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2)
배드 본 블러드-32화(32/197)
032
근위대 생도의 아카데미 파견은 제국 초창기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이었다. 근위대 생도만이 아니라 각종 교육기관에선 인재를 차출해 비슷한 방식으로 상호교류를 했다.
지금은 생도나 학생 신분이지만, 뛰어난 인재는 언젠가 제국의 상층부에서 마주하게 된다. 파견은 일종의 사교 행사이기도 했다.
“다들 관심이 많아요. 파견 생도 중에서 이레귤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아,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죠.”
바바라가 기숙사의 시설을 안내하며 말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시설은 체력단련실과 사이버네틱 정비실이었다.
‘근위대 훈련소에 비하면 간이 시설 수준이네.’
당연하게도 크라치아 아카데미는 본격적인 전투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은 내가 있던 훈련소보다 미흡했다.
“그 관심이라는 게 좋은 의미만 있는 건 아니겠죠.”
“……그, 그렇겠죠.”
바바라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조금 대하기 어렵군.’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의 공격적이고 딱딱한 태도나 언사에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바바라는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무심히 던진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바바라는 자력으로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의 인재다.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 나는 그녀의 소심한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느낀 바로는 바바라는 내 기대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하층 구역에 널린 패배자들처럼 무기력한 분위기였다.
‘뭐, 여러 부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니까.’
안내하던 바바라는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옥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여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머리를 식히기 좋아서요.”
해가 져서 바깥은 어둑했다. 기숙사 옥상에선 저 멀리 하층 구역의 불빛이 별의 바다처럼 보였다. 밑바닥의 혼란한 빛조차 멀리서 보니 제법 아름다웠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침묵했다. 이런 말랑말랑한 대화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바바라는 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간까지 걸어가더니 손가락을 길게 뻗었다.
“날이 좋은 날이면 여기서 제가 살던 동네가 보여요.”
바바라가 아련한 눈으로 하층 구역의 빛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아무튼, 옥상은 항상 열려있으니까 언제든 올라오시면 돼요.”
내 침묵을 알아챈 바바라가 말했다. 나와 그녀는 아래층으로 돌아왔다.
복도에는 다른 학생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바바라를 흘깃 보면서 지나갔다.
툭.
나는 눈을 깜빡이며 옆을 쳐다봤다. 마주 오던 남학생이 바바라와 어깨를 부딪쳤다.
‘고의로군.’
부주의로 인한 실수가 아니다. 남학생은 의도적으로 바바라를 밀쳤다. 그 남학생은 적반하장으로 바바라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해, 바바라.”
“미, 미안해요.”
나는 기이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잘못은 남학생이 했는데 사과하는 사람은 바바라였다.
명백하게 바바라를 무시하는 언행이었다. 내게 저따위로 굴었다면 얼굴이 벽에 갈렸을 것이다.
남학생이 지나가자 바바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바라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괜, 괜찮아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저 남자가 아니라 당신의 행동입니다, 바바라.”
“네?”
나는 내 방문 앞에 섰다. 센서가 잠시 빛나더니 문이 열렸다.
“우리가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이유는 납작 엎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들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살기 위해서죠.”
내 말에는 경멸이 담겨 있을 터다. 바바라는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바바라를 놔둔 채로 방으로 들어갔다.
치익.
문이 닫혔다.
* * *
나는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시간을 채우고 훈련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몸이 녹슬 것만 같았다.
“커리큘럼이 정해졌으니까, 이대로 수업을 들으면 돼요. 옷은 이걸 입고요.”
아침부터 날 찾아온 지젤이 말했다. 나는 부스스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젤 쿠스토리아, 태도는 불량해도 맡은 일을 하긴 하는군.’
나는 지젤이 내려놓은 옷가지를 끌어당겼다. 빳빳하면서도 감촉이 부드러운 셔츠였다. 소매에 달린 단추가 전기변색을 조절하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했다.
스륵.
나는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서 소파에 내던졌다. 지젤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제가 나간 다음에 입으면 어디 덧나나요?”
“사이즈가 안 맞으면 교환해야 하잖아요. 있을 때 입어봐야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셔츠를 입었다. 안 맞을 리가 없다. 지젤은 나에 대한 각종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변색 기능을 조작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 제가 설정을…….”
지젤이 말하다가 내 행동을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소매의 단추는 세 개였다. 각각 색상, 채도, 명도를 조절하는 용도다. 매만져보니 역할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채도가 낮은 보라색.’
나는 소매의 단추를 매만졌다.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몇 번 조작해보니 금방 손에 익었다.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가 싶더니 셔츠가 차분한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조금 거만한 말이지만, 나는 학습 능력이 뛰어났다.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힌 이후로는 특유의 통찰력까지 더해져서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옷을 입은 나는 단말기로 커리큘럼을 확인했다. 전투와 체육 분야의 수업은 없었다. ‘제국의 역사’, ‘7대 기업사’, ‘영생과 불멸’, ‘사교 행사의 기초’ 등등, 더 읊다간 잠들 것 같았다.
“……바꿀 순 없나요?”
“아버지가 직접 정한 거예요.”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근위대장의 명령이라면 토를 달 순 없었다.
“그럼 통보할 건 이걸로 끝입니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씻고 나오세요. 일주일은 저도 수업을 같이 들을 테니까요. 이것도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지젤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어떤 감정 소모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내 시건방진 태도를 보고 지젤은 밤새 여러 생각을 했을 터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지젤의 결론이로군.’
나를 싫어하더라도 어차피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 아버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닐 테니까.
내 입장에서도 이게 나았다. 지젤이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한다면, 나도 빈정거릴 생각은 없었다.
샤워를 마친 나는 방을 나섰다. 아침 수업을 위해 본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낯선 인물인 내게 이목이 금방 쏠렸다.
‘내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관망 중인 건가.’
학생들은 내게 접근하지도 않았고 적대하지도 않았다. 나와 친해지는 게 이득일지 아닐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겠지.
‘그래서 근위대장이 지젤을 내 곁에 계속 붙여둔 거지.’
근위대장 헤일라스 쿠스토리아가 나를 총애하고 인정한다는 증거가 지젤이었다.
바꿔서 생각하면 지젤이 짜증 낼 만도 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귀족 아가씨가 하층 구역 출신인 날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 역할이나 하고 있으니까.
“아, 루, 루카.”
때마침 내게 말을 건 사람은 바바라였다. 그녀도 수업에 가는 중이었다.
어젯밤, 나는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를 매몰차게 비난했었다. 그런데도 용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나는 말없이 바바라를 응시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기숙사에서 보낸 첫날 밤은 괜찮았나요?”
“어디서도 깊게 잘 수 있게 훈련받았으니까요.”
“근, 근위대에선 그런 훈련도 받는군요. 대단해요.”
내게 아부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지금 바바라는 발로 걷어차이고도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보였다.
내 냉담한 답변에도 바바라는 꾸준히 말을 걸었다.
기숙사 정문을 나가자마자, 지젤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내게 시선을 두다가 바바라를 확인하고선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눈앞에서 꺼져, 바바라.”
지젤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바바라는 잔뜩 위축된 표정으로 내 등 뒤에 숨었다.
지젤과 바바라는 모종의 인연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지젤은 내게 그러하듯 바바라에게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는 지젤과 바바라 사이를 중재할 생각이 없었다. 옆으로 물러나며 지젤과 바바라가 대면하게 놔뒀다.
“오, 오랜만이에요, 지젤.”
“방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었어?”
“지젤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어요. 항상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바바라가 아침부터 내게 들러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지젤에게 접근하려고 나를 이용했다.
지젤은 나를 힐끗 보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녕, 바바라. 그리고 잘 가. 이제 됐어? 빨리 따라오세요, 루카. 첫 수업부터 늦으면 안 되니까요.”
나는 바바라를 놔두고 지젤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바라는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향해 손만 흔들고 있었다.
“바바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난 두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얼굴만 아는 정도에요. 비슷한 시기에 입학했으니까요.”
지젤이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바바라를 싫어하는군요.”
내 말이 도화선이 된 듯했다. 지젤이 우뚝 서더니 나를 노려봤다.
“루카, 당신을 위해 처음으로 호의를 담아 충고하는 건데요. 저 여자를 가까이하지 마세요.”
“어째서죠?”
“크라치아 아카데미, 최악의 사이코니까요.”
내가 히쭉 웃었다. 지젤의 말을 듣자마자 호기심을 넘어 강렬한 흥미가 생겼다.
지젤은 바바라에 대한 언급을 더는 하지 않았다. 바바라의 이름만 꺼내도 지긋지긋한 듯했다.
‘지젤의 입에서 바바라에 대한 정보를 끌어낼 순 없겠지.’
크라치아 아카데미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없다. 같이 파견 나온 생도가 2명 더 있지만, 그들도 아카데미 내부 사정은 잘 모를 것이다.
본관이 가까워지자 오가는 학생들이 늘었다. 그들은 모두 보라색 배색이 섞인 옷을 입고 있었다.
본관의 복도는 차량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수십여 명의 학생이 복도를 오가는데도 여유가 있어 널찍했다.
나는 학생들의 시선과 대화를 간간이 들었다. 다들 지젤 쿠스토리아와 같이 있는 내게 의문을 품고 수군수군했다. 나와 지젤의 관계를 추측하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하층민 출신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어지간히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세상에는 바보가 있는 법이다. 하층 구역에서도 나 같은 놈이 나오듯이 귀족 중에서도 머저리가 있다.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나와 지젤은 떨어졌다. 그녀는 식사까지는 나와 같이하지 않았다.
나도 한시름 놓았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식사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본관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바 형태의 간이식을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너, 이름이 루카였던가? 근위대 생도?”
한 남학생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용건이라도?”
나는 입안의 음식물을 삼키며 말했다. 간이식만큼이나 딱딱한 내 태도에 남학생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넌 지젤 쿠스토리아 양과 무슨 관계지?”
그는 하인을 부리듯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너 내가 누군지 알…….”
너무나 뻔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림을 그린 듯한 멍청이다.
“자기소개를 해줘야 알지. 나는 근위대 생도 루카다.”
내가 앉은 채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남학생은 엉겁결에 내 악수를 받았다.
“어, 나, 나는 엔리코 라간.”
“이야기할 거면 앉아. 먹을래?”
나는 주머니에서 바 형태의 간이식을 꺼내서 건넸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엔리코는 머뭇거리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는 간이식을 한 입 깨물더니 눈을 찡그렸다.
“끔찍한 맛이네. 모래로 만든 초콜릿 같군.”
“군식이 다 그렇지, 뭐. 그래, 나와 지젤의 관계가 궁금하다고? 왜? 지젤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내가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다.
툭.
엔리코가 간이식을 떨어뜨렸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안 거지?”
나도 어이가 없었다. 진짜인 거냐, 그런 여자에게 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