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89)
배드 본 블러드-189화(189/197)
189
나는 전투의 여운에 취한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화광열도를 봉인하고 제한을 건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근접 전투에서 내 기량을 마음껏 토해냈다. 메노아 친위대장은 그 역량을 받아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근위대 생도 시절에는 공격성을 해소할 기회가 한 달에 서너 번은 있었지. 실전 임무도 자주 있었고.’
내가 아크바란에서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가 크라치아 아카데미 파견 시절이었다. 그때는 반쯤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해소가 끝나니 고요하군.’
눈을 감으며 내면을 확인했다. 외면으로 표출될 정도로 넘쳐흐르던 욕구가 출렁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차오르겠지만 당분간은 아니었다. 감정의 동요도 옅어졌고, 좀 더 또렷한 이성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나도 정상에서 너무나 멀어진 인간이다. 내 공격성이 생도 중에서 높은 편이긴 했으나, 그래도 다들 나와 비슷한 성향과 부류였다.
그러나 내가 보더시티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정상과는 거리가 멀긴 해도, 공격성을 주체 못 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괴물에서 사람이 됐구나.”
라그나타가 더플백 안에서 내게 말했다.
“그 혓바닥을 뽑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들고 있어.”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눈을 떴다. 난 쟈파와 친위대장을 응시했다.
‘묘하군.’
두 사람은 마치 아는 사이 같았다. 쟈파는 친위대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타지룬어로 뭐라 말했다.
친위대장은 부하가 전멸한 상황에서 나와 격렬하게 싸우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엄숙한 행동으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었다.
‘그러나 쟈파와 마주하고 나선 감정이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분노, 경멸, 증오…….’
친위대장은 쟈파를 극렬하게 미워하고 있었다. 타지룬어로 따지듯 외치고 있었고, 쟈파는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쟈파는 친위대장을 살릴 건가?’
나도 이제 타지룬 종족의 감정 신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쟈파는 친위대장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는 에퀘시안 용병에게 손을 뻗더니 이송하라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때 이변이 일었다.
우드드득!
친위대장은 쟈파의 동정을 받지 않았다. 그는 남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후려쳤다. 손날에 닿은 목이 어긋나듯 휘었고,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졌다.
-지금 당장 응급치료를 하면 살릴 수 있다, 쟈파.
에퀘시안 용병 중 하나가 번역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엔이 보이지 않았다.
“아뇨, 죽게 놔두세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요.”
쟈파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 옅게 뜨며 수심에 잠겼다.
“이번 사태는 대강 마무리된 건가?”
내가 쟈파에게 말을 걸었다. 쟈파는 나와 라그나타를 번갈아 보았다.
“루카 씨, 일행이 늘었군요. 그리고 전 지원이 아니라 앙귀스 레지나 호위를 부탁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 말이 없었다. 여기에 온 건 순전히 내 개인적 욕구 충족을 위해서였다.
‘쟈파에게 내 도움은 필요가 없었어.’
쟈파는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뒀었다. 건물의 한 층을 터트리는 과감한 수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앙귀스 레지나는 안전가옥에 있어. 내가 데려올까?”
“그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의 신상이 궁금하군요. 정상적인 몰골은 아니군요.”
“앙귀스 레지나를 기습한 암살자야. 그리고…… 내 과거의 지인이고.”
나는 적당히 가져다 붙였다. 라그나타가 낮은 웃음이 들렸다.
“그럼 일단 적이었단 소리니 감금실로 보내고,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죠?”
지금 쟈파는 몹시도 머리가 아플 것이다. 수습해야 할 상황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쟈파를 배려할 여유가 생겼고.’
난 고개를 끄덕이며 라그나타가 담긴 더플백을 에퀘시안에게 넘기려 했다. 라그나타는 사옥 지하에 있는 감금실로 갈 것이다.
“이 노인은 중상을 입었으니 진통제와 항생제 정도는 놔줘. 팔은 절대 풀지 말고. 쇠약해지고 다리도 잘렸지만…… 옛날엔 끗발 좀 날리던 암살자야. 방심하면 목이 돌아갈 거다. 네 동료도 여럿 당했어.”
동료 이야기에 에퀘시안이 움찔했지만, 곧 사적 감정을 지운 듯이 라그나타가 담긴 더플백을 들고 내려갔다.
쟈파는 단말기의 홀로그램을 작동하더니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언론사나 보더시티 관료와도 떠들어댔다. 쟈파는 소요가 진정됐다고 보더시티의 핵심인사에게 알리고 있었다.
“자세한 건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보내겠습니다. 아, 예, 호요오옷, 보고서도 모레 중으로…….”
한 조직의 수장이란 몹시 피곤한 자리다. 나는 죽어도 못 할 것 같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대야 한다. 나라면 스트레스로 수명이 반 토막 날 것이다.
쟈파는 급한 일 처리가 끝났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엔은 죽은 건가?”
“죽을 뻔했죠. 지금 치료를 받고 있을 겁니다.”
“잘난 척하더니 당했나 보군.”
“가장 위험한 역할을 도맡았으니까요. 폭발물 활성화까지 시간을 벌어준 게 엔입니다. 엔은 절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죠. 임무에도 실패한 적이 없고요.”
신뢰가 뚝뚝 묻어 나온다. 말이 고용주와 용병이지, 오랫동안 동고동락했으니 당연한 거긴 하다.
난 엔이 어떻게 싸웠는지 보고 싶었다. 계속 놈의 실력이 궁금하긴 했다.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메노아 친위대 상대로 시간을 벌었다는 걸 보니 입만 산 건 아닐 것이다.
“이제 메노아 가문과 재협상에 나설 건가? 다시 추방자 신분으로 돌아간 거잖아. 이쪽은 습격을 한번 막아냈고, 저쪽도 피해가 클 테니 화평의 여지가 있군.”
내가 운을 뗐다. 쟈파가 뭔가 생각하듯 날 보았다.
“제 정보에 대해선 앙귀스 레지나에게 들은 겁니까?”
“절반 정도는. 나머지 절반은 다른 곳에서.”
“아까 그 여자가 메노아 친위대를 언급했군요. 당신의 말대로 전 메노아 가문의 일원이고, 현재는 추방자 신분입니다. 흥미로우신가요?”
“흥미는 둘째 치고, 너에 대해 알아야 키누안을 찾기 쉬우니까. 내 추측하건대, 네가 정보를 숨기는 건 이번 일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군.”
현재 쟈파는 곤란한 처지에 있고 할 일이 많다. 그리고 메노아 가문과의 협상은 필수 불가결이다.
‘하지만 수석 경호원 엔이 중상을 입었다.’
쟈파에겐 전력의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에는 내가 들어가면 딱 맞다. 쟈파의 사적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루카 씨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실 겁니다. 당신도 이 말을 유도하신 것 같으니까요, 호욧.”
말이 잘 통해서 좋군. 내가 웃었다.
“당분간 내가 엔의 역할을 대신하지. 이건 무상이야. 따로 보수는 받지 않겠어.”
“……그야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받으면 안 되죠. 참고로 타지룬에게 ‘양심’이란 단어를 듣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 * *
쟈파 상사 습격 사건 이후로 사흘이 더 지났다. 서서히 쟈파 상사는 정상화되고 있었다. 앙귀스 레지나의 투어도 안정화가 되면 다시 할 예정인 듯했다.
저벅, 저벅.
난 병원의 복도를 걸으며 엔의 병실로 향했다. 형식상이지만 엔에게 업무를 인계받으러 갔다. 뭐, 이건 핑계이고 놈이 어떤 꼬락서니인지 직접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흠, 걸레짝이네. 그래도 살아있는 걸 보니 에퀘시안이 인간보다 튼튼하긴 한가 봐?”
내가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엔의 차트를 보며 말했다. 뼈가 부러지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뼈를 고정하는 철심이 빼곡히 몸에 박혀있었다.
-선임의 병문안 온 주제에 빈손인 거냐?
침대에 누운 엔이 머리만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다 구겨진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서 침대로 던졌다.
“영양분이 풍부해. 환자식으로 제격이지. 이제 됐지?”
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 헬멧을 쓰지 않은 에퀘시안의 얼굴이 낯설다.
에퀘시안은 지구 생물로 따지면 ‘말’과 흡사한 생물에서 진화한 종족이라고 한다. 우리가 유인원이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털이 거의 사라졌듯, 말의 흔적은 에퀘시안에게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진화의 결과였다. 오히려 푸른 피부 탓에 파충류 계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종족의 생김새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에퀘시안이 끈질기고 강인한 전투 종족이라는 사실이 내겐 중요하지.
-병원식도 지긋지긋하지만, 이것보단 맛있겠다. 그보다 다음에 쟈파 버거나 피자라도 사와. 여긴 배달도 못 시키게 하더라고.
에너지바를 힐끗 본 엔이 투덜거렸다.
“다음에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은 해두지. 당분간은 내가 쟈파의 전담 경호원이다. 따로 알아둬야 할 게 있나?”
-인간의 생체 주기로 타지룬을 경호하긴 까다로울 거다.
“수면통제도 가능하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쟈파는 가끔 식사하지만, 한 번에 많이 먹는 대식가야. 아, 탄산음료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아. 식사하고선 반나절 이상 잠을 자는 게 보통이고.
경호 대상에 대해 상세히 알수록 좋다. 하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들으니 왠지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또?”
-쟈파가 잠을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깰 때가 있을 거다. 그냥 놔둬. 악몽을 자주 꾸니까. 마지막으로 쟈파의 사생활에 관한 건데, 고용주의 사생활은…….
엔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갑작스레 피를 토했다. 모니터 화면에서 생체 신호가 요동쳤다.
덜컹!
문이 열리며 의료진이 달려왔다. 의료진은 날 보며 이 환자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 뭐니 하며 떠들어댔다. 원래는 말을 해서도 안 되는 상태였다. 지금도 성대와 폐가 철심에 찔렸다고 한다.
“우리 둘 다 죽지 않으면 다음에 보자고, 에퀘시안.”
내가 그리 말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 * *
나는 라피스 라줄리, 보얀, 가브리엘이 모두 무사한 걸 확인했다.
당연히 앙귀스 레지나도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투어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더시티를 들썩거리게 했던 쟈파 상사의 습격도 서서히 잊힌 듯했다.
덜컹, 덜컹. 쿵!
쟈파 상사의 사옥은 공사로 한창이었다. 사옥 주변으로 중장비가 가득했고, 건설 드론이 날아다니면서 불타고 떨어진 외벽을 새로 붙이고 있었다.
내부 공사도 진행 중인지라 사람들이 자재와 가구를 들고선 바삐 오가고 있었다.
저벅, 저벅.
난 새로 받은 코트에 주머니를 집어넣은 채로 사옥의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엔 감금실이 주르륵 있었고, 철창 너머에는 이상한 외계인과 종종 인간도 보였다. 여긴 쟈파 상사에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있는 ‘사설 감옥’이었다. 범죄만이 아니라 그저 밉보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여버릴 거야! 쟈파! 쟈파! 쟈파아아!”
“쟈파 버거의 패티에는! 패티에는! 그게 들었어! 그게 들었다고! 으아아아아아!”
“무전취식 좀 했다고 1년이나 사람을 가둬?! 풀어줘! 뭔가 잘못됐잖아!”
내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철창을 잡고선 고함치며 떠들어댔다. 정신 나가 보이는 이들도 다수였다.
더러 내게 침을 뱉는 이도 있었다. 난 발을 들어 철창에 붙은 손을 퍽퍽 차며 지나갔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니까 좀 조용해졌다.
끼익, 쿵.
난 한층 더 내려가며 철문을 닫았다.
여기서부턴 방음처리가 된 VIP 감금실이었고, 가장 안쪽 호실에 라그나타가 있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다리 절단면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부러진 팔에도 깁스를 하고 있었다. 약품 냄새도 저릿하게 풍기고 있었다.
“스스로 재생은 못 하나 보지? 다리가 뿅 하고 자랐으면 꽤 재밌었을 텐데.”
내가 철창 너머 의자에 앉으며 라그나타에게 말했다.
“그게 가능하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겠지. 그나저나 심심하니까 다음엔 책이라도 몇 권 가져다주면 좋겠군.”
“내가 네게 그런 호의를 베풀 이유는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대등하게 거래해야지. 널 살려두는 것만 해도 넌 내게 빚진 상태야.”
라그나타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녀가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봐라, 소년.”
난 양손의 엄지를 맞닿게 깍지를 끼고선 입술을 달싹였다.
“넌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의 약점이 뭐라고 생각하지?”
그녀의 경험에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