다르면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가 생긴다. 인간조차 호르몬에 의해 사고가 달라진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종족 간의 가치관 차이는 쉽게 좁힐 수가 없다.
다름의 포용은 어려운 일이고 이상론이다. 신기루에 불과한 무지개를 좇아 달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벨라토 연방도 인류 중심의 국가이고, 인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종족만이 주류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현실은 꿈이 아니기에 자고 일어나도 우리의 곁에 있다.
‘거주 종족이 많아지고, 문화의 다양성이 높을수록 사회적 비용은 올라간다.’
보더시티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회의 안정성을 포기한다.’
관리 자체를 놓아버린 것이다. 냉엄한 현실의 칼날 위에 여러 종족을 그냥 던져두었다. 서로 갈등을 빚고 문제가 생기며, 전쟁하듯 싸우고 죽이더라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안정성이 떨어진 사회는 대개 자멸하는 법이나, 보더시티의 폭발적인 생명력이 그 모든 불안정성을 집어삼켰다. 보더시티는 혼란과 혼돈이 잉태한 미묘한 균형으로 유지되는 도시였다.
……내가 장광설을 머릿속에서 늘어놓을 땐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걸 인간 여자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며 선물 상자의 내부를 물끄러미 보았다. 무슨 종족인지도 모를 손가락이 덩그러니 절단된 채로 담겨 있었다. 심지어 그 손가락엔 리본이 묶여 있었고, 정성스러운 글씨로 ‘내 마음을 담아’라고 쓰여 있었다.
꿈틀, 꿈틀.
손가락은 잘리고도 신경계가 반응했다. 간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밤일에 자기 손가락을 써달라는 거겠죠. 처음도 아니에요. 이 사람은 이제 손가락이 두 개 정도 남았겠네요.”
앙귀스 레지나가 네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넌지시 상자 내부를 보며 말했다.
“손가락 다음에는 뭘 보낼지 기대가 되네.”
내가 농을 던졌다.
“아마 ‘그거’겠죠.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어요. 정말로 보낼지 말지 말이에요. 아, 그 손가락은 버리진 마세요. 나중에 써볼 거니까요.”
“뭐?”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서 앙귀스 레지나를 쳐다봤다. 나조차도 흠칫할 만한 발언이었다.
“농담이에요. 흐응, 이런 쪽으로는 놀라시는군요.”
앙귀스 레지나가 손가락이 담긴 상자를 잡더니 쓰레기통으로 내던졌다.
‘……흠, 진짜로 농담이었을까?’
이 의문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나와 앙귀스 레지나는 투어 2일 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도 공연을 네 군데나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동안은 보더시티 곳곳에 있는 쟈파 상사의 지부를 숙소로 썼다.
스륵.
난 앙귀스 레지나 앞으로 온 선물 상자를 계속 뜯었다. 가끔 위험물도 있기에 나 같은 경호원이 대신 확인하는 것이다.
‘큰 인형, 향수, 화장품, 손편지…….’
상식선의 선물이 대다수이긴 했다. 그러나 아까의 손가락처럼 기괴한 선물도 간간이 보였다.
나도 놀랄 정도의 선물인데 앙귀스 레지나는 태연하게 굴었다. 이런 부분에선 나보다 그녀가 더 완숙했다.
보더시티에선 여러 종족의 도덕과 윤리, 가치관이 뒤엉켰다. 사회적 불문율조차 없다시피 했다. 한 마디로 ‘당연하다’라는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였다.
‘피…….’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상자를 열었다. 혈서가 보였다.
-나와 사귀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딱 봐도 정신 상태가 위험한 녀석의 선물이었다.
“선물만 봐도 투어 중에 분명히 문제가 생기겠군.”
“아마 생기겠죠.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거든요. 오히려 그 편이 나아요.”
“낫다고?”
“자극적인 사건이 생기면 사람들은 더 주목할 거고, 제 명성은 더 높아지겠죠. 사람들은 생각할 거예요. ‘앙귀스 레지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대단하면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라고요. 명성과 인기는 어느 정도에 이르면 스스로 덩치를 불려가는 법이에요. 제 수준에 이르면 매력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후광처럼 작동하죠.”
앙귀스 레지나는 대중과 인기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쟈파의 인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그것도 키누안에게 배운 건가?”
내가 은근슬쩍 찔러 들어갔다. 유치한 방식이고, 앙귀스 레지나도 내 의도를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먹힐 것이다. 앙귀스 레지나는 자극을 추구하고 사람 간의 게임을 좋아한다.
“당신과 키누안의 이야기를 해봐요. 하나씩 교환하죠.”
앙귀스 레지나가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며 말했다. 라벨에는 ‘뱀 비료로 키운 포도밭의 포도주’라고 적혀 있었다.
또르르.
앙귀스 레지나는 손가락 사이로 잔을 끼우고선 포도주를 따랐다. 하나는 내 앞에 내려놓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입에 댔다.
“너부터 이야기해. 저번 내기에서 지고도 그냥 갔으니까.”
앙귀스 레지나가 대답 없이 창가에 앉았다. 오늘 공연이 끝날 때도 해가 저물었었고, 지금은 더 깊은 밤이었다.
그러나 보더시티의 빛기둥이 광해를 내뿜으며 사방팔방 뻗어있었다. 빛기둥은 간혹 이쪽으로 향했고, 그때마다 방안 내부는 대낮처럼 밝아졌다.
앙귀스 레지나는 창밖을 보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키누안은 몹시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사람이 그렇게 명석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죠. 그리고 제국 출신인데도 다정다감하고 친절했어요.”
나는 키누안이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를 배신했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어떻게 만난 거지? 내가 아는 키누안은 이득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다. 놈의 모든 언행에는 계산된 의도가 있지.”
“여기서 당신의 이야기를 해봐요. 그럼 쟈파가 절대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줄게요.”
앙귀스 레지나가 웃으며 잔을 가볍게 들었다. 나도 호응하듯 술잔에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포도주는 쌉싸름하고 떫었다.
“키누안은 내 스승이었다. 날 가르친 사람이 한둘은 아니지만, 지금 내 능력의 절반 이상은 키누안에게 비롯된 거지.”
“키누안을 좋아했나요?”
“싫어하진 않았어.”
“하지만 키누안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해보셨겠죠.”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이다. 나같이 냉소적인 부류의 사람조차 키누안에게 유대감과 호감을 느끼곤 했다.
“……그랬었지.”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쟈파도 그랬고요. 우린 키누안을 좋아했어요. 키누안은 뭐든 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고, 실제로도 해냈어요.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면 키누안에게 의존했죠. 제 ‘아버지’도요.”
새로운 인물이 나왔다. 앙귀스 레지나의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는 키누안에게 죽은 건가?”
“무례한 질문이네요.”
“우리가 그런 예의를 차릴 관계는 아니잖아.”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며 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마찰로 인해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 아버지의 죽음은 키누안과 관련이 있어요. 직접 죽였든 간접적이든 간에 말이죠.”
“그 복수를 위해 키누안을 찾는 거로군.”
“그럴지도요. 이번엔 제가 질문할 차례라고 생각해요…….”
앙귀스 레지나가 내 질문을 연거푸 흘렸다. 하지만 내겐 이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방향성이 잡힌다.
“……당신은 쟈파의 의뢰가 아니더라도 키누안을 찾아다니겠죠? 과거의 일 때문에?”
“그렇겠지만 우선순위는 아니야. 찾지 못하더라도 난 상관이 없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왜 꺼내는 거지?”
“제 지인과 팬 중에선 제국 출신도 제법 많아요.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라는 이름을 몇 번인가 들었죠. 아, 물론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너와 쟈파를 위해서라도.”
나는 여러 의미를 담아 말했다.
“십여 년 전에만 해도 당신의 인기가 상당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시간이 지나 수그러들었지만 말이죠. 진홍의 프란세크가 현 제국 황제의 정치 동반자이자 고문으로 활동했을 시기에 당신의 이름은 제국 선전의 도구였어요.”
나도 대강의 정황을 알고 있다.
‘폭풍기 이후로 제국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위로도 아래로도 제국은 혼란스러웠다. 제국은 아래에 속하는 대중을 빠르게 통합하기 위해서 내 이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하층민으로 태어나 근위대원으로 뽑혔고,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아 명문가의 양자로 편입됐다. 심지어 프란세크 황태자의 총애까지 받았다. 아주 극적인 삶이었다.
제국이 공정하다. 노력하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 봐라, 저기 루카우스 쿠스토리아가 있지 않냐. 타락한 귀족을 여럿 죽이고도 황족의 총애를 받는다. 제국의 황실은 지금도 너희의 곁에 있다.
폭풍기에 나는 민중의 편을 들었다. 이는 내 신념과는 무관했다. 당장 힘이 필요하기에 내 배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뿐이다.
“당신 때문에 제국의 귀족 가문에서는 하층민 출신의 인재를 양자로 들이는 유행이 불었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혼란스러운 정황과 당신의 명성 덕분에 제국 내에 계층 이동이 한동안은 활발하게 일어났죠. 당신도 여러모로 입지전적 인물이네요.”
“칭찬은 고맙지만, 난 내 이야기를 네 입으로 듣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말하다가 망막 디스플레이에 메시지가 강제로 뜨는 걸 확인했다. 당연히 쟈파의 연락이었다.
-투어는 취소입니다. 앙귀스 레지나 경호를 최우선으로 하세요. 차후 다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난 쟈파가 보낸 안전가옥의 위치를 확인했다. 에퀘시안 용병들도 쟈파의 지시를 받았는지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발소리가 곧 멎었다. 인위적인 적막이었다.
“쟈파의 메시지를 봤나?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앙귀스 레지나도 반짝이는 눈을 찌푸렸다.
“봤지만, 저는 투어를 멈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뻗었다. 앙귀스 레지나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끼릭.
난 조용히 칼자루를 잡았다. 감각을 곤두세우면서 이물감을 찾아내려 했다.
‘뭔가 이전에도 겪어본 듯한…….’
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공기를 혀로 머금었다. 환경 정보가 미뢰를 타고 뇌에 꽂혔다. 뭐 하나 꼬집기 힘들지만, 전투와 관련된 장비의 쇠 냄새가 독극물처럼 내 혓바닥을 자극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처음 시야에 보이는 건 에퀘시안 용병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죽어있다는 걸 알았다.
툭.
에퀘시안 용병이 힘없이 안쪽으로 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문틈 사이로 붉은 안광이 날 보고 있었다.
키이이잉!
내가 화광예도를 뽑았다. 칼집 마찰로 인해 칼날이 은은한 열광을 머금었다. 아직 절삭력 강화 효과를 보기엔 열이 부족했다. 나중에 라피스에게 부싯돌 역할을 할 만한 장비를 부탁해야겠다.
치직, 치직.
문 너머로 음성 변조기 특유의 잡음이 났다.
“화광?”
단 한 마디였다. 내 기억은 과거를 검색하듯 되짚었다. 이 기시감의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저 암살자와 만난 적이 있다.
딸깍.
나는 코트 안쪽에 걸어둔 전투 가면을 꺼내서 썼다. 적은 아직 날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의 나와 많이 달라졌을 테니까.
“다른 경호들을 부르…….”
“다 죽었을 거야, 관둬.”
내가 짧게 말했다. 적의 실력은 아주 대단하다.
문 너머의 적이 과거의 실력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난 승산을 장담하지 못한다. 하물며 더 노련하고 강해졌을 터다.
‘프란세크를 습격했던 쌍검의 여자 암살자.’
아까 마셨던 포도주처럼 쌉싸름한 추억이 떠올랐다.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싸움 중 하나다. 프란세크를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난 패배감을 제대로 맛봤었다.
‘순수한 역량만으로 날 압도했었지.’
위기가 날 찾아왔다. 하지만 난 기대로 마음 한구석이 설레는 걸 느꼈다.
저 암살자와 싸우면 확실해진다. 내가 과거보다 약해졌는지 강해졌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