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92)
배드 본 블러드-192화(192/197)
192
우린 리산다의 안내를 받아 메노아 가문의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은 전담 경호원 하나만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쟈파가 데려온 에퀘시안 용병들은 바깥에서 대기했다.
‘여기서 내 역할은 관찰이다.’
난 쟈파의 뒤에 서서 회의실로 들어섰다.
스륵.
타지룬들의 주목은 고요했다. 나와 쟈파가 들어서자 눈동자만 움직였고, 침묵은 우릴 압박했다.
‘원탁과 열 개의 의자.’
나는 쟈파에게 메노아 가문의 의사결정 방식에 대해 미리 들었다.
메노아는 가문에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상위 타지룬 열 명을 원탁에 내세워 의사결정 표결권을 준다. 그리고 가주는 혼자서 표결권 세 개를 가진다.
원탁에선 표결권 열두 개가 움직인다. 이때, 동표가 나와 여기서 결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동표가 나오면 원탁과 떨어진 자리에 있는 의자 두 개에도 표결권이 생긴다.’
나는 동공을 움직였다. 저긴 친위대장 두 명의 자리였다. 지금은 한 자리가 공석이었고, 다른 자리에는 에퀘시안 출신 친위대장이 앉아있었다. 당연히 공석은 내게 죽은 친위대장의 자리였다.
놀라운 일이다. 외부인이자 노예 출신인 친위대장 두 명이 메노아 가문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물론, 저기까지 넘어가는 일은 몹시 드물 것이다.
‘친위대장 선에서도 동표가 나오면, 가주에게 오롯한 결정권이 생긴다.’
일개 가문치고는 상당히 진보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메노아 가문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특히 외부인 출신이 가문의 의사결정에 제한적으로라도 참가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크바란도 하층 구역의 인재를 계속 상류 사회로 편입했지.’
내 생각은 길었으나 회의실에 들어온 지는 3초도 되지 않았다.
회의실엔 쟈파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우린 취조라도 당하듯 서 있어야 했다. 쟈파가 먼저 입을 열어서 침묵을 깼다.
-손님을 세워두는 게 메노아 가문의 관습이었군요. 제가 없는 동안 많은 게 바뀐 모양입니다.
-널 손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
원탁의 상석에 앉은 타지룬이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가주라는 걸 증명하듯 보주가 달린 홀을 들고 있었다.
‘오즈머, 메노아 가문의 직계 중 장남.’
원래 이름은 훨씬 길다. 쟈파는 현 메노아 가주의 이름을 ‘오즈머’라고 줄여서 내게 설명했었다.
오즈머는 다른 타지룬보다 피부의 색이 더 짙었다. 그래서 칙칙한 갈색, 혹은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더 음험하고 위험해 보였다.
-섭섭하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장례식에라도 불러주시지 그랬습니까.
-추방자를? 불명예를 짊어지고도 그런 말이 잘도 입에서 나오는구나.
노골적인 적대였다. 쟈파도 이런 대우를 각오하고 왔을 것이다.
-뭐, 좋습니다. 화목한 대화와 따스한 식사를 바라고 온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와 불가침조약이나 화평을 맺으실 겁니까? 아니면 추방령을 거둬주시기라도 하면 좋겠군요.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까요.
-화평? 우습구나, 우스워.
타지룬들이 일제히 웃어댔다. 음침한 웃음이 회의실을 갉아먹듯 사각사각 퍼졌다.
-그럼 전쟁을 하자는 거로군요. 전 준비가 됐습니다.
쟈파는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는 밑바닥부터 바득바득 기어 올라온 자다. 이런 모욕과 경멸에 흔들리지 않는다.
뚝.
웃음이 멎었다. 타지룬들의 사소한 동작도 멈췄다. 세로 꼴 동공들만 움직이며 쟈파를 향했다.
-전쟁?
-먼저 습격했으면서 전쟁이라는 단어에 놀라시는 겁니까? 그거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군요.
쟈파가 혼자서 웃었다.
-기고만장하구나. 그깟 사업체 하나를 꾸렸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군.
-뭐가 되긴 했죠. 그러니 전쟁을 하자는 겁니다. 타지룬답지 않지만요. 아마 당신들은 절대 전쟁을 결정하지 못할 겁니다. 일방적인 습격과 암습은 감행해도 전면전은 하기 싫어하죠.
타지룬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쟈파가 저자세로 나올 거라 예상한 모양이다.
‘쟈파 상사가 보더시티에서 유명하다 해도 일개 도시의 권력자일 뿐이다.’
메노아 가문의 힘과 영향력이 더 클 것이다. 모선의 규모만 봐도 그들의 사업이 얼마나 큰지 알 만했다.
‘메노아가 전력을 다해 짓누르면 쟈파는 버티기 힘들 거다.’
그러나 그건 메노아 입장에서도 손해였다. 쟈파를 확실히 죽일 수 있어도, 서로 손해만 보는 결말이었다.
‘그렇기에 전대 메노아 가주는 쟈파와 화평을 맺었겠지. 처리할 순 있어도 껄끄러운 존재니까.’
쟈파는 분위기를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바짝 엎드려서 수익의 일부를 바칠 줄 알았나 보군요. 그건 아버지를 향한 예의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저는 그마저도 내지 않을 생각이고요.
-기어코 해보자는 거냐?
-선택권을 드리는 겁니다. 저와 무관한 관계가 되거나…… 아니면 전쟁을 하자는 거죠. 참고로 저는 전쟁과 폭력에 익숙합니다. 보더시티에서 사업하려면 본성에서 벗어나는 일도 해야 하죠.
-본성?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네가 쫓겨난 이유를…….
오즈머가 말하다가 말았다. 어지간히도 입에 담기 싫은 일인 모양이다.
쟈파의 완고한 태도에 회의실 분위기가 불안하게 붕 떴다. 쟈파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네가 쓰던 방을 줄 테니…… 며칠 체류해라. 방침이 결정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오즈머는 조롱과 경멸을 거두며 평이하게 말했다. 다른 타지룬들도 쟈파를 자극하지 않았다.
* * *
나와 쟈파는 복도를 걸었다. 쟈파도 메노아 모선의 내부 지리를 잘 알기에 별도의 안내는 없었다.
“저들은 전쟁을 택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못하는 거죠. 이익과 위험을 천칭에 올려 두었을 때, 이익으로 균형이 크게 기울지 않으면 선택하지 못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요. 강박관념이나 마찬가지죠, 호욧, 호욧.”
쟈파가 신나서 떠들어댔다. 회의실에서 한 방 제대로 먹인 게 굉장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손해’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잃어버린 거로군.”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완벽히 계산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손해를 선택하지 않는 게 언제나 옳은 판단이죠.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는 없습니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극한까지 단련한 사람조차 자신의 협소한 인지 정보로만 결과를 예측할 수 있죠.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고요.”
“하지만 손해를 선택하지 않기에 메노아 가문이 지금까지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겠지. 모든 건 장단이 있는 법이야.”
“우주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죠. 아무리 강인한 생물이라도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환경은 변화하는 법이니 기존의 방식도 바뀌어야죠.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법입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렵다. 혁신과 변화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화를 두려워하면 서서히 도태되며 사라질 뿐이다.
끼익.
우린 쟈파의 옛 거처로 들어갔다. 에퀘시안 다섯 명은 실내로 따라오고, 나머지 다섯은 복도에서 대기했다.
우린 처소에 감시장치가 없는 걸 확인했다.
“……루카 씨, 가능하시겠습니까?”
쟈파가 에퀘시안이 가져온 가방을 열며 말했다. 나는 옷을 하나씩 벗고 있었다.
“해본 적은 없지만…… 어차피 나 말곤 할 사람이 없잖아.”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된 사안이다.
“시제품이니 사용감은 무척 답답할 겁니다, 호욧. 원래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요.”
쟈파가 가방에 담긴 전신 전투복을 꺼냈다. 표면이 각도에 따라 반짝거렸다.
‘위장변색 전투복.’
그것도 최신 기술이 도입된 신제품이었다. 적외선은 물론이고 각종 센서를 무시할 수 있다고 한다.
철컥, 퉁.
난 화광예도와 자동추적 권총마저 내려놓았다. 바지까지 벗으니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쟈파는 내 나신이 살짝 불편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스륵, 끼릭.
나는 기밀성이 좋은 전투복을 힘겹게 입었다. 좋게 말해서 기밀성이 좋다는 거지, 착용감이 거지 같았다.
스으으으.
헬멧까지 장착하니 숨쉬기도 힘겨웠다. 체취도 필터로 흡수해야 하고, 여러 복잡한 감지 장치를 피하기 위해 공기의 흐름 어쩌고 하면서 흡입과 배출이 느렸기 때문이다.
눈구멍은 가느다란 일자라서 시야도 극도로 좁아졌다. 벌써 스트레스가 그득그득 머릿속에 쌓이는 느낌이다.
치직.
팔목을 매만져 위장변색 기능을 작동했다. 내 생체 피부가 오싹할 정도로 전류가 흘렀다.
전투복 표면은 전기자극이 흘러내리면서 투명해졌다. 현대 위장 기술의 정점이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이해도 못 할 각종 신기술이 도입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 종족의 감각을 피해야 하니까 말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카 씨. 생각해 보니 까다로운 임무를 맡긴 것 같으니, 일이 잘 끝나면 사례를 넉넉히 하겠습니다.”
쟈파의 에퀘시안들이 오가며 처소의 문이 열렸다. 나도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다.
‘멋지군.’
나는 위장변색 전투복을 처음 입어봤다. 옆을 지나가는 타지룬조차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밖으로 새어 나갈 만한 모든 생체 정보를 차단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움직이면 안 된다. 인기척이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보다 의외로군. 쟈파의 내통자가 그…… 타지룬일 줄이야.’
난 위장변색 전투복을 입을 때가 돼서야 내통자에 대해 들었다. 기밀 정보란 노출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늦게 알려줬다고 쟈파가 날 믿지 않는 건 아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쟈파는 내통자를 통해 습격 정보를 사전에 들었다. 당연히 내통자는 ‘원탁회의’에 참가할 수준의 권력자는 아니었다. 회의 참석이 가능한 사람이었으면, 습격 정보를 더 빨리 보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 타지룬에겐 내통할 이유가 있긴 해.’
모호한 지위에 있는 타지룬이 내통자다.
난 외워둔 지도를 따라 걷다가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난 벽에 등을 기대곤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치이익.
자동문이 열렸다. 내부에 있던 타지룬이 잠시 나오더니 어딘가를 방문했다가 돌아왔다.
치익.
문이 닫히기 전에 나도 따라 들어갔다. 타지룬은 내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똑.
내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타지룬이 화들짝 놀라듯 움찔했다.
“쟈파가 보냈다, 리산다.”
내 말이 통역기를 통해 흘러나갔다.
내통자의 정체는 리산다였다. 우릴 회의실로 안내했던 타지룬 여자이고, 쟈파의 형제자매 중 하나였다.
‘직계인데도 실적에서 밀려 원탁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지.’
몇 시간 전만 해도, 쟈파와 리산다는 사나운 독설을 주고받았었다. 그 때문에 나도 둘이 내통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시한폭탄 씨군요.”
리산다가 입을 열었다. 통역기 없이 이쪽 언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내 예상보다 말투는 공손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봐. 누가 전 가주를 죽인 거지?”
리신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에퀘시안 용병도 아닌데 굉장히 신뢰를 받고 있나 보군요. 쟈파의 애인이라도 되는 건가요?”
……난 다소 당황했다.
“난 외계종족과 연애하는 취미는 없어. 그리고 쟈파는 남자잖아. 외계종족과 동성애? 끔찍한 성벽이로군.”
리산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그녀는 ‘남자’라는 말에 특히 의문을 표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직관이 쓰잘머리 없이 작동했다.
……난 크게 당황했다.
그간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앙귀스 레지나의 일도 떠올랐다. 난 그녀에게 쟈파의 애인이냐고 비꼰 적이 있었다. 그때 앙귀스 레지나는 터무니없다는 듯이 웃어댔었다. 그 이유가 있었다.
‘쟈파, 여자였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