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3)
배드 본 블러드-33화(33/197)
033
엔리코 라간은 당연하게도 귀족이다. 고생 따윈 모르고 자란 듯이 어리벙벙한 녀석이었다. 그는 꼬불꼬불한 갈색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젤과 너는 정략결혼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거지?”
내 설명을 들은 엔리코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히려 지젤은 날 싫어하는 편에 가깝지. 사이가 좋았다면 내가 이렇게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겠어?”
엔리코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게. 아무리 능력주의를 신봉하더라도, 쿠스토리아 정도 되는 명가가 하층 출신을 가족으로 받을 리가 없지. 괜히 오해했네. 음, 음.”
잘도 내 앞에서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있다. 하지만 화조차 나지 않았다. 엔리코의 말에는 악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쉬듯이 당연하게 하층 구역을 무시하고 있었다.
많은 귀족이 엔리코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것이다. 심지어 내 동기 생도들조차 마찬가지다. 내 동기도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귀족이 대다수다. 그들은 나만 특별하게 대등한 존재로 인정할 뿐이다.
새삼스러운 현실이다. 그간 훈련소에서만 지내서 출신의 차이를 내심 가벼이 여기고 있었다.
“엔리코, 나는 내 시간을 써가며 네 물음에 답했어. 너도 내 의문에 대답해 줘야겠다.”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음, 뭐, 나도 바쁜 건 아니니까. 물어봐도 돼.”
엔리코는 내 요구와 태도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자신이 대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지젤의 성격은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건가?”
엔리코는 지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니까 말이다.
“말조심해. 감히 누구에게…….”
엔리코가 내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나는 그의 말을 전부 듣지 않았다.
“무의미한 위협은 관둬. 넌 내게 상해를 가할 능력도 없고,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까. 하지만 난 널 죽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겠지.”
내가 차분히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한 엔리코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자리를 뜨려 했다.
덥썩!
나는 손을 뻗어서 엔리코의 팔을 잡아당겼다. 반쯤 일어섰던 엔리코가 넘어지듯 벤치에 끌려왔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자리에서 널 반쯤 죽여놔도 난 근신이나 감봉 정도의 징계만 받을 거야. 날 하층 구역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못하지. 제국은 내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거든. 거기다가 내 훈련 성적은 우수해. 얼마 전에는 무공훈장까지 받았고.”
“……지금 나, 날 협박하는 거야?”
엔리코의 얼굴에 두려움이 드리웠다.
“한 번만 더 멋대로 일어서려고 한다면, 그 비싼 다리부터 작살 내주지. 농담인지 아닌지 시험해보고 싶다면 해봐.”
내가 엔리코의 팔을 놓았다. 엔리코는 일어서지 않았다.
“하층 구역 출신답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군.”
엔리코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반항을 내뱉었다. 이 정도는 나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야만적인 내게 잘 설명해달라고, 도련님.”
내가 농을 던지듯 말했다. 여기서 더 세게 나간다면 엔리코는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어설 것이다.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진심으로 엔리코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말뿐인 협박이다.
엔리코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지젤은 조금 차가운 편이긴 해. 그게 매력이기도 하지.”
“조금이라고?”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쿠스토리아 가문이잖아. 그것도 현 근위대장의 딸. 어떻게든 안면을 트고 친해지고 싶어서 아부 떠는 이들이 수두룩해. 배타적인 성격일 될 수밖에 없지. 어찌 보면 불쌍한 거야.”
엔리코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려니 했다.
“지젤은 됐고. 그러면 바바라에 대해선 알아?”
“마녀 바바라?”
대답이 특이했다. 엔리코가 말한 바바라가 내가 아는 바바라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기숙사장 바바라를 말하는 거야.”
“그게 그거지. 그 애의 별명이 마녀야. 아카데미 내에서 그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
“기숙사장인데?”
“기숙사장은 누구도 하기 싫어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귀찮은 일만 가득하거든. 기숙사의 몸종이나 마찬가지야.”
“……능력을 인정받아서 기숙사장을 하는 게 아니었군.”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바바라는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였다. 그것도 아카데미 전체에서.
“이제 바바라가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가 궁금하지?”
엔리코도 긴장이 풀렸는지 싱긋 웃었다.
“마녀답게 다른 사람에게 저주라도 내리는 건가?”
“후후, 그것과 비슷해. 너 혹시 안드로이드 AI의 오작동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엔리코가 으스스한 표정을 지었다.
“엄청 낮은 확률이라는 것만 알지.”
“0.8 퍼센트야. 그것도 대부분은 가벼운 오작동이고, 폭주까지 가지도 않지.”
AI 오작동으로 인해 안드로이드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면 폭주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이르면 폐기 말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간혹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이 제국 여기저기서 일어나곤 한다. 나도 폭주한 안드로이드를 처분한 적이 있다. 생도의 임무 중에선 간단한 축에 속했다.
“그래서?”
“바바라와 친하게 지낸 사람은 항상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에 휘말렸거든. 지난 3년 동안 다섯 건의 상해 사건이 터졌지. 우린 그걸 바바라의 저주라고 불러.”
나도 조금 놀랐다. 내 표정을 본 엔리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확실히…… 확률상 말도 안 되는군.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야.”
“누가 봐도 그렇지? 그런데 그 어떤 조작의 흔적과 증거도 찾지 못했어. 연관성이라곤 피해자 전원이 바바라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는 것밖에 없었지.”
내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게 바바라의 잘못은 아니잖아.”
“그 여자가 기분 나쁜 게 바로 그 때문이야! 자신과 친하게 지낸 사람이 화를 입는다는 걸 알면서도 남에게 계속 들러붙거든. 그래서 다들 모질 게 대하고 있어. 그리고…….”
엔리코가 말꼬리를 끌며 뜸을 들였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제법 있군. 나는 참다못해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리고?”
“어쩌면 바바라가 안드로이드 폭주를 조작했다는 소문도 있거든.”
“무슨 수로?”
“바바라는 공학 쪽으로 재능을 인정받아 특례 입학이야. 인공지능 쪽으로 말이지. 그렇다고 증거조차 남기지 않고 안드로이드를 조작했다는 건 나도 너무 나갔다고 생각해. 굳이 그럴 이유도 없잖아? 무엇보다 바바라에게 그 정도 실력이 있을 리가 없지.”
나도 바바라가 안드로이드를 조작했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바바라가 안드로이드 오작동을 인위적으로 일으켰다면? 그리고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만 공격한다?’
하층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보복하는 거라면 몰라도, 자신과 친한 이를 공격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어지간히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마자, 나는 지젤의 말을 떠올렸다.
‘크라치아 아카데미 최악의 사이코.’
바바라를 지칭한 말이었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슬슬 궁금하다.
“어쨌든 그게 바바라가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야. 자신과 친해지면 화를 입는 걸 알면서도 친구를 계속 만들려고 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나라면 퇴교하거나 혼자서 조용히 생활했을 거야.”
정보를 정리한 나는 마지막 궁금증을 꺼냈다.
“지젤과 바바라는 어떤 관계지?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지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신나서 이야기하던 엔리코가 머뭇거렸다.
“지젤에게 엔리코가 친절하고 좋은 남자였다고 말해줄게. 내 말이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말에 엔리코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저주의 두 번째 희생자가 지젤이었어. 쿠스토리아 가문의 아가씨가 공격을 당했으니 당연히 난리가 났지. 그런데도 인위적인 조작의 증거는 찾지 못했어. 부상을 입은 지젤은 한 달 뒤에나 아카데미로 돌아왔고.”
나는 여러 의미로 놀랐다.
“친한 사이만 공격당한다면서? 지젤과 바바라가 친했다고?”
“꽤 절친한 사이였어. 지젤도 일단은 공학자 지망이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저 멀리서 지젤이 걸어오고 있었다.
엔리코도 지젤을 보더니 도망치듯 곧장 일어서려 했다.
“지젤과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래? 좋아한다면서?”
“나, 나는 아직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루카, 약속은 잊지 마.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줘.”
엔리코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
어느새 내 앞까지 걸어온 지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도 엔리코와 내가 같이 있는 걸 봤을 것이다.
“벌써 친구가 생겼나 보군요.”
“아, 뭐, 그렇게 됐습니다. 엔리코 라간은 친절하고 좋은 녀석이더라고요.”
나는 엔리코의 당부가 떠올라 칭찬을 빼먹지 않았다.
“……그런가요? 솔직히 기분 나쁜 사람이에요. 제 주변을 항상 맴도는 느낌이거든요.”
지젤이 어깨를 살짝 떨며 말했다.
미안하다, 엔리코. 네겐 가망이 없을 것 같다.
* * *
바바라의 저주는 내 흥미를 잡아끌었다. 나도 내가 이런 가십거리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그만큼 아카데미 생활은 내게 무료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수가 곧 죽음인 생활을 보내다가 이러고 있으니 자극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다가 전투 감각도 녹슬겠네.’
일주일이나 수업만 들으며 책상머리에 앉아있으니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참다못해 동기인 펠릭스를 찾아갔다. 그는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어울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펠릭스, 한 판 붙자.”
내 제안에 펠릭스는 살짝 놀라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루카, 난 내가 지는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특히 여자들한테는 더욱더. 넌 나보다 강하잖아.”
펠릭스가 속삭이며 거절했다. 이러니까 나도 더는 보챌 수 없었다.
‘싸우고 싶다.’
미친 소리 같지만 이게 내 기분이었다. 누구라도 내게 시비를 걸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람의 꼴을 한 전쟁 병기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생도 생활 내내에 합성약물을 주기적으로 투여받아 호르몬 수용체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선 체감하지 못했다. 거기선 어떤 방식으로든 공격성을 해소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나는 생도 중에서도 공격성이 높은 편이었다. 인내심의 한계가 빨리 오는 것도 당연하다.
‘한심한 꼴이네, 루카.’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려고 집중했다. 욕구불만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휘리리릭!
나는 주머니칼을 내 얼굴로 떨어지게 위로 던졌다. 그리고 회전하는 칼을 쳐다보다가 눈앞 직전에서 칼끝을 낚아챘다. 이걸 걸어가며 반복했다.
‘미친놈이 따로 없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가 갑자기 내 관자놀이에 총구라도 들이대면 좋겠다. 자극이 한참이나 부족했다.
‘나라고 항상 공격성이 극한까지 유지되는 건 아니야. 전투와 훈련이 한동안 없다는 걸 뇌가 인식하면 호르몬 수치가 적절한 수준까지 조절되겠지.’
따지고 보면 일종의 중독 증상이었다. 힘든 고비만 버티면 편안해질 것이다.
우뚝.
기숙사로 가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바바라가 기숙사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앞에는 여학생 세 명이 서 있었다.
“아, 미안하게 됐어, 바바라. 옷은 내가 세탁해 줄 테니까 여기서 벗어.”
빈 컵을 든 여학생이 말했다. 끈적거리는 노란색 음료가 바바라의 머리카락부터 상의까지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여, 여기서요? 괜, 괜찮아요.”
“얘들아,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바바라 따위가 내 호의를 거절한 거야?”
뒤에 있던 다른 여학생 두 명이 말을 거들며 바바라의 건방진 태도를 탓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괴롭힘이었다.
나는 바바라가 샤워를 자주 하는 까닭을 알았다. 내가 기숙사에 도착한 첫날도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씻고 왔던 거겠지.
촤악!
뒤에 있던 여학생 중 하나가 음료를 바바라의 바지에 쏟았다.
“아이참, 나도 덜렁대네. 미안해, 바라라. 바지도 세탁해야겠네. 빨리 벗어서 줘. 새것처럼 빨아서 돌려줄 테니까.”
바바라는 눈을 질끈 감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윗옷의 단추를 풀려고 했다.
나는 바바라에게 흥미가 있으나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평소라면 저 꼴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대항할 의지도 없는 사람을 돕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운이 좋군, 바바라.
지금의 나는 눈에 거슬리는 걸 참지 못한다. 그리고 따로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픽!
나는 주머니칼을 던졌다. 칼날은 여학생이 들고 있는 빈 컵을 꿰고 지나갔다.
“꺄아아악! 누구, 너, 너는 파견…….”
비명을 지른 여학생이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견 생도는 유명 인사라서 다들 날 알아봤다.
“헛짓거리 그만하고 꺼져.”
내가 짧게 말하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난…….”
음, 이 패턴은 익숙하군. 같은 말을 여기서 몇 번이나 더 들을지 궁금할 정도다.
나는 가만히 그들을 노려봤다. 여학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금 내 표정은 무척이나 사나웠을 것이다.
“나는, 여자도 때려. 그것도 얼굴을.”
나는 굶주린 짐승처럼 낮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머뭇거리던 여학생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저, 저기 루카, 고, 고마워요.”
엉망진창인 바바라가 얼굴을 붉히며 날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도 안드로이드의 습격을 받을 정도로 친해진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