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26)
배드 본 블러드-26화(26/197)
026
나는 지금부터 일레이와 싸워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내가 우위에 있다. 실수만 없으면 이기는 건 나다. 그러나 실전은 항상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끼릭, 끼릭.
내 오른쪽 의안은 홀로 움직이며 라모네스 일가를 쫓았다.
나는 내 목적을 상기했다. 수많은 추론과 사고 속에서 최적의 판단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재고했다.
지금만큼은 아키에스 전투술로 인지 능력을 확장한 것에 감사하고 있다.
‘굳이 일레이와 정면 대결할 필요는 없다.’
일레이는 라모네스 일가를 지키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릴리안 라모네스를.
‘릴리안을 죽여야 한다. 훗날의 앙금이 남더라도 당장은 일레이를 살릴 수 있어.’
여기서 일레이와 철천지원수가 되어 사이가 틀어져도 상관이 없었다. 이 방법이라면 적어도 내 손으로 녀석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라모네스 일가와 목격자를 전부 죽이고, 일레이의 폭주를 없던 일로 만든다.’
의심쩍은 정황이 있어도 카르티카 가문의 자제니까 어찌어찌 넘어갈 터다.
행동방침을 결정한 나는 자괴감을 느꼈다. 일레이를 심판하겠다는 결심은 어느새 뒷전이다. 내 머리는 녀석을 구제하기 위한 계책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나도 어지간히 물러터진 병신인가보다.
“루카, 날 무시하고 릴리안을 공격할 셈이지?”
일레이가 날카롭게 말했다. 역시 우수한 녀석답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려는 척하다가 앞으로 냅다 달려나갔다.
타- 앙!
일레이도 나를 저지하려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연거푸 이어졌다.
탄도 예측이 기본인 우리에게 단독 사격은 먹히지 않는다. 그저 내 속도를 줄이려는 견제사격이다. 얼마 전의 나라면 총알을 피하려고 주춤했을 터다.
그러나 나는 전장에 나가기 전에 사이버네틱 신호의 속도와 대역폭을 무리해서 확장했다. 업그레이드를 끝낸 나는 일레이의 예측보다 더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 일레이의 당혹감이 흐트러진 사격에서 느껴졌다. 마지막 총알은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빗나갔다.
‘이걸로 내가 앞섰다.’
일레이가 뒤늦게 내 앞을 막아서려고 달려왔다.
‘일레이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일레이를 단시간에 제압하긴 힘들다. 그 사이에 라모네스 일가가 도망갈 것이다.
“후우우…….”
나는 탁한 호흡을 내뱉으며 다리의 출력을 높였다. 일레이와 나의 의체 성능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내 반응 속도가 앞서기에 가속력은 내가 우위다.
투- 웅!
단번에 속도를 붙인 나는 일레이의 저지선을 통과했다. 이제부턴 녀석이 뒤에서 나를 쫓아와야 한다.
라모네스 일가와 나 사이의 일직선에 그 무엇도 없었다. 내 시선은 라모네스 일가에게 박혀있었다. 2초 후에 저들과 나는 충돌할 것이다.
일레이의 기척이 뒤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뒤는 신경 쓰지 말자. 일레이가 접근하기 전에 모든 걸 끝내면 된다.
라모네스 일가의 두 아들이 나와 맞서려고 총을 들었다. 그들도 훈련받은 군인이었다. 근위대는 아니지만 말이다.
“맞서지 마!”
일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내가 두 아들에게 도달했다.
나는 칼과 권총을 뽑은 채로 두 아들에게 뛰어들었다. 그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느리고도 느리다. 한없이 늦어.
저들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지도 못하는 머저리들이었다. 근위대 적성검사에 합격도 못 한 자들. 보아하니 라모네스 가문이 클로드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을 터다.
나는 방아쇠를 당겨 첫째 아들의 미간에 바람구멍을 냈다. 그리고 칼로는 둘째 아들의 머리를 세로로 쪼갰다. 뇌의 단면이 힐끗 보인다.
탁!
내가 두 아들 사이로 착지했다. 그들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남은 건 가주 위고 라모네스, 부인, 그리고 릴리안. 이렇게 세 명이다.
위고 라모네스는 두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는 나를 향해 뭐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푹!
나는 둘째 아들의 피가 묻은 칼로 위고의 턱부터 정수리까지 찔렀다. 물컹한 뇌를 파고드는 감촉이 선명했다.
끽!
나는 칼날을 비틀어 위고의 뇌를 확실하게 부쉈다. 눈이 뒤집힌 위고의 몸뚱이가 잔류 신호로 경련했다.
서둘러라, 루카. 곧 일레이가 내 등을 덮칠 것이다.
위고의 머리를 관통한 칼을 빼낼 시간은 없다. 그리 판단한 나는 손날을 세워 라모네스 부인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콰지지직!
내 손날을 따라 귀부인의 머리가 뺨부터 찢어지며 가로로 박살 났다. 하관만 남은 머리는 제법 스산했다.
뇌의 통제를 잃은 귀부인의 몸뚱이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허우적거렸다. 얼핏 보면 취객의 춤 같기도 했다.
네 명의 죽음은 찰나였다. 남은 건 릴리안 하나였다.
“아…….”
릴리안이 그제야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나와 일레이처럼 고속 사고를 하지 못하기에 뒤늦게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가족이 눈앞에서 참살당했다. 릴리안에게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도 금방 죽을 테니까.
곧 릴리안은 끔찍한 절규를 내지르겠지.
나는 몸을 빙글 돌리며 릴리안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나는 보지 않고 쏴도 그녀의 머리를 날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다.
릴리안은 혼돈의 희생양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내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던 여자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증오든 절망이든 말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난 그녀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양심이라는 게 완전히 증발하기 전까진.
……예상이 빗나갈 때, 우리의 뇌는 찰나의 공백에 빠진다. 지금 내가 그러했다.
‘웃어?’
나는 릴리안의 표정을 보곤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녀는 젖은 눈동자로 울고 있었다. 그러나 눈꼬리와 입술은 씰룩거리며 웃고 있었다릴리안의 얼굴에 떠오른 건 기쁨이었다. 그렁그렁 흘리는 건 환희의 눈물이었다.
‘왜 웃는 거지?’
그녀의 반응은 기이했다. 그 때문에 나는 망설이고 말았다. 일레이가 따라붙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루카아아아아-!!”
일레이가 칼을 휘두르며 나와 릴리안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가 이토록 분노한 건 나도 처음 봤다. 그의 얼굴에선 청백색의 안광이 너울거렸다.
나는 늦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릴리안의 머리를 쏘려 했다.
팅!
그러나 총알은 덧없이 일레이의 칼에 튕겨 나갔다.
침착해라. 예상과 다르지만, 상황은 내게 나쁘지 않다.
어차피 라모네스 일가는 릴리안 빼곤 처리했다. 여기서 일레이를 제압하고 릴리안을 죽여도 된다.
이성을 잃은 쪽은 일레이다. 상처 입은 맹수를 처리하듯 녀석을 상대하자. 팔다리를 전부 베어내면 놈도 어쩌지 못하겠지.
……조금 이상하지만, 지금 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웃고 있었다. 실전에서 내 기량을 전부 받아낼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의 타고난 폭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날 여기까지 이끈 본능을 나쁜 것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다. 좋게 말하면 군인에게 필요한 공격성이 뛰어난 거지.
검붉은 감정이 내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안 된다. 자칫하면 여기서 일레이를 죽여버리고 말 테니까.
“웃지 마, 루카.”
일레이가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처럼 릴리안 앞에 서며 말했다.
방금은 내가 실수했다. 내 섬뜩한 미소를 본 일레이가 냉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된 이상, 쉽게 끝나진 않겠지.
“일레이, 방금 저 여자의 표정을 봤어? 가족이 죽었는데 기뻐하고 있잖아. 이상하지 않아?”
나는 뒤로 물러나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일레이도 릴리안의 기이한 표정을 봤을 터다. 이 말로 일레이가 동요한다면 내게 이득이다.
“……이상하지 않아. 이제야 해방된 거니까.”
일레이는 릴리안이 웃는 이유를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릴리안과 일레이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묘했다. 단순히 일레이의 짝사랑이 아닌 것 같았다.
“릴리안은 네게 첫사랑 그 이상의 의미가 있군.”
일레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칼에 묻은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아냈다. 일레이는 내 동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잉!
내가 팔을 뻗어서 깨끗해진 칼끝을 일레이에게 겨누었다.
“뭐, 좋아. 어차피 뭐든 상관없지. 이제 시작해보자.”
* * *
근위대 생도인 우린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 훈련 기간 내내, 화학요법과 합성약물로 신경계를 강화했다.
고성능 전투의체는 자연 상태의 뇌로는 감당하지 못한다. 의체의 동작은 인간의 반응한계보다 빠르고, 생체라면 근육이 파열할 정도의 고강도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은 우리의 움직임에 대응조차 못 한다.
일레이와 나는 고속전투를 벌였다. 뒤에 서 있는 릴리안은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키이잉!
나는 팔을 움직여 칼을 휘둘렀다. 칼날의 궤적이 원체 빨라서 채찍처럼 휘는 것 같았다.
카- 앙!
일레이도 칼을 뻗어 내 공격을 막았다. 칼을 쥔 내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건 일레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날이 여러 개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공방이 이어졌다. 칼날이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동질의 금속끼리 충돌하다 보니 칼날의 이가 빠지고 있었다.
얼핏 보면 상황이 비등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일레이도 나도 알고 있다.
‘이기는 건 나다.’
과거의 우리는 대등했으나 일레이에겐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내가 자신을 날카롭게 갈고 닦는 동안, 녀석은 이상한 사상과 잡념에 빠져 있었다.
‘지금 와서 간절하게 노력한다고 없던 힘이 생기진 않아.’
일레이는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며 모든 역량을 바닥까지 긁어내며 끌어내고 있었다.
‘릴리안 라모네스가 이럴 가치가 있는 여자인 거야?’
그리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일레이는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면서 릴리안을 지키고 있었다. 심지어 가망조차 지극히 낮았다.
“후.”
내가 짧게 호흡을 내뱉었다. 내겐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일레이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즐거웠다, 일레이.”
간격을 벌린 내가 말했다.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마.”
일레이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말했다. 녀석은 자기가 말하고도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걸 아는지 쓰게 웃고 있었다.
“넌 똑똑하잖아. 미련하게 굴지 마. 아직 늦지 않았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럴 건 없잖아?”
내 호흡은 완만하게 가라앉았다. 반면에 일레이는 아직도 숨이 거칠었다. 지금 공격하면 금방 녀석을 제압할 수 있다.
“루카, 넌 아무것도 몰라.”
일레이는 내 설득에 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 알고 싶지도 않아. 자신의 소대원까지 죽여버린 놈의 생각 따윈.”
내 비아냥에 일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에게도 죄책감이 있을 것이다.
“라모네스를 비롯해 반역자로 지목된 가문들은 반기를 든 적이 없어. 제국이 명분을 적당히 가져다 붙인 것이고, 실제론 숙청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시간을 번다고 달라질 건 없어.”
“숨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지어낸 말은 아니야. 반역을 준비한 것치고는 반격이 너무 어설프잖아. 기껏해야 가문의 사병이 전부야. 진짜 제국에 반기를 들 생각이었다면 코라나 벨라토를 끌어들였겠지! 하다못해 외계의 용병단이라도 고용했을 거야. 그 정도의 재력은 있는 가문들이니까.”
나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내 머리가 돌아갔다.
‘저 말은 사실이다. 세 가문이 합친 것 치고는 반란군의 규모가 너무 작아. 외부 세력도 없고.’
아케인 요새 진입까지만 까다로웠다.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모든 게 속전속결이었다.
코라 신성국과 벨라토 연방은 호시탐탐 제국의 분열을 노리고 있었다. 제국의 유력가문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지원해줄 세력이 세상에는 차고 넘쳤다.
내 의문에 대한 답은 일레이의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제국이 우리 가문을 노린 이유는 이거 때문이니까요.”
릴리안이 부친의 시신을 뒤지며 말했다. 그녀는 시신에서 큐브를 꺼냈다. 은은한 빛이 나는 큐브였다.
내가 알아선 안 될 지식이 릴리안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더는 그녀의 말을 들어선 안 된다.
당장 일레이를 제압하고 릴리안을 베야 했다. 각인된 군인으로의 본능이 스멀스멀 내 뒷덜미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그 못지않은 호기심이 시커먼 살의를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릴리안의 말을 계속 듣고 말았다.
“이건 아케인 유물입니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잠들어있던 요새를 기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것 덕분이죠.”
릴리안이 아케인 큐브에서 손을 뗐다. 큐브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살짝 떠오른 채로 빙글빙글 돌았다. 예전에 내가 본 아케인 유물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아니, 너희 가문은 그냥 반역자야. 멋대로 아케인 유물을 빼돌려 연구한 거겠지.”
나는 최대한 차갑게 말했다.
“루카, 라모네스 가문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 아케인 유물을 조사하고 연구했었어. 무고한…….”
일레이가 열심히 항변하려는 찰나에 릴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일레이의 말을 가로채듯 잘랐다.
“아뇨. 우리 집안이 무고하다는 말은 틀렸어요. 실제로 아버진 반역을 준비했으니까요. 아케인 유물을 이용해 요새 기동법을 발견하자마자 보고하지 않고 숨겼어요. 어쩌면 황제를 능가할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거죠.”
“릴리안! 지금은…….”
일레이가 릴리안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언제라도 그 둘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릴리안에게 관심이 일었다.
릴리안은 가족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침착하게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인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이런 여자일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저 제멋대로인 귀족 아가씨로만 생각했었다.
“루카, 당신은 일레이를 소중하게 여기죠? 일레이는 제국에서 원하는 삶을 누리지 못해요. 지금이라면 일레이는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저와 함께요.”
나는 주춤거렸다.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일레이는 제국에서 도망치려다가 내 중상 때문에 남은 적이 있었다.
내 공격성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 기미를 일레이와 릴리안도 느끼고 있을 터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어. 제국군이 요새 전체를 포위하고 있다고. 비밀 통로라도 믿고 있는가 본데 이미 다 알아냈을걸.”
내가 타협하듯 말했다. 나와 일레이가 기적적으로 힘을 합칠지라도 릴리안을 데리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요새 지하에는 공간이동 장치가 있어요. 아버지가 해독한 자료를 보면 생물체도 전이할 수 있다고 해요. 요새 함락을 대비한 탈출 장치였던 거겠죠.”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간이동 장치라고?”
“루카, 절 죽이고 싶다면 죽여도 괜찮아요.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일레이는 당신보다 기량이 떨어지죠. 저만 죽으면 끝인데 일레이의 인생을 망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이 아케인 유물에 반응해 공간이동 장치가 작동한다면…… 일레이와 저는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당신은 우리를 못 본 거라고 말하면 그만이고요.”
솔깃하다. 릴리안이 죽고 사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레이가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긴 전장이니 행방불명이나 사망으로 위장하기도 쉬워.’
이게 내 이목과 관심을 끌었다.
내가 릴리안을 처리해서 어떻게든 일레이를 살렸다고 치자. 그러나 일레이는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가문의 후광으로도 목숨을 건지지 못할 상황에 빠지겠지.
키잉!
나는 칼을 한 바퀴 돌려서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내 태도를 본 일레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루…….”
“닥쳐, 일레이. 하나만 약속해. 릴리안이 말한 공간이동 장치가 없거나 작동하지 않으면…… 더는 날 막지 마. 너도 들었겠지? 릴리안은 네가 곤경에 빠지길 바라지 않아.”
일레이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릴리안을 돌아봤다. 릴리안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릴리안이라는 여자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여자인 줄 알았다면 이성으로 교제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약속할게, 루카.”
일레이의 입에서 마지못한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