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20)
배드 본 블러드-20화(20/197)
020
나는 어지러운 전선이 연결된 헬멧을 쓰고 있었다. 뻗어 나간 전선은 감독관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다.
헬멧에 투영된 디스플레이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그림과 단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간간이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로 번갈아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뇌의 반응을 스캔하는 헬멧에선 고주파가 간헐적으로 났다.
심리검사는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제나 불쾌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악몽이라도 꾼 듯이 호흡은 가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끝났습니다, 루카 님. 고생하셨습니다.
안드로이드가 내 헬멧을 위로 젖히며 말했다. 나는 고개만 까닥이며 의료용 의자에서 벗어났다.
내 시선은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에서 멈췄다. 거기선 다른 의료진과 감독관이 내 심리검사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별다른 건 없을 거야.’
이번 심리검사에선 자신이 있었다. 특히나 근위대장이 넌지시 꺼낸 보상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근위대장의 양자,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
내 성취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일은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가 절로 솟구쳤다. 그 강렬한 욕구는 잡념을 잡아먹고도 남았다.
‘나는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히면서 키누안을 감시한다.’
나는 검사실을 나갔다. 의료진과 감독관은 심리검사 결과를 내게 바로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높은 점수를 확신한 내게 불안은 없었다.
숨을 돌린 나는 단말기를 꺼냈다.
삑.
단말기에는 메시지가 몇 개 쌓여 있었다. 그중엔 키누안의 연락도 있었다.
‘당분간은 휴식을 취할 것. 휴식도 훈련의 일환.’
메시지는 간략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연락이 있을 때까지는 찾아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삑.
나는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루카, 시간이 나면 찾아와.’
일레이의 연락이다. 이번 심리검사에는 일레이의 도움도 있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대범하게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과거의 자신을 상기해 내 심리 상태를 재조정했다. 흐리멍덩하고 유약한 부분을 쳐낼 수 있었다.
‘되도록 정신 상태를 이렇게 계속 유지한다.’
내겐 좋은 시기였다. 하층 구역엔 당분간 가지 않을 것이다. 키누안과 접촉도 없다. 이참에 약자를 향한 동정심 따윈 걷어 내버리는 게 좋겠지.
이왕이면 일레이와 접촉하는 일도 줄이고 싶었다. 녀석도 내게 나쁜 영향을 준다. 내 마음이 단단히 굳어 형태가 고정될 때까지는 일레이를 만나기 싫었다.
하지만 일레이의 이번 연락은 묘하게 다급한 느낌이었다. 나는 녀석의 불안과 동요를 짧은 문장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오늘은 근신경계의 안정성이 높은지 내 발걸음이 가볍고 규칙적이었다. 수 킬로미터를 내달려도 숨이 차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조금 걷고 나니 심리검사의 후유증으로 남아 있던 두통도 금세 사라졌다.
내 정신과 육체는 최고조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 근신경계 확장 훈련을 하면 한계치 갱신이 가능할 터다. 이건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 * *
콰- 앙!
일레이가 예약해 둔 훈련실에 들어가자마자 굉음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일레이는 타격 주머니의 좌우를 번갈아 치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타격 주머니에 닿을 때마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났다.
쾅!
일 톤이 넘는 타격 주머니는 천장에 닿을 듯이 매번 치솟았다.
나는 일레이에게 말을 걸지 않고 벽에 기댄 채로 기다렸다. 일레이는 감정을 쏟아내듯 무리한 타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잉, 기잉.
일레이의 팔다리 인공 피부 아래에선 과열된 회로가 문신처럼 드러났고, 땀샘에선 연기가 거칠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레이는 의체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 쓰고 있었다. 기계와 생체의 접합부에선 충격을 이기지 못한 살이 짓눌리고 뭉개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관절부의 완충장치가 버티지 못할 정도로 타격의 반발력이 큰 탓이었다.
덜컹!
마침내 타격 주머니가 천장에 닿았다. 일레이는 시퍼렇게 눈을 뜨며 내려오는 타격 주머니를 응시했다.
키이이잉!
일레이의 다리에서 모터가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는 빙글 돌면서 내려오는 타격 주머니를 걷어찼다.
나는 귀를 잠시 막았다. 일레이의 발등이 타격 주머니에 닿았다.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기가 미미하게 떨렸다.
콰지지직!
타격 주머니와 연결된 천장 타일이 부서졌다. 타격 주머니는 그대로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하아, 하아…….”
타격 주머니를 시원하게 날린 일레이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상체를 숙인 채로 무릎을 잡고 있었다. 방금 발차기를 날린 오른쪽 다리에선 유격이 생겨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레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일레이가 고개를 들길 기다렸다.
어차피 날 부른 건 일레이다. 할 말이 있으면 먼저 꺼내겠지.
뚝, 뚝.
일레이의 피와 땀이 뒤섞인 채로 떨어지고 있었다. 매사에 침착하던 녀석이 격렬히 흥분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
치이이익!
일레이는 냉각제가 담긴 주사기를 팔다리에 꽂았다. 기화열을 머금은 증기가 그의 팔다리에서 흘러나왔다.
“후우.”
그제야 일레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평소와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는 축축한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나를 보았다.
“심리검사는 잘 통과했어?”
“덕분에.”
나는 짧게 말하며 벽에서 등을 뗐다. 팔다리를 식힌 일레이는 연고를 접합부의 살점에 발랐다.
일레이는 자기 파괴적 행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토록 본인의 신체를 혹사했다는 건 그만한 심적 고통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레이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원인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일레이,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으면 말해.”
난 흘러가듯 말했다. 그러나 일레이는 정말로 부탁할 게 있었는지 뚫어져라 나를 쳐다봤다.
“당장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만간 딱 한 번만…… 내 부탁을 들어줘.”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일레이가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시답잖은 일이 아니다. 어쩌면 내 목숨과 경력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제국을 거스르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일레이는 드물게 내게 간곡한 요청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심리검사 때문에 정신을 견고하게 다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도와주겠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일레이도 지금 내 심리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한 군인이다.
‘그렇기에 일레이는 지금 당장 내게 부탁하고 있다.’
일레이는 내 마음의 동요와 허점을 노리지 않았다. 내가 가장 강인한 순간에 이런 부탁을 내뱉었다. 참으로 정정당당하구나, 일레이 카르티카.
“최선은 다하겠지만 확답을 해줄 순 없어.”
내 대답은 원론적이었다. 일레이가 비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라도 고맙다, 루카.”
일레이는 쓰게 웃었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일레이, 전장에서 네가 위험에 빠진다면 난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널 구할 거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알고 있어. 네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애초에 무슨 내용인지 말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부탁한 내가 뻔뻔한 거지.”
나는 일레이의 친구이기 전에 제국의 군인이다. 이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 눈동자는 무기질처럼 건조할 것이다.
“용무는 이걸로 끝이야?”
“그래, 하지만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차라리 이게 내 기우라면 좋으련만…….”
일레이의 부탁 내용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나는 굳이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것을 알려고 하지 말 것. 제국 군인의 미덕이다.
* * *
이후, 열흘간 나는 일레이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일레이도 나름대로 바쁘게 뭔가를 준비하는 듯했다.
나는 일레이와 키누안이 없는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근신경계 확장에도 성공해 한 단계 윗급 출력의 의체를 쓸 수 있게 됐다.
아키에스 전투술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아키에스 전투술은 실전에서 익혀야 한다. 독학과 훈련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길다, 가브리엘.’
그 두 사람도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 그러나 평생 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마음은 굳어가고 있었다. 혼란한 감정들은 쓰레기처럼 땅바닥에 묻어서 덮었다. 냄새조차 새어 나오지 않게 땅을 다지고 있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루카.
그 말의 울림이 썩 나쁘지 않다. 당장 내게 당면한 목표다.
보름이 더 지나갔다. 나는 스스로가 강철처럼 변하는 걸 느꼈다.
그래, 이게 원래의 나다. 나는 진정한 자신을 되찾았다. 보육원에서 걸어 나와 근위대 훈련소 앞에 섰을 때의 나.
내가 일레이의 얼굴을 다시 본 건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근위대장이 나와 같은 기수의 생도를 전원 호출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건 모두 기밀 사항이다. 인지했으면 외부와의 통신을 모두 끊도록.”
근위대장이 단상에서 말했다. 그는 생도들을 훑어보다가 내게 시선을 잠깐 두었다.
나도 근위대장의 눈을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일레이도 빳빳한 자세로 근위대장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 시각부로 우린 특수군사작전에 들어간다…….”
근위대장의 설명은 길었다. 요점만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두 번째, 근위대 생도는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한다.
세 번째, 반군에 가담한 가문 중에 라모네스가 있었다.
라모네스는 내게 거절당했던 여자, 릴리안의 가문이다. 내 담당 임무 중에 죽은 클로드의 집안이기도 하다. 그 가문이 역적 집안이란다. 숙청 대상이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떻냐고?
아주 좆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