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86)
배드 본 블러드-186화(186/197)
186
나는 안전가옥에서 체력을 보충하고 명상을 취했다. 눈을 뜨니 앙귀스 레지나가 숟가락으로 암살자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다.
“널 죽이려고 했던 여자야. 그렇게 정성 들여서 챙겨 줄 필욘 없어. 대충 그릇에 담아두면 개처럼 얼굴을 처박고 먹겠지.”
내가 벽에 등을 기대며 충혈된 눈을 깜빡였다. 전투 시에 뇌 다음으로 피로한 부위는 다름 아닌 눈이다. 나는 생체 안구의 기능을 한계까지 매번 끌어 쓰고 있었다.
“그래도 불쌍하잖아요.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터무니없는 동정심이다.
“만약, 저 여자가 젊은 남자였어도 네가 그런 동정심을 가졌을까?”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죠. 내 눈앞에 있는 건 젊은 남자가 아니라 죽어가는 노인이니까요.”
앙귀스 레지나는 내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암살자가 쇳소리를 내며 탁하게 웃었다.
“발 디딜 곳이 없어 방황하는구나, 애송아.”
암살자가 음식을 힘겹게 삼키며 말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노인이 됐다고 현명한 척이라도 해보고 싶은 건가? 넌 실제로 멍청해졌어. 뇌 기능과 인지 능력이 떨어졌지.”
“그것 또한 사실이군. 하지만 똑똑하다고 맞는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우둔하다고 틀린 말만 하는 것도 아니야. 너처럼 중심 없이 방황하는 자들은…… 과도하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미움을 받으려 하지. 그런 극단적인 감정압에 짓눌려야만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현학적으로 지껄여야 자신이 대단해 보인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
“예전의 너는 끝없이 갈등하면서도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했지. 내면화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어. 그게 비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었을지라도 말이야.”
대꾸해선 안 된다. 알면서도 나는 그녀와 말을 이어갔다.
“옳고 그른 게 없다고 한 건 그쪽이야.”
“하지만 자신에겐 있다고 네가 당돌하게 대꾸했지.”
“그렇게 남에게 훈계하고 싶으면 암살자가 아니라 선생이나 하지 그래?”
“이미 하고 있어. 암살자는 부업이지.”
처음으로 암살자의 사적인 정보가 흘러나왔다. 난 놀라는 게 아니라 정보를 낚아채며 귀를 기울였다.
“더럽게 번 돈으로 학교라도 세워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나? 애틋하네, 아주 멋져.”
“아키에스 빅티마의 화법은 언제 들어도 재밌군. 내게서 정보가 새어 나왔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음 정보를 예측해 넌지시 짚으며 유도하다니 말이야.”
“난 아키에스 빅티마가 대단한 비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다 아니까 김이 팍 새네.”
“흔하진 않지만 드문 것도 아니지. 이 바닥에서 진짜 희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포스 사용자 정도고.”
그건 나도 동의한다.
“그럼 나는 노년의 여자가 운영하는 학교를 찾아서 끔찍하게 박살 내면 되는 건가? 얼굴도 아니까 어렵지 않겠군.”
암살자는 내 협박에도 웃기만 했다.
“알아내지도 못할뿐더러, 알더라도 넌 못 해.”
“할 수 있어.”
암살자의 입가 주름이 더 깊어졌다.
“내 이름은 라그나타 아니마.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방랑 유목민, 노마드로 태어났지. 그리고 지금은 아니마 이동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노마드 중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받아들이는 학교야.”
나는 추가적인 정보를 알아냈다. 그러나 극도로 불쾌한 기분을 숨기기 힘들었다. 차라리 이 정보는 모르는 게 나았다.
“아끼는 학생들이 전부 죽는 꼴을 보고 싶나 보군.”
“방금 내 말을 들은 너는 얼굴을 찡그렸지. 같잖은 자존심을 접어둬라, 아이야. 넌 단순한 화풀이로 무고한 이를 죽일 인간은 못 돼. 죽어도 되는 인간이라는 증거와 이유가 필요하지.”
암살자, 라그나타가 내 신경을 벅벅 긁는다. 난 곧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망할 노친네가…….’
외통수에 빠진 느낌이다.
내가 화를 못 참고 라그나타를 죽인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난 라그나타가 운영하는 이동학교가 신경 쓰일 것이다. 여윳돈이 생기면 그쪽을 후원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라그나타는 내게 붙잡혀 미래가 불투명한 처지이고, 암살자로서의 기량도 내리막만 남았다. 학교에 금전적 지원을 더 하긴 힘들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내게 부채 의식을 심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라그나타를 죽이지도 않고 학교에 보복도 감행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 협박하는 물렁물렁한 병신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지.’
나도 안다. 이건 무의미한 자존심 싸움이다. 그러나 내가 지긴 졌다. 난 아니마 이동학교를 쓸어버릴 비위가 없다.
난 화제를 바꾸면서 공격할 말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네가 그때 날 죽이지 않은 이유도 알겠군. 이런저런 그럴싸한 말을 가져다 붙였어도, 결국은 가르치던 학생이라도 생각난 모양이지?”
“맞아. 우리 학교엔 너 같은 애들이 많지. 차마 내 손으로 죽이기 그랬어. 그러니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적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서 널 죽이지 않은 거야.”
순순히 인정하니 할 말이 없었다. 라그나타는 자신의 유약한 면조차 인정할 줄 알았다.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 듯하다. 적어도 나보단 어른이었다. 흠, 나이도 한참 더 많을 테니 어른이긴 하겠지.
내 머리도 차갑게 식었다. 나는 감정 소모를 그만두고, 단말기로 바깥 상황을 살폈다. 쟈파에겐 연락이 아직 없었다.
단말기를 보니 뉴스에선 습격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해설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데, 보더시티의 문화는 가볍다 못해 경박했다.
-놀랍습니다! 쟈파 상사!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폭발로 부서지고 타오른 건 외벽뿐이군요!
그야말로 철옹성 같은 사옥입니다! 이런 날을 대비라도 한 걸까요? 폭격이라도 퍼붓지 않는 이상에야 끄떡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저기 소속 불명의 습격자들이 보입니다. 에퀘시안과 크롤러를 비롯해 사우라와 프레도까지 있군요. 전투 종족 드림팀이 따로 없네요. 아, 물론 우리 인간도 다수로군요. 우리 인류도 전투에선 한 가닥 하는 편이죠.
상황은 중계대로였다. 무장한 다종족 용병이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쟈파 상사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사옥의 창문에서도 총구가 나오더니 침입자들을 쏴댔다.
‘도시 한복판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자빠졌군.’
다른 도시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같은 연방의 도시에서도 이 정도로 막 나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크바란의 하층 구역에서도 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면 군대가 나타나 사태를 진압한다.
“이제 실내 전투로 결판이 나겠군. 아무리 보더시티라도 피해가 확산되면 외부 세력이 개입할 테니까.”
라그나타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제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라그나타의 목덜미를 붙잡고 더플백에 쑤셔 넣었다. 라그나타의 뼈가 몇 개 더 부러진 것 같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라그나타는 내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옆에 있던 앙귀스 레지나는 의문에 찬 눈으로 날 보았다.
“난 사옥으로 가서 쟈파를 지원하겠다. 이 여자를 너와 둘 순 없으니 내가 데려가지. 여차하면 등 뒤로 날아오는 총알도 막아줄 인간 방패 역할도 할 거고.”
내가 더플백을 등에 메며 말했다. 머리만 빼꼼 내민 라그나타의 키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쟈파라면 어떻게든 버틸…….”
앙귀스 레지나가 날 말리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넋 놓고 구경하다 쟈파가 죽으면? 그러면 나도 곤란해. 아까 말했지? 쟈파에겐 마음의 빚이 있다고. 그리고 실내 근접 전투는 나 같은 부류에게 유리해.”
내 말에 대답한 건 앙귀스 레지나가 아니라 라그나타였다.
“그리고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한창 달아오른 청년이 나 하나만으로 만족하진 못할 테니까.”
……사실이지만 표현이 조금 그렇군.
* * *
난 안전가옥에서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암살 대상에게 동정을 받다니, 나라면 혀라도 깨물고 자살했어. 물론 혀 깨물고 자살하긴 힘들지만.”
나는 거리를 걸으며 라그나타에게 말했다. 라그나타는 머리만 내민 채로 더플백 안에 있었다. 보더시티답게 나와 라그나타에게 주목하는 이는 많이 없었다.
“지금 내가 수치를 느낄 만큼 여유 있는 처지로 보이나? 그보다 앙귀스 레지나는 내 생각보단 상식적이더군.”
“상식적인 척하는 거야. 그 여자도 자신만의 괴물을 품고 있어.”
“자신만의 괴물이 없는 사람이 더 괴물인 법이지. 내면의 괴물을 만들지 않아도 이 미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래도 말재간으로 라그나타를 이기긴 어려울 것 같았다. 선생질을 한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내뱉는 어휘나 비유가 책을 깨나 읽은 투였다.
나는 라그나타를 등에 짊어진 채로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향했다. 아침 해가 떴는데도 매캐한 연기로 하늘이 어둑했다.
사옥과 가까워질수록 구경꾼이 많았다. 개인이든 회사든 방송하는 사람들로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전투에 휘말려 총을 맞은 사람도 다수였고 시체도 적잖게 보였다.
“만약 프란세크 암살에 성공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전쟁이 일어났을 거다. 넌 끔찍한 인간이야, 라그나타.”
“우리 같은 노마드에게 전쟁은 기회다. 지금의 정세는 우리에게 불리할 정도로 안정적이야. 삼국이 미묘한 협력을 유지하고 있지. 꼬맹아, 권력자와 위정자에게 평화와 전쟁은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신념이 아니야, 상황에 따라 이용해야 할 도구일 뿐. 내 행동과 무관하게 전쟁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노바스 행성은 불타오를 거다.”
“말을 피해가는군. 난 전쟁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네 행동을 비난한 거다. 거창하게 이야기를 부풀려 핵심을 가라지 마라.”
라그나타가 잠깐 침묵하더니 웃음과 함께 말을 내밀었다.
“……너 역시 의외로 착하구나, 어린 광전사야. 사람을 죽이면서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군. 그건 무척이나 괴로운 길이거늘.”
“사람을 구하고자 한 적은 없…….”
난 반사적으로 대꾸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없진 않지. 오히려 꽤 많은 편이다. 내게 득이 되지 않는데도 사람을 구한 적은…… 제법 있군.
더플백이 떨린다. 라그나타가 더 크게 웃고 있다.
퍽!
난 팔꿈치로 더플백을 때리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저지선을 치는 경찰과 군대가 없기에 그 누구도 위험지대로 들어가는 나를 막지 않았다.
끼릭.
난 품에서 가면을 꺼내 썼다. 이목이 많이 쏠리고 있었다. 슬슬 나도 신상정보를 관리해야 한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상한 노인을 등에 달고 있군요. 노모와 함께 자살하려는 정신 나간 사내일까요?”
아무렇게나 잘도 지껄이는군. 난 마이크를 든 채로 떠들어대는 인간을 무시하며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들어갔다.
아까 뉴스에서 봤던 침입자들은 저층을 뚫고 진입한 뒤였다. 그들은 탑을 오르듯 쟈파가 있는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치이이.
사옥의 입구는 중화기 공격의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아직도 사나운 열기를 내뿜는 골조나 잔해가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제법 멀끔했다. 진동과 충격으로 외벽과 장식이 흐트러진 게 전부였다. 사옥을 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지간한 군용 시설 이상의 내구성이었다.
침입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상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승강기는 진작 멈춘 지 오래다.
“쟈파.”
나는 건물 회선으로 통신을 시도했다.
치직, 치직.
연결은 쉽지 않았다. 통신 방해가 건물 전체에 깔린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다. 드디어 해방의 때가 왔다.
심란한 마음조차 삼킬 괴팍한 괴물이 내 안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마음껏 죽여도 되는 자들을 드디어 찾았구나, 소년.”
라그나타가 해설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