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29)
배드 본 블러드-29화(29/197)
029
달그락.
나는 손바닥 위에 있는 무공훈장을 응시했다. 십자검 모양인지라 그 끝은 뾰족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만지다간 손가락이 찔릴 것만 같았다. 칼날 부분에는 ‘7’을 의미하는 ‘VII’ 표기가 새겨져 있었다.
7급 십자검 무공훈장,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는 증거였다.
근위대 생도 중에선 나와 일레이만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른 생도나 교관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교관들의 말을 들어보면 근 몇 기수를 통틀어봐도 나와 일레이만큼 뛰어난 생도는 없었다는 투였다.
“웃기는 일이지. 내가 훈장을 받다니 말이야.”
일레이가 말했다. 그는 십자검 무공훈장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옅게 웃었다.
릴리안의 죽음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 어느덧 공로 수훈까지 끝났고, 그날의 일은 서서히 모두의 머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일레이도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예전처럼 여유 있는 미소를 얼굴에 걸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 너머에 있는 녀석의 불안을 볼 수 있었다.
“루카, 나는 난생처음으로 단련을 게을리한 걸 후회하고 있어.”
일레이는 이 말을 듣는 게 나라서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입으로 게으르다는 녀석이 대단한 수재 취급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른 생도가 듣는다면 뒷목을 잡을 일이다.
“단련해도 바뀌는 건 없었을걸. 근위대원이 네 명이나 있었어. 그 시점에선 모든 게 끝난 거지.”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인파를 응시했다. 예비 사관생도와 근위대 생도였다.
제국은 시기를 앞당겨 생도를 모집했다. 반란 소식이 각 귀족 가문의 귀에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자신의 자제를 생도로 내보내 충성심을 증명하려 했다.
“다들 앞다투듯 모여들었군.”
내가 중얼거렸다. 일레이도 나와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준도 널널하게 잡았다고 하더라고. 제아무리 멍청한 놈도 하급 장교 정도는 할 수 있게 말이지.”
괜스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3년 전에는 나도 저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근위대장과 처음 면담할 때가 엊그제 같다.
“루카, 난 휴가를 내서 본가로 잠시 돌아갈 생각이야.”
나는 일레이가 본가로 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떤 내적 결단이 있으리라고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우린 생도 마지막 연차를 앞두고 있었다. 4년 차부터는 준 근위대원 취급을 받는다. 사실상 전갑의체가 없는 근위대원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줄곧 간직했던 의문을 입밖에 내뱉었다.
“……릴리안은 왜 가족이 죽었는데도 웃었던 거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잖아. 차라리 정신이 나갔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릴리안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정도는 나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레이는 난간에 팔을 대더니 턱을 괴었다. 그가 느슨하다 못해 흐릿한 눈동자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무기질적인 건축물이 우거진 숲처럼 높게 솟아있었다. 채도가 낮은 고층건축물 너머로는 하층 구역의 혼란한 네온사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내가 근위대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릴리안도 다른 가문과의 다리가 될 여자였거든.”
“정략결혼?”
나는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일레이는 날이 저무는 걸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고작 그 정도면 말도 하지 않아. 릴리안 라모네스는 태어날 때부터 혼인 상대가 정해졌어. 자신보다 오십 살은 더 많은 남자였지.”
“그래서 부모에게 반항이라도 했다는 거야?”
“계속 들어봐. 상대 남자는 전 부인과 사별했거든. 그 사내가 라모네스 가문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제안하면서 요구한 조건은 꽤 상세했어.”
반쯤 건성으로 듣던 나도 이야기가 슬슬 궁금했다.
“어떤 조건?”
“전 부인의 사진과 영상, 그리고 기록을 보내면서 했던 말이 가관이었다고 하더군. 전 부인과 똑같은 여자로 키워달라. 외모부터 말투, 사소한 행동 습관까지. 이름도 그래서 릴리안이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해하지 못했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구역질 나는 요구였다.
“릴리안은 라모네스 가문 내에서 사육을 당했어. 고객의 요구에 맞춘 주문제작품처럼 말이지.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 사내의 전 부인이 벨라토와 연이 깊다고 했어. 그래서 릴리안도 벨라토에 대한 지식과 서적을 접할 수 있었지. ‘벨라토 문화에 대해 해박할 것’이라는 조건도 있었으니까.”
“그럼 우리가 아는 릴리안의 외모는 원래 그녀의 얼굴이 아니겠군.”
“……그 누구도 릴리안의 원래 얼굴을 몰라. 본인도 모르지. 매년 수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장하듯 외모를 바꿨거든. 동공의 색을 바꾸고, 얼굴의 뼈는 깎고 덧댔어.
목소리도 똑같이 만들려고 성대는 일찌감치 기계로 대체했지. 아마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거야. 성인이 돼서 얼굴을 통째로 바꿔도 되는데, ‘고객’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거든. 외모의 정체성마저 고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는 음습하게 뒤틀린 욕망이 권력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새삼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학대를 당한 거로군.”
“릴리안은 취향과 습관마저 정해진 채로 살아야 했지. 그 틀에서 벗어날 때마다 끔찍한 체벌을 받았어. 집안사람 중에선 그나마 자신과 나이 차가 많지 않았던 클로드만이 릴리안을 동정했다고 하더군.”
이젠 나도 릴리안을 향한 작은 동정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불행한 인생을 살아온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클로드가 내게 릴리안을 소개해 준다는 건 무슨 의미였던 거야? 릴리안에겐 정해진 결혼 상대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면서?”
일레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나와 릴리안이 짠 거야. 클로드에겐 네가 근위대장의 숨겨둔 아들이라고 말했거든. 그래서 클로드가 네게 그런 제안을 하며 접촉한 거지.”
“야, 이 새끼가…… 아니, 그보다 클로드가 그걸 믿어?”
“누가 봐도 근위대장이 너를 각별하게 신경 썼잖아. 거기다가 근위대장의 혼외자라면 두 자리 숫자 보육원에서 근위대 생도까지 올라온 게 더 쉽게 납득이 되고.”
“참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뱉었다.
“근위대장은 쿠스토리아 가문이잖아. 현 근위대장의 아들이자 쿠스토리아 혈통인 네 아이를 낳아 어떻게든 결혼한다면…… 릴리안이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해서 릴리안에게 네 정보를 미리 건넸고.”
“지금 기분이 아주 더러운걸.”
멋대로 내 머리 위에서 놀면서 날 이용하려고 했단 말이지? 릴리안을 향한 동정은 어느새 싹 씻겨나갔다.
“미안, 루카. 난 그만큼 릴리안을 돕고 싶었어. 그리고 나는 너와 릴리안이 제법 잘 어울릴 거라고도 생각했고.”
“허울 좋은 말은 집어치워. 근데 어차피 나중에 들킬 거짓말이었잖아.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일레이가 턱을 긁적이며 웃었다.
“들킬 무렵이면 너는 정식 근위대원이 됐을 테니까. 그것도 현 근위대장의 총애를 받는 유망한 신입. 라모네스 가문과 그 약혼자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겠지. 나도 최대한 널 도와줬을 거고. 그땐 우리도 라모네스 가문이 반란의 주범이 될지 몰랐어.”
클로드의 제안과 릴리안의 접근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두 계획된 사건이었다. 나는 화도 나고 허탈하기도 했다.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일레이를 흘겨봤다. 일레이는 내 시선을 피했다.
일레이는 내 친구다. 그러나 일레이는 착한 놈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남을 이용하고 속인다. 자신의 부하를 제 손으로 죽였고, 내게도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난 여전히 일레이를 신뢰한다. 녀석은 자신의 생명과 내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기꺼이 나를 위해 행동할 것이다. 녀석의 행동 원리 우선순위에서 내 목숨의 순위가 꽤 높을 것이다.
일레이는 나를 아끼고 있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릴리안 사건 때도 느꼈지.
“일레이, 저번에 내가 부러뜨린 갈비뼈는 다 붙었어?”
내가 차분히 물었다. 일레이는 담배를 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 전투에서 귀환한 이후로 일레이는 종종 담배를 피웠다
“아, 신경 쓰고 있었어? 아직은 완전…… 아니, 잠깐만! 이건, 그래도!”
내 질문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챈 일레이가 당황했다. 녀석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한결 개운해진 나는 단말기를 꺼내 의무대를 호출했다. 곧 안드로이드가 도착할 터다.
* * *
나는 정기적으로 키누안을 방문했다. 오늘도 그는 차를 마시면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구시대적인 면모가 있는 사내다.
“이야, 드디어 우리 전쟁영웅께서 오셨군. 십자검 무공훈장을 받았다면서?”
키누안이 책을 덮으며 나를 반겼다. 그러나 저 말은 칭찬이 아니다. 그는 반제국적인 사람이다.
“개나 소나 받는 7급 무공훈장인데요. 교관님의 휘황찬란한 전공에 비하면 멀었죠.”
나는 앉으라는 말을 듣지도 않았지만 가까운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나와 키누안은 격식이 제법 사라진 사이였다. 상급자와 하급자보단 사제지간에 가까웠다.
“나도 자네 보고서를 읽어봤어. 아주 적극적으로 앞장섰더군. 훈장을 받을 만한 공적이었어. 흠흠, 과연 열성적이고 모범적인 군인이야.”
“오늘은 적극적으로 비꼬시네요. 아키에스 전투술을 실전에서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도 해볼 겸 해서요.”
반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간 이런 대규모 실전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능력을 확인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요새 지하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건 릴리안과 일레이 때문이다.
어쨌거나 진심과 거짓이 반반 섞인 내 행동은 남들에게 쉽게 의심을 사지 않았다. 내 성취욕이 남다르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자네 전투 기록을 보면…… 아키에스 전투술을 잘 사용했다는 게 보여. 하지만 본인의 개인 기량에 의존한 전투였네. 지휘관으론 결함이 있지. 부하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나?”
“아뇨. 다들 훌륭한 제국의 군인이었습니다. 낯선 소대장의 명령에도 사지에 뛰어들 자들이죠.”
내 말을 들은 키누안이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는 주전자를 꺼내 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러면 자넨 지휘관치고는 마음씨가 착했던 거로군.”
“네?”
나는 문득 떠오른 말이 있었다. 급박했던 상황에서 들은 말이라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지만, 일레이도 비슷한 어조로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루카. 소대원이 제법 많이 남아 있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역시 넌 사람이 착해.’
그 말의 의미가 지금 키누안과 같을 것 같았다.
“자네는 소대원을 소모할 바에 자신이 좀 더 리스크를 짊어지는 쪽을 택한 거지. 그래서 착하다고 말한 거네.”
“그게 전력의 손실이 없으니까요.”
내 생각을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소대원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전투를 지속했다.
“정말로 없다고 생각하나? 앞장서서 전투를 벌이면 신경계의 피로 누적으로 지휘관에게 중요한 판단력도 서서히 흐려지지. 자네는 아껴야 할 자원을 소대원을 지키려고 소모한 거네. 냉정하게 말해서 자네의 전투력과 판단력을 보존하는 게 소대원의 목숨 한둘보다 중요해. 그러다가 자네가 부상을 입거나 죽는다면? 그 손실은 소대원 전부를 합쳐도 감당하지 못하지.”
“그럼 제가 소대원을 소모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뛰어난 지휘관이라면 때론 부하를 소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
“……때가 되면 그렇게 할 겁니다.”
“전투 기록만 보면 자네의 소대는 지금보다 피해가 두 배는 더 나왔어야 해. 그 피해를 자네가 대신 받아낸 거지.”
솔직한 심정으론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누안은 내 속내를 읽었다는 듯이 가볍게 쿡쿡 웃었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이런 점이 굿보이다워서 마음에 들어.”
“다음부턴 부하를 적극적으로 소모하도록 하죠.”
나는 냉랭하게 답했다. 키누안은 빙긋 미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