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27)
배드 본 블러드-27화(27/197)
027
나도 제대로 미친 게 틀림없다.
지금 나는 일레이를 도와 릴리안 라모네스의 탈출을 돕고 있다. 상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일레이, 넌 원래 나사 빠진 새끼니까 그렇다고 치자. 릴리안,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년이야?”
내가 앞장서서 걸으며 말했다. 나와 일레이는 고속전투 때문에 의체의 발열이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냉각하는 동안은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말투가 원래 그렇게 무례하셨나요?”
“난 원래 이래. 하층민 출신에게 고상한 말투라도 바란 거야? 그보다 난 네 일가족을 몰살한 장본인이야. 용케도 차분하게 말을 거네.”
나는 릴리안의 내면이 궁금했다. 가족의 참변을 보고도 웃던 그녀의 얼굴이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가족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그 말을 듣고선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피붙이의 죽음을 보고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물을 여유와 시간이 없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다른 진압군에게 발견되면 우린 끝이다.’
우린 릴리안 라모네스를 호위하고 있다. 이 모습을 제국군에게 들키면 변명의 여지조차 없어진다.
“공간이동 장치니 뭐니…….”
내가 툴툴거렸다. 우리의 계획은 간단했다.
‘지하 밑층에 있는 순간이동 장치를 작동시켜 릴리안을 밖으로 빼돌린다. 여유가 된다면 일레이도…….’
나는 일레이를 흘깃 살폈다.
일레이는 지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심적으로 몹시 몰린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과 얼굴에 묻은 피조차 닦지 않고 있었다.
“일레이, 잠시만요. 피가 굳기 전에 얼굴을 닦죠.”
릴리안이 내 시선을 알아채더니 손수건을 꺼내 일레이의 얼굴을 닦았다.
“천운이 따라서 살아서 여길 나간다면, 둘이서 아예 살림이나 차리지 그래?”
나는 비꼬며 말했다. 일레이는 피를 걷어낸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릴리안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말이지.”
일레이의 자조를 들은 릴리안이 움찔했다. 그녀는 일레이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느껴야 하는 거고.
“일레이, 당신이 저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로 꿈에도 몰랐죠.”
“너는 내게 바깥세상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하니까.”
나는 침묵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어쩌면 이게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었다. 내가 모르는 인연과 유대가 그들에게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요?”
“내겐 고작이 아니야.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었으니까.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과 혼란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됐어. 네가 아니었다면 진즉 난 미쳐버렸을 거야. 난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인데 말이야.”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자세한 정황은 몰라도 대강은 알 만했다.
‘릴리안은 일레이의 불온한 사상에 영향을 준 여자다.’
그리고 지금 내 꼴을 생각하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불온한 사상은 전염병과 같았다. 한 번 놓치면 사람을 통해 번져나간다. 그리고 제국의 내부부터 천천히 갉아먹는다.
릴리안, 일레이, 그리고 나.
차근차근 불온한 사상이 퍼져나간 셈이다. 우리 같은 이가 많아지면 제국은 약해지다가 무너질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벨라토 연방이나 코라 신성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겠지.
‘지금 나는 일레이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제국이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일레이가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진즉 죽였을 것이다.
‘나는 불온한 인간이 아니야.’
나는 그 말을 되새김질하며 마음 깊이 아로새겼다.
‘그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뿐이지.’
제국에 대한 충성보다 일레이에 대한 우정을 택했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불온한 행동이긴 하다.
“여기서 탈출하게 된다면…… 저는 보더시티로 갈 거예요. 혹시라도 우리가 흩어지면 거기서 만나도록 해요. 루카, 당신도 제국에서 벗어날 생각 있다면 보더시티로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볼일 없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보더시티가 어떤 곳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벨라토 연방의 도시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보더시티…….”
일레이는 보더시티에 대해 알고 있는지 생각에 잠시 잠겼다.
다행히 우리는 반군도 제국군도 만나지 않았다. 우리보다 앞선 제국군은 없었고, 반군들도 이렇게 깊은 지하까지 내려올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마도 라모네스 가문, 그것도 직계만 공간이동 장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겠지.’
공간이동 장치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은 다른 통로를 통해 지상으로 나가려고 했을 터다.
지하 깊이 들어가자, 우리에게도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릴리안은 일레이와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제 아버지인 위고 라모네스는 야심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사재를 털어 황실로부터 아케인 연구에 대한 허가를 받아낼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게 황제의 손바닥 안이었던 거죠. 아버지가 힘을 갖추기 전에 황제가 과감하게 선수를 쳤으니까요. 아버지는 황실을 속이고 이용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용당한 건 본인이었죠.”
릴리안의 태도는 담담했다. 어조만 들으면 아버지가 아니라 생판 모르는 남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피곤하군.’
오늘은 하루가 길었다. 한계까지 정신과 신체를 몇 번이나 몰아세웠다. 날카롭던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레이를 돕겠다는 결단도 흐트러진 정신이 낳은 오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를 쉬게 둘 순 없었다.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도 생각 해둬야 한다.
‘다행인 점은 근위대장이 나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거지. 키누안을 염탐하는 일도 나만 할 수 있고.’
조그마한 의심 정도는 사더라도 처분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기껏해야 일레이와 릴리안은 일개 생도와 귀족 여자에 불과해. 대단한 인물들은 아니지. 깊게 파고들진 않을 거다.’
이들은 반란의 주축이 아니다. 개인의 일탈에 불과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눈앞의 통로를 응시했다. 통로 끝에는 문이 있었다. 더는 길이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일레이, 마음의 준비를 해둬. 여기에 공간이동 장치가 없으면…… 끝이다.”
내가 경고하듯 말했다. 일레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덜컹.
오래된 문이 저항 없이 열렸다. 여기서부터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피로로 느슨해진 신경이 빠르게 곤두섰고, 내 오감은 주변의 이변을 빨아들이듯 활짝 열렸다.
루카,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감의 원인을 알아채야 한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이건 예지에 가까운 확신이다.
끼이-.
문이 손톱만큼 열렸다. 내부는 환했다. 이상할 건 없다. 요새의 기동과 함께 모든 조명장치도 같이 작동했으니까.
그러나 공기는 이질적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눈을 감으며 냄새를 빠르게 분간했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신선한 피비린내, 그리고 기름과 쇠 냄새가 강렬하게 치고 올라온다. 생체 특유의 체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일레이, 근위대다.”
내가 나직이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근위대가 우리보다 먼저 내려와 공간이동 장치를 점거하고 있었다.
일레이도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나도 일레이의 반응을 살필 여유는 없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났다.
기이잉!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방 중심에 있는 원형 캡슐이었다. 캡슐은 사람 서넛은 들어갈 크기였다. 공간이동 장치가 여기에 있다면 저 캡슐일 것이다.
캡슐 주변에는 검붉은 제복을 입은 근위대원 네 명이 서 있었다. 몸의 절반을 가리는 망토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근위대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우리에게서 멈췄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망했다. 지금부터 릴리안을 살릴 방법은 없다. 전갑의체가 없는 근위대 한 명이라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일레이와 어찌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눈앞의 근위대원은 넷이다. 뇌의 에너지를 낭비해서 생각해볼 것도 없다. 저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릴리안의 생존을 가정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일레이를 살릴 수 있지?’
근위대가 릴리안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도 최악의 결말이다. 릴리안은 고문과 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든 걸 실토할 것이다. 그녀의 심지가 아무리 굳세더라도 일반인에 불과하다. 우리처럼 고통을 무시하는 법을 훈련받지 못했다.
릴리안이 생포 당하는 순간, 나와 일레이의 반역 행위도 고스란히 상부에 들어간다는 소리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단 한 가지 방법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의 손으로 릴리안을 지금 죽인다, 지체하지 않고.’
그러면 의심을 조금 사더라도 상부를 납득시킬 변명거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일레이가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릴리안이다. 릴리안의 죽음을 코앞에서 보고도 일레이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녀석이 폭주해서 근위대에게 덤벼들면 모든 게 끝장이다.
“……루카와 일레이로군. 듣던 대로 우수하구나.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말이야.”
근위대원 한 명이 우릴 알아보며 말했다. 더는 시간이 없다. 망설이면 의심이 커진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방법이 없다.’
나는 칼을 들어서 릴리안의 목을 베려 했다. 돌아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일레이?’
내 행동보다 먼저 총성이 퍼졌다.
타- 앙!
이미 일레이가 릴리안의 미간에 총구를 겨눈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즉결처형이었다.
스르르.
릴리안이 미간에 구멍이 난 채로 나자빠지고 있었다. 그 광경이 내게도 조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도 어쩌면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거란 달콤한 환상에 잠시 빠져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털썩!
릴리안이 뒤로 뻗은 채로 쓰러졌다. 미간의 구멍에선 분홍빛 체액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자, 루카. 현실로 돌아올 때다. 처음부터 릴리안의 생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난 재빨리 일레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동요가 느껴졌다. 그는 가까스로 말을 짜냈다.
“내 위치가 더 자연스러워, 루카.”
일레이의 말은 옳았다. 문을 열던 내가 릴리안을 죽이려고 뒤돌아서는 건 누가 봐도 이상했다. 릴리안 곁에 있던 일레이가 즉결처형하는 게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이치에 맞을 뿐이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레이가 직접 릴리안을 죽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일레이의 폭주라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방금 총성은 무엇이지?”
근위대원 한 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저들이 일레이의 동요를 알아채게 해선 안 된다.
나는 죽은 릴리안의 머리채를 잡아서 근위대원 앞까지 끌고 갔다.
“쓸모가 없어진 포로를 처형했습니다.”
내가 릴리안의 품에서 큐브 형태의 아케인 유물을 꺼냈다. 근위대원들의 시선이 단숨에 유물에게 쏠렸다.
뒤로 물러난 근위대원들이 자기끼리 속삭였다. 이윽고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나왔다.
척!
근위대원이 절도있게 서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턱짓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고하도록, 루카.”
나는 두 손을 모아 허리 뒤에 대며 보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