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6)
배드 본 블러드-36화(36/197)
036
칼레사 카노는 체스실에서 우릴 기다렸다.
나는 벽면을 따라 가지런히 쌓여있는 체스판과 기물을 바라봤다. 귀족들은 종종 구시대의 문화를 즐긴다. 체스도 그중 하나였다. 실력을 겨루는 게임이지만,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교의 수단으로 쓰일 터다.
“지젤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너를 이렇게 직접 마주하지 않았을 거야.”
칼레사는 창문을 등진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그녀의 좌우에는 여학생 두 명이 시녀처럼 서 있었다. 이 조그마한 체스실에서 여왕 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권력 지향적인 성격이 엿보였다.
“나도 지젤이 없었다면, 네 면상부터 걷어차고 나서 대화를 시작했을 텐데 말이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칼레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꾸욱.
지젤이 내 발을 밟으며 사납게 나를 노려봤다.
“……제 요청에 응했다는 건 두 분 모두 화해할 생각이 있다는 거겠죠?”
지젤은 나와 칼레사 사이에 서며 말했다.
“저 인간이 내게 사과한다면 받아줄 의향은 있어.”
칼레사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흘겨봤다.
“사과? 잘못한 게 있어야 사과하지. 난 기숙사장을 도와준 것뿐이야.”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들었잖아. 바바라, 그년이 내 남자친구에게 꼬리를 쳤다고.”
이건 엔리코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칼레사가 바바라를 괴롭히게 된 계기.’
칼레사의 남자친구가 바바라와 친해졌다가 ‘안드로이드 폭주’에 휘말렸다. 그 때문에 칼레사는 바바라를 미워하고 있다. 이게 표면적인 이유다.
“내가 남자친구라도 너 같은 여자는 무서워서 도망가겠다. 사근사근한 바바라가 낫지.”
나는 의도적으로 칼레사를 도발했다. 칼레사가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칼레사의 앙칼진 목소리가 내 고막을 푹푹 찔렀다.
“진정하세요, 칼레사.”
지젤이 고요히 말했다. 칼레사가 핏발이 선 얼굴로 내게 삿대질했다.
“하지만 이 망할 자식이 나를…….”
그러나 칼레사는 지젤의 냉담한 표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칼레사가 지젤의 눈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제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요?”
지젤이 칼레사를 압도했다.
‘역시 그랬군.’
저 지랄 맞은 성격의 칼레사가 지젤에게 찍소리 못 하고 있다.
‘결국, 칼레사는 적당히 자존심을 세우는 선에서 나와 화해하겠지.’
칼레사는 지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나는 이걸 확인하고 싶었다.
‘지젤이 중재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칼레사의 성격이라면 어지간해선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지젤은 자신 있게 중재를 나섰다. 칼레사를 찍어 누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긁어놓은 자존심조차 내려놓을 정도로 명백한 상하 관계.’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나는 입술을 잠시 씰룩였다.
갑자기 질리언 수사관의 말이 생각났다. 아키에스 전투술 사용자는 그 특유의 통찰력 때문에 수사관으로서의 자질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긴 하군.’
나는 지금 굉장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젤과 칼레사의 언행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외부인인 내가 섣불리 나선 감이 있긴 하지. 바바라의 저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도 죽은 판국에 이런 사소한 일로 감정 싸움하는 건 접어두자고.”
내가 얌전하게 말했다. 이미 알아볼 건 다 알아봤다. 칼레사를 자극해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순식간에 바뀐 내 태도에 지젤과 칼레사는 상당히 놀란 듯했다.
“나도 근위대 생도와 마찰을 빚을 생각은 없어.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치자고.”
칼레사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물꼬가 트이자, 중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와 칼레사가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눴다. 앙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앞으로 아카데미에서 서로를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먼저 나가보세요, 루카.”
지젤은 나를 체스실에서 내보내고 칼레사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여기까진 엿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복도로 나갔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조각이 모이며 몇 가지 가정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질리언 수사관이 곤란할 만도 하네. 귀족 자제들 상대로 사정 청취를 하진 못할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젤도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나를 쳐다봤다.
“이번 건은 제가 무마했으니까, 더는 사고를 치지 마세요. 바바라에게도 접근하지 말고요. 이번에 사망자가 생긴 것도 당신이 제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설마 바바라의 저주를 믿는 겁니까? 그런 미신을?”
내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우린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죠. 실제로 바바라와 친해지면 사고를 당하니까요.”
“그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건…… 사람의 짓이고, 범인이 따로 있다는 뜻이죠, 지젤.”
“탐정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요?”
나는 조금 뜨끔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굴었나 보다.
“그건 아닙니다만, 저도 습격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누가 안드로이드 폭주를 일으켰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죠.”
“그건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이번엔 사망자가 생겼으니 수사관들도 본격적으로 나서겠죠.”
“수사관들이 잘도 귀족 자제들 상대로 조사하고 다니겠네요.”
지젤이 걸음을 멈췄다.
“지금 빈정거리는 건가요?”
“사실을 말한 겁니다. 그나저나 칼레사가 댁의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더군요.”
“귀족 사회에선 가문의 후광이 중요하니까요. 칼레사는 제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죠. 그것뿐입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칼레사를 시켜서 바바라를 괴롭힌 겁니까?”
지젤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의 외면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신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아까 이야기를 못 들었나요? 칼레사가 바바라를 괴롭히는 까닭은…….”
나는 지젤이 생각을 갈무리하기 전에 말을 잘랐다.
“남자친구 때문이라고요? 칼레사와 사귄 남자가 정말로 자신의 의지로 바바라와 친밀하게 지냈을까요? 칼레사 성격상 다른 여자와 친해지면 난리가 날 텐데요? 저라면 무서워서라도 다른 여자에게 접근 안 할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죠?”
“칼레사에겐 바바라를 괴롭힐 명분이 필요했고, 그걸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지젤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위로 젖혀서 하늘을 쳐다봤다. 그녀는 화난 듯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걸 피하고 있었다.
“과대망상증이라도 있는 건가요? 고성능 의체의 부작용 중 하나가 뇌의 기능 이상이라고 들었습니다. 뇌 신경계 과부하로 정신병이 생기는 거죠. 이참에 정밀검진이라도 받아보시죠.”
지젤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머쓱하게 혼자 서 있었다. 이 상황은 둘 중 하나다.
내가 정말로 과대망상증이거나 혹은 지젤의 정곡을 찔렀거나. 물론 나는 후자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단말기로 질리언 수사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칼레사의 남자친구는 이미 졸업해서 내가 접촉할 방법은 없었다. 여기에 대한 탐문은 질리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 * *
나는 바바라의 저주를 열심히 조사하고 있었다. 내 열정에 나도 놀랄 정도였다. 생각보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오늘도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늘 앉던 벤치로 갔다. 거기엔 화사한 적금발의 소녀, 바바라가 나보다 먼저 앉아있었다.
“도, 도시락이에요. 제가 직, 직접 쌌어요.”
바바라가 내게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매일 점심마다 내가 맛없는 간이식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건 이미 소문이 난 모양이다.
“바바라, 고맙긴 한데 무슨 의미죠?”
“절 도와주셨잖아요. 그, 그리고 그 때문인지 몰라도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에 휘말렸고요. 루카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저 대신에 다른 사람이 죽었지만요.”
나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바바라가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으, 음. 아카데미에 머무시는 동안은 제가 루카의 도시락을 싸도 될까요?”
바바라가 용기를 짜내듯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건가? 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녀가 내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가진다면 곤란했다.
나는 바바라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열어본 도시락은 꽤 그럴싸했다. 벤치에서 먹기 좋은 샌드위치였다.
“간편하게 먹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렇다. 나는 번거로운 식사를 싫어했다.
“맛있네요. 하지만 도시락은 됐어요. 주변의 오해를 살 테니까요.”
나는 샌드위치를 한입 먹고서 말했다. 우리에게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다. 오늘 저녁 무렵에는 바바라와 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며칠 전부터 바바라를 향한 괴롭힘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바바라의 저주가 오랜만에 일어났고 사망자가 생겼다. 더군다나 근위대 생도인 내가 바바라를 지키듯 도왔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이 아니라면 바바라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까지는 바바라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 거야.’
바바라는 내 말을 듣고선 우물쭈물했다. 나는 그녀의 답답한 태도가 싫었다.
“저는 남들의 오해를 사도 괜, 괜찮은데요.”
바바라의 뺨에는 홍조가 있었다. 나는 샌드위치가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로 으적으적 먹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바바라.”
“말, 말하세요!”
바바라가 화들짝 놀라듯 대답했다. 이럴 땐 나름 귀여운 맛이 있긴 하다.
“당신과 친해지면 안드로이드의 폭주에 휘말린다는 건 알면서, 왜 자꾸 제게 접촉하는 거죠? 저를 공격받게 만들고 싶은 건가요?”
바바라의 풍부한 감정이 일순간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미, 미안해요, 루카. 저, 저는 제게 저주가 있다는 걸 믿, 믿기 싫었어요. 역시…… 루카도 저주를 믿는군요.”
“저주를 믿진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친해지면 사고에 휘말리는 건 확실하죠. 저도 직접 겪어봤으니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왜,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나는 바바라의 속내를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좀 더 노골적으로 감정을 건드릴 필요가 있었다.
“칼레사가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힌 이유는 지젤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걸로 바바라의 동요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바바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간만에, 내 예상이 빗나갔다.
“지젤이 당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내가 취조하듯 말했다. 바바라가 고개를 들더니 방긋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루카, 그걸 제가 당신에게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오오?”
어쩌면 지젤이나 칼레사보다 더 심계가 깊은 인물이 바바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바바라에게 묘한 오싹함을 느꼈다.
‘하지만 저 중에는 양의 탈을 쓴 괴물도 있네. 늑대 따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형의 괴물이지.’
이 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괴물은 가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