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0)
배드 본 블러드-30화(30/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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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누안은 내 감시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키누안과 있는 시간이 편했다. 그도 내가 근위대장의 명을 받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여러모로 우린 미묘한 관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교류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러하다.
나는 부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키누안에게 질문을 꺼냈다.
“아, 저번에 근위대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부하를 다루는 법이라면 키누안 교관이 잘 안다고요.”
“헤일라스가? 하하, 날 지나치게 고평가하는군. 뭐, 조언이라면 못 해줄 것도 없지. 일단은 내가 자네의 스승역이니까.”
키누안이 기울인 머리를 손등에 기댔다. 그는 반대편 손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위이잉.
홀로그램 초상화가 떠올랐다. 두 명의 남녀가 보였다. 길다와 가브리엘이었다.
“길다와 가브리엘은 지금 하층 구역에서 자네의 협력자라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이지. 자네는 이 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네. 길다를 갱의 손에서 구해냈고, 가브리엘의 치료비를 대납했지. 이 두 명이라면 자네를 기꺼이 도와줄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키누안은 일찌감치 동료를 만드는 법을 내게 가르친 셈이었다.
“당연하죠. 제가 저들에게 해준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부족해.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저들은 자네를 배신할 거야. 정서적 교류하면서 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하지. 가족과 친구처럼 말이야.”
나는 의문이 들었다.
“가족과 친구처럼요?”
“그래, 때론 연인처럼 말이야. 그만큼 감정적으로 가까워야 자네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던지겠지. 그러나 자네만큼은 심리적으로 저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네.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지면 ‘소모’를 꺼리게 될 테니까.”
키누안이 강의하듯 말했다. 그 내용은 서늘했다.
“……내키진 않는군요.”
차라리 폭력과 공포로 사람을 다루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점은 이러하네. ‘사랑을 받되, 사랑하진 말 것.’ 그게 모든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비결이지.”
나는 내 안에 치미는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제국의 군인들은 명령만 하면 사지로 나갈 겁니다. 굳이 귀찮게 유대를 맺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키누안은 내 반론에도 웃기만 했다.
“앞으로 살면서 군인이 아닌 이를 휘하에 둬야 하는 일도 있을 거네. 제국의 모든 군인이 자네 말처럼 용맹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뜸을 들이던 키누안이 눈을 옅게 뜨며 손가락 깍지를 꼈다. 새어 나오는 안광이 시리다.
“……명령으로 부하를 소모하면 평판이 나빠져. 반감도 생기네. 그러나 부하가 자진해서 목숨을 소모한다면 미담이 되고 평판도 좋아지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면 군중심리에 휩싸인 이들은 자진해서 자네를 위해 기꺼이 소모될 거네. 거대한 흐름에 자아를 의탁한 인간은 하나뿐인 목숨을 쉽게 내던지곤 하지. 그럴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야.”
나는 침묵하며 골몰히 생각했다.
근위대장의 말이 맞았다. 키누안은 일개 근위대원이라기엔 사람을 부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집단의 장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활동한 듯한 말투였다.
근위대원은 종종 지휘관으로 활동하긴 한다. 하지만 키누안의 말은 좀 더 근본적인 부분에 닿아있었다. 야전 지휘관 몇 번 해본 정도로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아니었다.
나는 키누안을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내게 이런 것까지 말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제게 부족한 부분이군요.”
빈말로도 내 사교성이 좋다곤 말하기 힘들다. 오히려 배타적인 편이다. 조언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교관님.”
키누안이 말해보라는 듯이 내 말을 기다렸다.
“자신의 정신이 타인의 소모를 견디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예컨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따위로요.”
“익숙해져야겠지.”
키누안이 쉽게 말했다. 나는 끝까지 파고들었다.
“익숙해지지 못한다면요?”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명령할 자질이 부족한 거고. 애초에 남 위에 설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지.”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납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이며 사실이다.
* * *
제국에는 여러 교육기관이 있다. 모든 귀족이 군인이 아니듯, 교육기관에도 군사 훈련소만 있는 게 아니다.
그중 하나가 왕립 크라치아 아카데미다.
황제 폐하의 이름을 딴 교육기관이다. 제국의 중추가 될 엘리트 관료가 되려면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라고 근위대장 헤일라스 쿠스토리아가 말했다.
나는 지금 근위대장의 호출을 받고 서둘러 왔다. 크라치아 아카데미? 난 관심도 없고 내겐 알 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지금까지는 그랬다.
“네?”
이 말 한마디에서 내 당혹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언제 상급자에게 이런 반문을 한 적이 있던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파견이라는 말에 놀란 모양이로군, 루카.”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설명한 근위대장이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시겠지요.”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위대장은 내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기껏해야 두 달 파견이네. 자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
“저는 빠질 줄 알았습니다.”
“훈련 성적 순서로 보내는 게 그간 전통이네. 아, 일레이는 거부했지. 당분간 본가에서 쉬고 싶다고 하더군.”
“그럼 저도 거부하겠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근위대장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거부를 거절하겠네. 자네는 귀족 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어. 이번 일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봐야 해. 정말로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 될 의향이 있다면 말이야.”
여기까지 언급하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간단하다. 나는 지금부터 두 달 동안 왕립 아카데미의 학생이 된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근위대장의 명령이기도 했다.
훈련 4년 차에서 상위 성적의 근위대 생도 수어 명을 왕립 아카데미로 보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층 구역 출신인 나를 포함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제게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내가 절도있게 발을 모아 경례했다. 군인답지 않은 모습을 더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명령이 떨어졌다면 수행할 뿐이다.
“아, 그리고 루카.”
근위대장이 날 불러세우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안내인은 내가 따로 불렀네. 어디 보자, 짐을 챙겨 내일 13시 20분에 비행장으로 나가보게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안내인?’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 * *
다음날이다.
삑.
나는 단말기와 연동된 손목시계의 울림을 들었다.
현 시각은 정확히 13시 20분이다. 비행장 위로는 엔진음이 윙윙 퍼지고 있었다.
6인승 공중차량이 내 앞으로 착륙했다. 차량의 외장은 검은색이었고 테두리를 따라 조명이 있었는데 붉은빛 멋스럽게 반짝였다. 옆면의 희미한 이음새가 벌어지더니 날개형 문이 위로 열렸다.
나는 가만히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좌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냉장고와 디스플레이 따위가 있었고, 바닥은 회색 직물 시트가 깔려 있어서 차분한 느낌이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그녀는 안쪽에 앉아있어서 바깥에선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뭐, 일단 근위대장님의 명령으로 온 차량과 사람이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모든 게 고급이었다. 발에 닿은 시트가 푹신했다. 6인승 규격인 공중차량이지만, 실제 내부는 편의시설 때문에 4인승이었다.
“근위대 생도, 루카입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말했다.
“댁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니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였다. 아마 싸가지가 없다는 이유로 맞아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귀족인 게 틀림없으리라.
나는 여자를 관찰했다. 뚫어져라 쳐다본 건 아니다. 눈을 흘깃 굴리는 정도면 충분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가?’
호흡이나 분위기로 봐선 전신의체가 아니었다. 귀족 대다수는 성인이 되면 전신의체를 쓴다. 전신의체가 아닌 귀족은 미성년이거나 별종이다.
눈앞의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제대로 자기소개를 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우울증이라도 걸릴 것 같은 어두운 파랑이었다. 조명에 따라선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위대장님의 명으로 왔습니다. 목적지는 크라치아 아카데미입니까?”
“잘 알고 있네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흠, 나도 인내심이 증발하는 걸 느꼈다.
“알겠습니다, 쿠스토리아 가의 아가씨.”
여자가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쳐다봤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찌푸렸다.
“어떻게 알아낸 거죠?”
“간단한 추론입니다. 당신이 단순한 심부름꾼이나 쿠스토리아의 가신이라면, 아무리 속으로 못마땅해도 근위대장 헤일라스 쿠스토리아의 명령을 받아놓고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쿠스토리아 가문의 귀족이라는 소리죠.”
여자는 내 설명을 듣고도 못마땅한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미리 제 신원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요?”
“궁금하시면 ‘아버님’에게 물어보시죠.”
나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쿠스토리아 가문원이라도…… 방계나 말단이라면 근위대장의 명령에 저런 시건방진 태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직계거나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눈앞의 여자는 근위대장의 딸일 것이다. 내 추측이 틀렸다면, 잠깐 쪽팔린 것으로 끝나면 그만이다.
다행히 도박은 성공했다. 여자는 내 재주에 흥미가 갔는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지젤 쿠스토리아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당신의 안내인 역할을 하러 왔죠.”
나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딸을 내 안내인으로 보낼 이유는 하등 없었다. 실제로도 지젤은 자신이 왜 내 안내인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짜증만 내고 있었다.
지금 상황 자체가 근위대장이 날 각별하게 취급한다는 뜻이었다.
‘루카 쿠스토리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통찰력이 나름 괜찮네요. 하지만 다신 제 머리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기분이 나쁘니까요.”
지젤이 다시 차가운 태도를 고수했다. 호의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문득 릴리안 라모네스가 떠올렸다. 지젤에 비하면 릴리안은 첫 태도부터 괜찮은 여자였다. 적어도 나를 무시하진 않았으니까.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
나는 말하다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눈앞의 여자는 민간인이다. 내 상관도 아니다. 내가 굽실거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정도로 참았으면 근위대장도 이해할 터다.
“……뭐, 관두죠. 절 싫어하는 사람한테 아부할 바에 혀 깨물고 뒤지겠습니다. 각자 명령받은 것만 합시다. 그쪽은 절 안내하고, 저는 따라가고요. 이제 됐습니까?”
지젤은 내 발언에 놀란 듯했다. 그녀가 한참이나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곧 그녀는 분한 듯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거참, 콧대를 부러뜨리고 싶은 아가씨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말이다. 그럴 기회가 언젠가는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이나 내다봤다. 어느덧 근위대 훈련소가 멀어졌다. 그리고 그만치 크라치아 아카데미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