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91)
배드 본 블러드-191화(191/197)
191
상업 종족 타지룬은 복잡한 정치 지도를 가진 종족이다. 그들이 여러 국가, 종족과 맺은 협약과 외교 관계는 몇 마디로 쉽게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조차도 금방 ‘메노아 가문’의 특이성을 알 수 있었다. 메노아 가문은 타지룬 중에서도 독특한 입지를 가진 집단이었다.
경제활동을 업으로 삼는 타지룬 가문들은 다른 국가와 집단하고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 때문에 벨라토 연방에서는 타지룬 종족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자치구까지 따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그러나 메노아 가문은 타지룬 자치구에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벨라토 연방은 표면적으로 메노아 가문을 배척하고 꺼리듯 공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인신매매.’
메노아 가문의 주력 상품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인신매매는 현실에선 수없이 이뤄지고 주요한 산업이다. 노예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집단과 종족도 노바스 행성에는 많았다.
그러나 벨라토 연방이 기치로 삼는 가치 중에선 평등과 자유가 있다. 평등과 자유를 외치면서 메노아 가문을 공적으로 인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우우웅.
공중차량의 엔진음이 간헐적으로 바닥을 타고 들렸다.
쟈파와 나는 6인용 공중차량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쟈파 전용차량인지라 내장은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차량의 창문과 금속판 두께를 보아하니 방호력도 대단할 것 같았다.
“……메노아 가문은 거주용 모선을 운영하며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적이 많기도 하니까요.”
쟈파가 메노아 가문에 대해 계속 설명했다. 나는 귀를 열고 뇌리에 글자를 새기듯 들었다.
“그래서 다른 가문보다 사병집단에 집착하는 건가?”
“그렇죠. 메노아 친위대는 대대로 두 명의 친위대장이 있습니다. 부대도 둘이 있고요. 이번에 한쪽 부대가 전멸했으니, 다음 친위대 양성이 끝나기 전까진 조심스럽게 활동할 겁니다.”
이렇게 들으니 메노아 가문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은 건지 와닿았다. 전력의 절반이나 날려 먹은 것이다.
‘쟈파 상사의 피해도 적진 않지. 자칫했으면 쟈파가 꾸려온 모든 게 수포가 될 뻔했다.’
메노아 가문은 쟈파 상사의 큰 재산인 앙귀스 레지나도 죽이려 했다. 그거라도 성공했다면 쟈파 상사는 크게 휘청였을 터다.
“널 이토록 죽이려 하는데, 메노아 가문 내에서 네 안전은 확보할 수 있는 건가?”
쟈파는 나와 에퀘시안 열 명만 데리고 메노아 가문으로 가고 있었다. 메노아 가문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쟈파는 죽는다.
“저는 거래를 하러 온 겁니다. 그쪽에서도 제 방문을 허가했고요. 상인에겐 신뢰가 중요하죠. 절 죽인다면 메노아 가문도 같이 무너질 겁니다. 손님을 끌어들여서 죽이는 자들과 거래할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타지룬 내부에서는 더더욱요.”
“철천지원수 국가끼리라도 사신과 대사를 죽이지 않는 것과 같은 거군.”
“이건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인 최소 신뢰입니다. 제 말로 말하기 뭣하지만, 호욧…… 대다수의 타지룬은 음험하고 교활합니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자들이 많죠. 최소 신뢰와 규칙마저 없다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겁니다. 인간의 보편적 도덕 기준으로 보면 ‘사악한 자’들이 우글거리니까요.”
“흥미롭군, 사악한 평화주의자라니.”
난 팔걸이에 댄 팔로 턱을 괴며 머리를 기울였다.
“정확히 말해서 비폭력주의자에 가깝죠. 폭력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선하거나 착한 건 아니니까요. 제가 그렇듯이요.”
간혹 쟈파는 핵심을 꿰뚫는 말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쟈파와의 대화는 제법 즐겁다. 그의 냉철한 현실관과 자기비판, 자기인식이 날 즐겁게 했다.
“폭력이 나쁘다고 떠들어대는 악인들은 대체로 폭력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악을 행하지. 가방끈이 짧고 가난한 자들이 알기 힘든 복잡한 제도와 법을 이용해서 말이야. 기술의 발전으로 폭력의 사유화와 독점이 힘드니…… 제도와 법을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거지.”
“제국의 군인치고는 과감한 발언이군요, 호요요옷.”
쟈파가 웃어댔다.
“전 군인이니까.”
난 굉장히 불온한 반동분자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근위대와 제국군이 그리웠다. 제국 군인은 내 적성에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충실한 군인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공을 세우고 승리해 진급하고, 더 좋은 장비도 받고, 또 제국의 적과 싸운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지루할 틈 없이 충만한 생활이다.
‘어느 기점으로 크게 꼬였지만…….’
무탈하게 제국의 군인으로 성장한 나를 떠올려 봤다. 어디까지 가정이지만…… 난 꽤 고위직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사상의 변질이 없었다면, 아주 대단한 제국의 칼이 되었겠지. 생도 시절의 불안정함조차 녹이고 담금질해 버린, 예리하고도 튼튼하며 망설임도 없는 칼날.
지금의 나는 무디고 녹슬고 삐걱거린다. 나조차도 내가 어떤 형태의 칼인지 잘 모르겠다. 자기인식이 명확하지 않다. 강하게 마음을 먹다가도 금세 흔들리고 판단을 바꿔댔다.
“도착하면 잠잘 시간이 없을 테니 지금 푹 자두시죠.”
그 말을 끝으로 쟈파는 내게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 * *
공중차량이 메노아 가문이 머무는 지역에 도착했다.
아래를 보니 낮은 숲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점이 찍힌 듯이 드문드문 물웅덩이와 못이 보였다. 습지대이지만 기후가 서늘해서 불쾌하게 우거진 열대우림 같은 느낌은 없었다.
“여긴 코라와 벨라토의 국경이 맞닿은 곳입니다. 흠, 위치 자체는 벨라토령이긴 하네요.”
쟈파가 홀로그램 지도를 보며 말했다.
쟈파 상사 소속의 공중차량은 세 대였다. 한 대는 나와 쟈파, 나머지 두 대는 에퀘시안들이 타고 있었다.
습지대의 중심에는 봉긋하게 마른 언덕이 있었다. 거기엔 거주지로도 부족함이 없는 원형 우주선이 정박해 있었다.
우주선은 수백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였고, 말 그대로 이동식 대저택이었다. 모선 말고도 별채와도 같은 거주선 세 대가 주변에 있었다.
난 쟈파의 표정을 살폈다. 쟈파는 창밖의 모선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심정이 무척이나 복잡하겠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공중차량이 네 대 있었다. 색깔과 외형을 보아하니 각자 다른 소속과 집단의 공중차량이었다.
“다른 가문원과 벨라토 연방의 관료입니다. 공증인으로 온 거죠.”
쟈파가 설명했다. 저들은 수수료를 받고 쟈파의 메노아 가문 방문을 공증했다. 쟈파가 메노아 가문의 거주지에서 살해당한다면 저들이 공론화할 것이다.
쟈파는 공증인들에게 다가가 서류 절차를 치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눈앞에 있는 메노아 모선을 응시했다. 규모가 워낙 크니 좌우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노바스 행성은 많은 종족이 살고 있으나 막상 토착 종족은 그리 많이 없다. 노바스 행성의 주류 종족인 인류부터가 이주민이었다.
그러나 난 노바스 행성 태생이다. 자신을 이주민이나 이방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고향은 어디까지나 노바스 행성과 제국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거대 함선과 이주선을 타고 왔겠지.’
아직 난 성간비행을 경험한 적이 없다. 별을 오가는 기분이 어떨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고 궁금했던 적도 없다.
“절차가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가시죠. 아, 통역기는 잘 챙기시고요. 모든 타지룬이 저처럼 인간 언어에 능한 건 아닙니다, 호요오오.”
쟈파가 앞장서며 말했다. 나는 내 가슴팍과 허리의 무장을 확인하고선 한 발자국 뒤에서 쟈파를 따라갔다.
기이이이잉!
메노아 모선의 벽면 일부가 열리면서 아래로 내려왔다. 벽면 안쪽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차분히 올라가기 좋았다.
철컥, 철컥.
계단 끝에는 메노아 친위대원 두 명이 있었다. 위병 업무를 맡은 그들은 절도 있게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쟈파, 그리고 에퀘시안 열 명이 메노아 모선으로 들어갔다.
기이이익! 덜컹!
우리가 전부 들어가자 문이 천천히 닫혔다.
모선 내부는 차량도 드나들 정도의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실제로도 거주선이니 이 정도 통로 폭은 확보해야 물류 이동이 편할 터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자연 친화적인 장식이 많았다. 벽면을 따라 이름도 모를 넝쿨 식물이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
기잉.
진입로의 끝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타지룬 한 명이 우릴 마중 나와 있었다.
‘……옷차림도 다들 펑퍼짐하고, 생긴 것도 비슷비슷해서 구분이 힘들단 말이지.’
외계종족이 다 그렇듯 타종족 입장에선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개체 구별을 위한 인식 초점이 종족마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인간 입장에서 타지룬은 개체 구별의 난도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오랜만이야, 쟈파.
내 통역기엔 쟈파로 이름이 들렸으나 귀를 기울여 보니 쟈스피에케데라라는 특이한 이름이었다. 흠, 타지룬 혹은 메노아 가문에선 저게 흔한 이름일 지도 모르겠다.
-잘 지냈습니까? 리산다.
쟈파가 미리 등록해 둔 명칭 통역기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 리산다도 설명하기 귀찮을 정도로 길고 특이한 이름이었다.
쟈파에겐 형제자매가 일곱 명이었다. 본인까지 포함하면 8남매였다. 이들이 본가의 직계였고, 현재 메노아 가문의 중심이었다.
나는 무뚝뚝하게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했다.
-너도 참 과감하네. 추방자 신분인데 손님을 자처해 돌아올 줄은 몰랐어.
-벨라토 쪽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맹수를 잡으려면 맹수 굴로 들어가라.
뭔가 바뀐 것 같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쟈파는 은근슬쩍 포부를 드러냈다.
-보더시티 생활은 즐거웠나 보네.
-성과도 있었죠. 나름 그쪽에선 권력자랍니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는 말을 혹시 아십니까?
리산다와 쟈파 사이에서 오가는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숨기는 것도 아니라 대놓고 서로를 찔러댔다.
-훌륭하네, 쟈파. 난 네가 추방할 때만 해도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 생각했어. 넌 늘 둔하고 부족했으니까. 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가 멍청했던 건 사실이었잖아.
-저도 과거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쫓겨난 게 전화위복이었죠. 막다른 길에 몰려서야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깨닫는 자도 있으니까요.
전화위복이라는 단어를 쟈파가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뭐, 전, 전화?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너 따위가?
리산다는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며 감정을 드러냈다.
‘가지고 놀고 있군.’
리산다가 마중을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쟈파의 형제 중에서 최약체일 것이다. 힘 있는 형제의 앞잡이나 하면서 부산물이나 챙겨 먹는 부류의 사람이겠지.
-네가 추방당한 건……!
-불명예스러운 일을 입 밖으로 꺼내서 좋을 게 있겠습니까? 여긴 다른 종족도 있습니다.
쟈파가 리산다의 말을 재빨리 막아섰다.
나도 쟈파가 추방당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왔으면 말해줄 만도 한데, 쟈파는 끝끝내 숨기고 있었다.
-참 뻔뻔하네. 네가 불타 죽는 꼴을 꼭 보고 싶었는데.
-불타 죽은 건 애꿎은 병사들이죠. 제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지금도 가문에서 공격에 찬성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습니다. 아주 멍청했죠. 가문의 위신도 떨어졌고요.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리산다는 혀를 날름거리며 쟈파를 흘겨봤다 -너, 손님이라고 안전할 거라 생각하나 봐? 전담 경호원은 전투복도 입히지 않았네.
-메노아 가문이 손님을 초대해 죽이는 가문이었습니까? 그리고…… 제 곁에 있는 분은 당신들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저라는 목줄이 풀리는 순간,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인간이죠. 저만 위험한 것 같나요? 메노아 가문은 사람 모습을 한 폭탄을 자기 집안으로 들여놓은 겁니다.
리산다의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 세로 꼴 동공이 가늘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쟈파의 말을 거들었다.
“……재깍, 재깍.”
내가 검지를 좌우로 움직이며 시계 초침 흉내를 냈다. 나는 시한폭탄이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