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1)
배드 본 블러드-31화(31/197)
031
나는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모여드는 시선을 느꼈다. 비행장 주변을 오가는 학생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의문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나와 지젤 쿠스토리아가 같이 내리는 걸 보고 의아해하고 있군.’
쿠스타리아 가문은 제국의 명가 중 하나다. 가주의 딸인 지젤도 아카데미 내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인물일 터다.
“아카데미 학생의 식별 색상은 보라색입니다, 채도는 낮게.”
앞서가던 지젤이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는 단말기를 몇 번 두드렸다.
치지직.
지젤의 외투에서 전류가 잠깐 흘렀다. 전기변색 기능이 작동하면서 지젤의 옷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지만 색상은 일관된 보라색이었다.
“흠, 색깔이 멋지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근위대 생도복은 담백한 회색이다.
“변색 기능도 없어요?”
이 아가씨는 변색 기능이 아무 옷에나 다 달린 줄 아는 모양이다.
“생도에겐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 정도 준비도 안 하고 올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 공허한 말에 지젤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꽤 재밌었다.
아무리 자존심 강한 아가씨라도 대단한 아버지에게 직접 대들진 못할 터다. 그러니까 온갖 짜증을 내면서도 내 안내인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겠지.
“따라와요. 당분간 머물 기숙사까지 안내해 줄 테니까요.”
나는 지젤을 따라가며 아카데미 내부를 관찰했다.
‘크라치아 아카데미…….’
새삼 좋은 출신의 인물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는 게 느껴졌다. 삭막한 훈련소와 달리 조경이 잘 돼 있었다. 정원을 지나치자 우뚝 솟아있는 초대 황제의 조각상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찬양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제국의 황제, 건국의 아버지, 인류의 수호자, 디노 크라치아를 찬양하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고급 의체를 쓰고 있었다. 고출력이라서 고급인 게 아니었다. 만듦새가 뛰어난 명품 의체였다. 공장제가 아니라 모델명조차 잡히지 않는 수제 의체도 보였다. 저건 얼마나 비쌀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귀족 학생들의 의체에선 기계 특유의 잡스러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인공 피부는 땀샘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구현되어 있었고, 상의를 벗고 운동하는 학생의 어깨에선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동장을 지나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도 나를 보았다.
“아, 루카!”
그는 나처럼 파견된 근위대 생도였다. 이름은 펠릭스 아이겐이다. 아이겐 가문도 대단한 명가였다. 그래서인지 아카데미에도 아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지인에게 둘러싸여 있던 펠릭스가 내게 다가왔다. 나와 이야기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지젤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서서 대기했다. 그녀도 펠릭스 아이겐의 신분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와 나의 대화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지젤 쿠스토리아,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펠릭스 아이겐입니다. 루카와 같은 기수의 근위대 생도죠. 잠시 루카와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펠릭스가 한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의 점잖은 태도에 지젤도 똑같이 예의를 갖췄다.
지젤은 나와 펠릭스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며 거리를 두었다. 나도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쿠스토리아 가의 아가씨가 네 옆에 붙다니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말도 마. 차라리 혼자 오는 게 낫다 싶을 정도야. 그런데 무슨 소문?”
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물어봤다.
“근위대장님이 널 특별 대우한다는 것. 이젠 아예 대놓고 편애하는군. 자신의 딸을 네 곁에 붙일 정도니까.”
“대장님의 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왈가닥이야. 초면부터 날 무시하더라고. 밖이라면 벌써 코를 부러뜨렸어.”
내 툴툴거림에 펠릭스가 크게 웃었다. 나와 그가 각별하게 친한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린 생도 생활을 3년이나 같이 했다. 온갖 고생을 하며 때론 목숨조차 서로에게 맡겼다. 그러다 보니 같은 기수의 생도는 출신 성분과 무관하게 허물없이 지낼 수 있다.
“네가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파견 올 줄은 몰랐어. 여긴 근위대 훈련소와 달라서 너에겐 껄끄러운 상황이 많이 생길 거야. 지젤만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는 게 아니겠지.”
펠릭스가 내 출신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충분히 할 만한 충고였다. 악의나 경멸이 아니라 순수한 선의다. 동기 중에서 출신으로 나를 무시하는 녀석은 없으니까.
하지만 크라치아 아카데미에선 내 출신을 가지고 업신여기는 머저리가 많을 터다. 나도 예상한 바다.
“나도 오긴 싫었지만 명령이었거든.”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지. 널 굳이 보낸 게 이상하긴 해.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면 납득할 순 있어. 근위대장님은 네가 귀족 사회를 조금이라도 봤으면 하는 거지. 장래를 위해서 말이야. 결국, 훗날 너와 어울릴 사람은 귀족들이니까.”
펠릭스의 통찰은 날카로웠다. 대부분 정답이었다. 근위대장은 나를 귀족 사회에 적응시킬 생각이다.
“하하, 아니면 내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걸 근위대장님이 보고 싶으셨을 수도 있지.”
나는 웃어넘기려고 했다. 펠릭스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웃기고 있네. 아무리 근위대장님이라도 자신의 딸은 아끼겠지. 지젤 쿠스토리아가 네 곁에 붙었잖아. 어쩌면 데릴사위로 널 데려가려는 걸지도 모르지.”
펠릭스의 추론은 거의 사실에 근접하고 있었다. 나와 근위대장 사이에는 밀약이 있다. 키누안을 감시하는 대가로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에 편입된다.
‘다만, 데릴사위가 아닌 양자로…….’
데릴사위를 가정 해보자면, 나도 지젤 같은 여자는 질색이다. 내 성격도 좋은 편이 아닌데, 배우자마저 성격이 더러우면 어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루카, 그러면 너는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가는 건가?”
펠릭스가 다소 걱정스레 물었다.
“기숙사로 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생겨?”
“그건 아니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숙사 말고, 파견 나온 동안은 나와 같이 지내도 돼. 아크바란에는 내 집도 있고 통학용 공중차량도 있으니까.”
나는 펠릭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음, 기숙사는 가난뱅이가 사는 곳이군.”
“그래, 무늬만 귀족인 녀석들과 하층 출신이 머물지. 그래서 다른 학생들도 기숙사를 좋은 시선으로 보진 않아.”
나는 지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펠릭스도 오래 이야기했다. 안내인이라는 지젤보다 펠릭스가 더 알짜배기 정보를 제공했다.
어차피 나도 지젤에게 잘 보일 생각은 없었다. 펠릭스가 있는 이상에야 그녀도 함부로 대화를 끊지 못할 것이다.
기숙사에 대해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나처럼 재능을 인정받은 하층 출신과 몰락한 가문의 자제가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들의 경제력으론 상층 구역에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니까.
나는 턱을 괴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마워. 하지만 오히려 오기가 생기는군. 근위대장님도 내가 아카데미에서 편하게 지내는 걸 기대한 게 아닐 거야.”
“거절할 거라 생각했어. 네게 점수라도 따보려고 말해본 거야.”
펠릭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를 비롯해 동기들은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펠릭스와 몇 가지 이야기를 더하다가 자리를 뜨려고 했다. 펠릭스는 아카데미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아낌없이 내게 베풀었다. 아마도 이번 파견이 끝나면 그와 많이 친해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루카, 너 그쪽은 개조했어?”
나는 펠릭스의 시선을 느꼈다. 나도 그를 따라 내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여기? 아니, 아직.”
나는 팔다리와 오른쪽 눈, 그리고 고관절의 일부만 의체다. 펠릭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품을 뒤적였다.
“파견 나온 생도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거든.”
펠릭스가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놓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눈동자만 내려서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피임도구였다.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 * *
크라치아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정갈한 흰색 건축물이었다. 높이는 4층이었으나 옆으로 길게 뻗어있어서 언뜻 보이는 창문만 백여 개가 넘었다. 건물의 외견만 보면 몰락 귀족과 하층민이 거주한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기야 크라치아 아카데미는 제국 최상위 교육기관 중 하나다.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기숙사장과 안드로이드의 안내를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제 단말기 고유번호입니다.”
지젤이 단말기 화면을 내보이며 말했다.
“번호를 교환하자고요? 저를 싫어하지 않나요?”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아버지께 받은 임무를 모른 척할 생각은 없어요.”
지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감은 있는 듯했다. 여기서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올랐다. 물론 호수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정도다.
“어지간하면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지만요.”
내가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진심이다.
“저도 그러길 바라요.”
지젤이 그 말을 끝으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나는 지젤에겐 신경 끄고, 내가 앞으로 두 달 동안 머물 기숙사를 올려다봤다. 내부로 들어가자 안드로이드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기숙사는 외견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했다. 층마다 안드로이드가 배치되어 있어서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고 있었다.
-루카 님께서 배정받은 방입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아니, 됐어. 이 정도면 궁궐이 따로 없지.”
나는 안드로이드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몰락 귀족과 하층민이 사는 곳이 맞아?’
처음 들어오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내가 쓰던 방보다 두 배는 넓었다. 바깥이 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었고, 그 밑으론 4인용 소파가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소파 맞은편에는 벽면을 통째로 쓰는 디스플레이도 보였다.
“최고는 달라도 다르군, 그래.”
아카데미는 제국에도 여럿 있다. 그중 최고는 당연히 황제의 이름을 빌린 크라치아 아카데미다.
‘군인으로 적합하지 않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오는 곳.’
나와 다른 방면으로 뛰어난 이레귤러가 여기로 온다. 솔직히 조금 기대되는 건 사실이다. 어쩌면 통하는 게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내 일정이 비어있었다. 안드로이드의 말에 따르면,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장이 날 찾아온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머리나 비워둘 생각이었다.
스륵.
나는 바닥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을 자지 않아도 명상을 하면 뇌와 신경계의 회복이 빨라진다. 의식 각성에 시간이 필요한 수면과 달리 명상 직후에는 극도의 집중력을 바로 발휘할 수 있다.
뇌 신경계의 피로가 빨리 누적되는 고성능 의체를 다루려면 정신수양도 필요한 셈이다.
명상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다.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나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니 기숙사장이 방문할 시간이었다.
나는 상대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문 앞에 섰다. 센서가 날 인식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아, 아아…… 안, 안녕하세요! 기, 기숙사장입니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여자가 당황하며 말했다.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음, 루카입니다. 파견 나온 근위대 생도죠.”
나는 말하면서 여자를 관찰했다. 보라색 배색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소매나 옷깃이 무척이나 낡아 있었다. 무엇보다 팔다리는 의체가 아닌 생체였다. 사이버네틱 파츠나 임플란트의 흔적이 없었다.
‘귀족은 아니로군.’
그녀의 말투에는 귀족 특유의 딱딱함이나 고상함이 없었다.
“반, 반가워요, 루카 씨. 저는 바바라예요.”
역시 성이 없었다. 하층민이라고 모두 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성이 없으면 하층민인 건 확실하다. 간혹 이름이 겹쳐서 헷갈리면 스스로 마음에 드는 성을 붙이기도 한다.
“긴장할 건 없습니다. 저도 하층 구역 출신이니까요.”
“아, 그 소문이 사실이군요. 대단하시네요. 하층 구역에서 근위대 생도까지 올라오시다니요.”
인정받는 건 언제라도 기분이 좋지.
“편하게 루카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하층 구역에서 출세한 건 저만이 아니죠. 바바라도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에 들어왔잖아요. 거기다가 기숙사장이면 출세한 거죠.”
내가 공치사를 하듯 말했다. 바바라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웃었다.
나는 바바라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저 같은 하층민 출신이라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바바라도 나처럼 엄청난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바바라를 좋게 보고 있었다.
바바라는 눈을 감으며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며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따라오세요, 루카. 지금부터 기숙사에 대해 설명할게요. 거절은 안 돼요! 기숙사장의 의무거든요.”
재치있게 보이려고 미리 준비한 대사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바라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바바라의 뒤를 따라가자 화사한 적금발의 머리카락에서 막 샤워한 듯이 좋은 냄새가 났다. 실제로도 물기가 머릿결에 남아 있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수업을 막 끝냈을 텐데 씻고 왔군. 시간이 빠듯했을 텐데…….’
아키에스 빅티마로 단련된 내 직감이 저절로 작동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바바라가 부지런한 성격이라면 설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