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94)
배드 본 블러드-194화(194/197)
194
만찬회는 피를 쏟아내지 않고 끝났다. 오즈머는 쟈파의 단호한 태도를 보더니 유혈 사태를 피하듯 물러났다. 시뻘건 폭력은 없었고, 끈적한 갈등만 시커멓게 남긴 채로 식사는 끝났다.
만찬회를 끝낸 나와 쟈파는 처소로 돌아갔다.
“네가 말을 꺼낼 때 놈들의 반응을 보니 확실해. 저번 회의에서 네 복귀가 사안으로 올라온 거다. 추론이 제법이로군, 쟈파.”
내가 확신을 덧붙이며 말했다.
“사실, 몇 달 전에 아버지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습니다. 루카 씨가 깨어나기도 전의 일이죠.”
쟈파는 노곤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식사 직후라서 졸음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흐음, 자기 손으로 추방한 자식에게 연락을? 뒤늦게 피붙이의 정이라도 붙은 건가? 타지룬의 피도 간혹 뜨거운가 보군.”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쟈파도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는 손사래 치더니 물을 한 잔 마셨다.
“호욧, 농담이 재밌습니다, 루카 씨. 식사하고 나서 웃으니 배가 아프군요. 어쨌든 설명하자면, 메노아 가문의 주력 사업은 인신매매입니다.
타지룬 종족 내에서야 이걸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죠. 하지만 벨라토 연방에선 인신매매를 사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메노아 가문의 주력 사업체는 대다수가 불법입니다. 벨라토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릴 범죄조직으로 규정해 연방령에서 추방하거나 토벌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죠. 정권과 권력자의 성향, 여론에 따라 메노아 가문의 처우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다지 가문의 존속 면에서 좋은 상황은 아니죠.”
“그래서?”
“연방도 인정하는 합법적 사업을 내세워야 하죠. 그래야 메노아 가문에도 미래가 있습니다. 때마침, 제가 괜찮은 규모의 합법 사업체를 굴리고 있죠. 아버지는 제가 ‘막대한 이득’을 가문에 가져다줄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래서 물밑에서 추방령 철회 건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제안을 승낙했나?”
“아뇨. 거절했습니다. 종족과 가문에 얽매이지 않는 지금 생활이 좋았거든요. 그 이후로도 간혹 연락이 왔지만, 안부 정도로만 끝났습니다.”
나는 쟈파의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네가 거절했는데도 원탁회의에서 복귀를 거론했군.”
“추방령을 철회하면, 어쨌든 전 메노아 가문의 일원으로 등재됩니다. 제 의지야 어쨌든 쟈파 상사라는 배경을 메노아가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형제들은 제가 복귀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겁니다. 아버지의 유산 일부가 제게 넘어가니까요. 특히 자칫하면 가주 자리도 제게 넘어갈 수도 있거든요. 단독 사업 규모론 저만한 사람이 없으니 유력한 가주 후보가 되죠.”
“가문 전체로 보면 이득이지만, 자기 자신들에겐 이득이 아닌 상황이로군, 하하.”
재미난 이야기였다. 이익과 이익이 얽혀 손해를 창출했다.
“그래서 제 형제 중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였을 겁니다. 아버지도 안일했던 거죠. 상속 전문 변호사를 준비해 뒀을지라도, 그건 먼 미래를 위한 준비였을 겁니다. 당장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거겠죠. 아버지는 우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자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죠.”
“가까운 사이일수록 능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하지. 현 가주인 오즈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오즈머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니까요. 아버지의 판단들, 그러니까 추방령 철회, 주력 사업의 전환. 이 모든 게 오즈머에겐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아차, 실수했군요. 그 누구보다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무의미한 말을 했습니다, 호욧, 호욧.”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쟈파를 보았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느슨하게 반쯤 감았다.
“쟈파, 넌 이번 일이 끝나면 내게 많은 걸 이야기해야 할 거다.”
“……그럴 생각입니다.”
난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선물 상자의 포장지를 한 꺼풀씩 벗기는 기분이었다.
‘약 28시간 뒤에 법률사무소의 책임자와 부검 전문가들이 도착한다.’
그 전에 어떤 사고가 터질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어쨌든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좋겠죠.”
“네가 던진 단서와 증거로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어. 내 머리를 쉬게 만들고 싶다면, 다른 ‘흥미’가 생길 만한 이야기나 해보든가.”
내가 짜증이 섞인 말투로 쟈파에게 다른 정보를 끌어내려 했다. 어느 정도 신경질적인 상태인 건 사실이다.
난 개수조차 맞지 않고 심지어 연관도 없을 수도 있는 무작위의 퍼즐 조각들을 반복해서 나열하고 배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인과라는 그림의 형태가 나올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사고 중지 루틴이라도 실행하면 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딱 알맞게 머리가 달았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몰입 상태였다.
쟈파는 내 의도를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추방자였던 제가 아버지와 화평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에…… 키누안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키누안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죠. 지금의 당신처럼요.”
키누안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내 사고의 초점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쟈파 상사가 한창 성장할 때도 키누안의 도움이 컸겠지. 그게 놈의 특기거든. 타인을 내세워 필요한 조직을 만들고 키우지.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대외적으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정확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을 가장해 제게 접근한 거겠죠.”
접근이라는 말이 괜히 다른 의미로 들렸다.
나는 쟈파가 여자라는 걸 상기했다. 정말 끔찍한 상상이지만, 키누안과 쟈파가 연인관계였을 가능성이 떠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키누안이라면 타지룬에 대한 성벽 없이 태연히 쟈파를…….
상상하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레가 몸을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손에 잡고 으깨고 싶었다.
“……루카 씨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이것 한 가지만 확실히 알아주시면 됩니다. 키누안은 제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쟈파라는 타지룬은 그저 알맹이가 없는 허물입니다. 껍데기만 남은 망령이죠. 전 키누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쟈파가 공허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날 보는 게 아니었다. 그저 과거에 잠겨있었다. 세로 꼴 동공에서도 허무의 빛이 스쳤다.
* * *
전 가주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었다. 그저 예측만 가능할 뿐이었다.
‘메노아 가문에선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이익과 권력을 위해서 피붙이조차 삼킬 이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쟈파의 조언을 떠올렸다.
가주 오즈머는 다른 형제들의 시선을 피해 시신을 옮겨뒀을 것이다. 자신이 범인이든 아니든 그는 시신을 숨겨야 하는 처지였다.
‘자신이 범인이면 때에 맞춰 시신을 훼손하거나 태울 목적으로 숨길 것이고, 다른 형제가 범인이라면 변호사들이 올 때까지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기겠지.’
나는 쟈파가 정해준 경로대로 모선 내부를 돌아다녔다. 명목상 손님이니 금지 구역을 제외하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친위대 훈련소.’
난 타지룬이 아닌 타종족이 많아지는 구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리 벽 너머로 훈련을 받는 아이들이 보였다. 지금은 격투술을 배우는 중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관도 은퇴한 친위대원인 듯하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었다. 입맛이 쓰군.
‘노예병.’
저 중엔 정당한 거래가 아니라 납치를 당한 아이도 있을 터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의 목숨을 납치범인 메노아 가문에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운 병사로 자랄 것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메노아 가문에서 충성하는 저들이 한없이 바보처럼 보일 터다.
그러나 난 저들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과 명칭만 다를 뿐이지, 세상 어딜 가도 비슷한 일이 수두룩했다.
제국의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휘황찬란한 수식어를 붙여봐야 저들과 근위대의 본질은 같았다.
‘전 가주의 시신은 친위대 거주지나 훈련 구역에 있을 거야.’
나는 오즈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자매를 믿지 못한다. 오히려 친위대를 더 가까이 여길 것이다. 강박적이고 기계적인 충성심을 가진 존재들이니까.
금지 구역에 시신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거긴 직계 혈족이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다. 오히려 가주 직할의 친위대 투입이 늦으니 유사시에 시신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내가 오즈머라면…….’
난 식당을 응시하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외부인이 올 만한 곳은 아닌데?
검은 전투복을 입은 에퀘시안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또 다른 친위대장.’
이 에퀘시안은 두 명의 친위대장 중 남은 하나였다. 내게 죽은 친위대장과 동격의 실력자라는 생각이 드니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난 공격성을 억누르며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의미한 시비를 걸지 않을 자신이 있다.
훌륭하구나, 루카. 사람이 되긴 했어.
난 자화자찬하며 변명거리를 꺼냈다.
“배가 고파서.”
-만찬장에서 식사하지 않았나? 인간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을 텐데?
“제대로 못 봤나 보군. 난 거기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어. 채식주의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먹을 게 없더라고.”
에퀘시안이 팔짱을 끼며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잡식이 아니라 채식이라고? 인간이 언제부터 채식 동물로 진화한 거지?
“딱히 생물학적 이유는 아니야. 신념의 영역이지. 저기 풀떼기가 맛있어 보이는데 좀 먹어도 되겠지? 아니면 손님이 배고프다는데 굶게 놔둘 생각인가?”
에퀘시안은 턱을 매만지다가 고갯짓으로 식당을 가리켰다.
-식사는 허가하지. 훈련생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입조심해라.
“자신들이 노예라는 걸 깨닫게 하지 말란 소리지?”
에퀘시안이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화내지 않고 짧게 웃었다.
-나도 여기서 탈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지. 돈 몇 푼에 총알받이가 될 자유를 누릴 바에…… 여기가 낫다는걸.
에퀘시안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컸다. 마치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잘도 거짓말을 하는군.’
난 에퀘시안의 과장된 행동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에퀘시안은 탈주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저 훈련생을 세뇌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화겠지. 바깥보단 여기가 낫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나도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기에 고개를 까딱였다. 에퀘시안 친위대장도 바쁜지 내게 경고만 하고선 사라졌다.
저벅, 저벅.
식당의 배식대로 걸어간 나는 채소만 듬뿍 덜어서 자리에 앉았다. 아무 소스나 뿌리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냉장실은 저쪽이로군.’
난 동공만 움직여 식당과 조리실의 구조를 살폈다. 그리고 내가 왔던 길과 모선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겹쳤다.
‘바깥 복도에서 화광예도로 벽을 녹여서 뚫고 가면 된다.’
냉장실로 들어가는 최적의 경로가 보였다. 저기에 시신이 있을 것이다. 내 판단이 틀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식사하며 관찰하던 나는 확신을 키워갔다.
‘조리실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상당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요리사치고는 지나치게 움직임이 깔끔했다. 그들은 간혹 찬장을 힐끗 보거나 청소함을 열고선 무언가를 확인하듯 머뭇거리기도 했다.
‘거기에 무기를 숨겨둔 거로군. 유사시에 대응하려고 말이야.’
저들의 의도가 눈에 뻔히 보였다.
-어이, 인, 인간. 풀, 풀만 먹어도 맛, 맛있어?
크롤러 훈련생 하나가 내 맞은편에 앉더니 말을 걸었다. 아직 타지룬어가 익숙지 않은 듯했다.
난 훈련생을 힐끗 보았다. 덩치를 보니 보얀보다도 어린 듯했다. 녀석의 접시에는 고기만 가득했다.
“아무렴, 맛있고말고. 너도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먹어. 그래야 건강해지지.”
일어선 내가 먹다 남은 채소를 크롤러 훈련생의 접시에 쏟아 넣었다. 크롤러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채, 채소 싫어!
“편식은 나쁜 거야.”
난 크롤러 훈련생의 등을 툭툭 치며 자리를 뜨려 했으나, 이질감을 느끼고선 우뚝 선 채로 천장을 보았다. 날 몇 번이나 살려준 예지력 같은 직감이었다.
픽!
천장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모선의 모든 전력이 나간 듯 기계음이 일순간에 멎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신 쟁탈전이 시작되는 건가?’
내 생각보다 일렀다. 적어도 밤에 시작할 줄 알았다.
이게 천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시신이 있을 거라 추측되는 냉장실이 저 안쪽에 있다. 그러니까, 난 지금 최전선에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