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7)
배드 본 블러드-37화(37/197)
037
질리언 수사관의 행동은 빨랐다. 이틀 뒤에 그는 내게 연락을 취했다.
단말기의 화면 너머로 질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방금 조사가 끝난 모양이다.
-칼레사의 남자친구를 만나봤네. 정확히 말하면 전 남자친구라고 불러야겠지. 자네 말대로 가문, 성격, 능력…… 칼레사 카노를 거스를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어.
이건 내 예상대로였다. 칼레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남자친구를 바바라와 접촉하게 했다. 바바라를 괴롭힐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뭔가 진척이라도 있나 보군. 자네를 택한 게 정답이었어.
“제가 용의자를 지목하면, 수사관님의 역량으로 조사가 가능하긴 합니까?”
-한두 명 정도는 들쑤시는 게 가능하네. 하지만 헛다리를 짚은 거면 나도 타격이 크겠지.
“그러면 굳이 수사를 열심히 할 이유가 없겠군요.”
나는 질리언 수사관의 열의에 의문을 품었다.
-자네 건을 합해서 여섯 건의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이 일어났네. 이번엔 사망자도 있어. 누가 봐도 사람의 짓이야. 그런데도 아카데미 내부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지금껏 이쪽에선 제대로 된 수사조차 못 하고 있네.
“정의감이 투철하신지는 몰랐습니다.”
질리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내 성격이 배배 꼬인 탓이지. 이딴 짓을 저지르고도…… 수사가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잡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범인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고 싶은 거네.
동질감이 들었다. 나도 같은 상황이면 심보가 뒤틀릴 터다. 내 살을 깎아 먹는 한이 있어도 범인을 잡고 싶을 것이다.
“바바라에 대해 조사하신 게 있습니까?”
-바바라? 그 애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나?
질리언이 의문을 표했다.
“바바라가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범행동기부터 이상하다는 건 저도 압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죠. 자신의 친구들만 공격해 아카데미에서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신경이 좀 쓰여서요.”
-바바라는 하층 출신이네. 로봇과 인공지능 공학 쪽으로 두각을 드러내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특례 입학했지.
“그 정도 재능이면 충분히 안드로이드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더군. 나도 자네도 공학 쪽에는 문외한이지. 그러니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는 게 옳아. 바바라가 조작했다면…… 일개 학생이 아카데미의 보안을 무력화했다는 이야기네. 아카데미의 안드로이드는 폐쇄 네트워크니까. 안드로이드를 조작하려면 아카데미의 보안망부터 뚫어야 한다고 하더군.
“그럼 귀족 자제가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안드로이드를 조작했다는 거죠?”
-귀족은 물리적으로 가능하네. 아카데미로 들어오는 안드로이드의 제조와 유통 과정에서 손을 써서 조작하거나 악성 프로그램을 미리 넣어두거나 하면 되지. 권력과 돈이 있으면 매수가 가능하니까.
“그것도 현실성은 크게 없어 보이는데요.”
-자네의 가정보다야 그럴싸하지. 실제로 비슷한 사건도 있네.
비슷한 사건이 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범죄의 전문가는 저쪽이니까.
-아, 그리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바바라의 후원은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하고 있네.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나는 질리언과 정보를 공유하고선 통신을 끊었다.
‘뭔가 이어질 듯이 안 이어지는군.’
모든 게 연관이 있다. 그러나 사실과 동기가 징검다리처럼 중간중간 빠져 있었다. 방향성은 뚜렷한데 완벽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흠.”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응시했다.
‘확실한 방법은 고문이지.’
지젤과 바바라는 우수한 학생에 불과하다. 고문을 견디는 법이나 통증 내성 훈련 따윈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가 없으니 문제로군.’
쉬운 방법이 있지만, 빙빙 돌아가야 했다.
* * *
나는 처음으로 지젤 쿠스토리아를 먼저 찾아갔다. 지금까지는 항상 그녀가 날 찾아왔었다.
기이잉.
지젤은 의체 정비를 실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족과 의수만 덩그러니 놓인 작업대 옆에 서 있었다. 공구를 매만지는 손놀림이 상당히 능숙했다. 가문의 후광만으로도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온 건 아닌 듯했다.
“조금 기다려요, 루카.”
지젤은 그리 말하며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나는 멀리 떨어진 채로 정비실을 둘러봤다. 학생들이 진지한 얼굴로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귀족이라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노는 건 아니다.
‘귀족 사회도 나름 치열하지.’
무능한 귀족은 도태된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버러지 취급을 당할 터다. 근위대 훈련소에서도 대단한 가문의 자제들까지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때론 목숨까지 걸면서 말이다.
자존심이 강한 지젤 쿠스토리아조차 가문 내의 지위와 평판을 위해서 하층민 출신의 나를 신경 쓰고 있다.
“무슨 일로 온 거죠?”
작업을 끝낸 지젤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요.”
나는 무심히 말했다. 지젤이 마시던 물을 토하듯 내뱉었다.
“정신 나갔어요?”
지젤은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싫어하는 게 맞았다. 다행이로군.
“그쪽 말대로 고성능 의체의 부작용으로 정신병에 걸린 모양이죠.”
“비아냥만큼 수준급이네요. 진짜 온 이유나 말해봐요. 저도 바쁜 사람이니까요.”
나는 주변을 살폈다. 휴게실에는 나와 지젤밖에 없었다.
“지금부턴 제게 거짓말하거나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젤 쿠스토리아.”
“추궁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엄연히 공식적으로 치안경비대의 수사 요청을 받았으니까요.”
지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로 탐정 노릇을 할 생각인가요?”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근위대에서도 저보고 협조하라고 하니까 별수 없지요.”
근위대라는 말까지 나오자, 지젤도 더는 따지지 못했다.
“이런 말은 하기 싫지만, 제가 근위대장의 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릴게요.”
지위를 이용한 일종의 경고였다. 내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근위대장의 성격은 내가 잘 안다. 딸의 말만 듣고, 내게 불이익을 줄 사람은 아니다.
“바바라를 아카데미에서 내쫓고 싶어서 괴롭히는 겁니까? 알아보니까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바바라를 후원하고 있더군요.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넌지시 묻지도 않았다. 지젤과 바바라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 관계를 명확히 알아야지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제가 저주의 두 번째 희생자인 건 알죠? 그것만으로 바바라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그전까지는 친구였어요.”
“진짜 친구였다면, 그런 일을 당했다고 바바라를 이토록 싫어하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바바라의 저주를 같이 해결하려고 했겠죠.”
내가 따지듯 말했다.
“그렇게 도와줄 정도로 각별하게 친하진 않았어요.”
지젤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치안경비대에선 안드로이드 폭주를 고의적인 조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기로만 보면 지젤 쿠스토리아, 당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내가 빠르게 말하며 지젤을 붙잡아뒀다.
“제가 그랬다고요? 저도 바바라의 저주에 당한 피해자예요.”
“범인이 피해자로 위장해 숨는 건 흔한 알리바이죠. 당신은 쿠스토리아 가문이고, 공학자 지망으로 안드로이드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조작을 교묘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죠.”
“정말로 제대로 미쳤군요, 루카. 이 일에서 손을 떼세요.”
지젤이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저도 지젤, 당신이 안드로이드 조작을 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게 있으면 전부 말해주세요. 제 심증으로는 아마…….”
내 직감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바라다. 나는 그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치이익.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그곳엔 도시락을 든 바바라가 서 있었다.
“아! 루카, 찾고 있었어요. 늘 있던 곳에 안 계셔서요.”
바바라가 해맑게 웃었다. 그게 나를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찾아냈단 말인가? 미행이 있었다면 진즉 내가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난 인내심을 발휘했다. 바바라의 목덜미를 붙잡고 벽까지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공포와 고통으로 그녀의 속까지 박박 긁어서 끌어내고 싶었다. 폭력으로 얻어낸 진실은 순도가 높다.
“웃지 마, 바바라. 짜증이 나니까.”
내가 한쪽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기분이 나빴다. 바바라는 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 상관도 아닌 일개 일반인 주제에.
“루, 루카? 왜 말을, 그, 그렇게 해요…….”
바바라는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곧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갔다. 자신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딨냐는 듯이 말이다.
‘범인이 피해자로 위장.’
아까 내가 했던 말이다. 이건 바바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양의 탈을 쓴 괴물.’
바바라는 양이 아니다. 그녀에겐 송곳니와 발톱이 있다.
‘지인이 족족 습격을 당하고, 2년간 괴롭힘을 당했어.’
제정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해맑은 미소를 짓지 못할 터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바바라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수사에 재능이 있을지라도…… 적성은 맞지 않아.’
증거를 들이밀고 추궁한다. 이건 내 방식이 아니다.
문을 잠그고 10분이면 된다. 딱, 10분이면 바바라의 입에서 모든 진실을 꺼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충동을 참아내야 한다. 내 특기는 사람을 부수는 것이다.
“저, 저는 루, 루카를 좋아해요. 저를 구해주기도 했고요. 그, 그러니까 오해가 있다면 말, 말로 풀고 싶어요.”
저 말을 듣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정도다.
쾅!
나는 의자를 바바라의 옆으로 던졌다. 철제 의자는 차에 치인 듯이 찌그러졌다.
“루카! 지금 무슨 짓을!”
지젤이 소리를 질렀다.
화를 조금이나마 쏟아낸 나는 차분하게 바바라를 노려봤다. 바바라의 미소가 천천히 걷혔다.
“지금까진 지루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한 여흥이었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진심이다, 바바라. 넌 날 우습게 봤어.”
바바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멀뚱히 나를 보고 있었다. 저 무기질적인 표정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다.
“바바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오-.”
바바라가 검지와 엄지로 입꼬리 양쪽을 밀어 올리며 미소를 만들었다. 그녀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은 텅 빈 것처럼 초점이 흐렸다.
“아…….”
지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어깨도 눈에 띄게 떨렸다. 또렷한 두려움이 지젤의 몸을 뱀처럼 휘어 감고 있었다.
바바라는 굳은 지젤의 곁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도시락, 놔두고 갈 테니까. 맛있게 먹어요, 루카. 그리고…… 지젤, 반가웠어. 또 봐.”
도시락을 놓은 바바라가 지젤의 손등을 스치듯 매만지며 물러났다. 지젤은 바바라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
나는 앉은 채로 웃었다. 나조차도 착각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젤은 바바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각, 또각.
바바라는 마지막까지 우릴 보며 뒷걸음질 치다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지젤.”
내가 지젤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아가씨가 뭐 때문에 이리도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버지가 제국의 근위대장인데 말이다.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아카데미를 떠나세요. 부탁이에요, 루카.”
지젤의 말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적의와 경멸이 한 줌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