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38)
배드 본 블러드-38화(38/197)
038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탐정 루카.
바바라를 주로 괴롭힌 사람은 칼레사 카노다. 그리고 칼레사는 지젤의 명령을 듣는 입장이었고, 지젤이 바바라 괴롭히기를 사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젤이 정작 두려워하던 사람이 바로 바바라였다.
‘……정황상, 바바라는 스스로 괴롭힘을 당하길 원했어.’
일반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젤 쿠스토리아는 바바라를 무서워하고 있고.’
지젤은 바바라에게 약점이라도 붙잡힌 듯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이번 건은 내 재량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젤이 협박당하고 있다면, 근위대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딸이 곤경에 처했다면 어떤 조치를 할 것이다.
나는 단말기 홀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근위대장 헤일라스에게 보고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루카, 지금처럼 자네의 판단대로 행동하게나. 재량에 맡기겠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바로 반문하고 싶었지만, 군인의 본능이 내 입술을 걸어 잠갔다.
“……알겠습니다.”
나는 통신을 끊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날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보낸 이유가 있었어. 지젤 쿠스토리아를 내 곁에 붙인 것도 마찬가지지. 근위대장은 내가 바바라의 저주에 휘말릴 거라고 확신한 거다.’
내 이 사건에 깊게 관여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왜?’
의문이 들었다.
근위대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사건의 진상을 금방 파헤칠 것이다. 치안경비대와 달리 근위대에겐 그만한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근위대는 나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사건에 끼어들어서 관망했다.
‘심지어 근위대장의 딸이 엮여있는 사건인데…….’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람들이 내 머리 위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졸에 불과했다. 이게 군인의 역할이긴 하다.
‘하지만 짜증이 나네.’
나는 손가락 사이로 눈을 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바라의 저주는…….’
심증으로는 바바라의 자작극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안드로이드 폭주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질리언 수사관도 바보는 아니야. 일 처리하는 걸 보면 꽤 유능한 사람이지. 그의 말대로 하층민 출신의 바바라가 안드로이드를 조작하긴 힘들어.’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퍼즐을 끼워 맞췄다. 바바라의 저주에 접근하려고 했던 그 누구보다 내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나만큼 진실에 가깝게 다가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사고를 가속하며 사건의 조각을 다방면으로 끼워 맞췄다. 할 수 있는 모든 가정을 하나씩 해보며 이치에 가장 맞는 상황만 추려냈다.
연역과 소거를 반복하자, 꼬인 실타래가 풀리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지젤과 바바라는 안드로이드 폭주를 일으킨 공범이로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 추론이 맞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지젤은 쿠스토리아 가문이다. 그녀가 안드로이드 폭주의 범인이라고 밝혀지면, 쿠스토리아 가문의 위상과 명예가 크게 실추될 것이다.
단말기를 매만지던 나는 엔리코 라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지젤을 짝사랑하고 있다.
* * *
크라치아 아카데미에는 인적이 드문 장소가 몇 군데 있다. 귀족 학생이 주류인 만큼 사적 이야기를 할 만한 장소가 여럿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학생의 사생활을 보호를 위해 순찰 드론과 안드로이드도 큰길만 오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정원도 조용했다. 노을이 정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간질간질해질 풍경이었다.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로 정원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좋, 좋아합니다. 지젤 쿠스토리아 양.”
엔리코 라간이 용감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엔리코의 호출을 받은 지젤이 서 있었다.
지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초췌했다. 그녀는 퀭한 눈으로 엔리코를 노려봤다.
“중요한 말이라는 게 고작, 이건가요?”
지젤의 가시 돋친 말에 엔리코는 크게 당황했다. 난 조금 미안해져서 눈을 감았다.
나는 지젤에게 고백하라고 엔리코의 등을 떠밀었다. 지금이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 게 나였다.
“아, 저는, 음…….”
엔리코는 실패할지 몰랐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둘이 있는 김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엔리코 라간.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는 걸 넘어서 당신의 존재가 불편합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제 주변에 맴도는 걸 그만했으면 해요.”
이야, 이 정도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훗날, 혹시라도 엔리코 라간에게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는 그를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까.
“크, 크읍, 흐으윽.”
엔리코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다가 울먹였다. 그는 정원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지젤은 두통이라도 생겼는지 이마를 짚었다.
지젤도 정원을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엔리코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선 모습을 드러냈다.
“지젤 쿠스토리아.”
내 등장에 지젤은 인상을 구겼다.
“어쩐지…….”
지젤은 상황의 맥락을 금방 파악했다.
“제 호출에 응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런 수를 썼습니다. 오더라도 바바라와 함께 오겠죠. 어쩌면 또 안드로이드를 움직일 수도 있고요.”
바바라가 곁에 있으면 지젤에게 진실을 끌어낼 수 없었다. 지젤의 반응을 봤을 때, 바바라에 대한 공포가 가시처럼 깊게 박혀있었다.
“이제 더는 못 참아요. 아버지에게 당신의 무례를…….”
“소용없을 겁니다. 저도 근위대장님께 당신이 이번 사건에 엮여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별다른 반응이 없으시더군요. 둘 중 하나죠. 딸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이미 어느 정도 사실을 알고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요.”
지젤이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아, 아버지께 말, 말했다고요? 아버지에게? 당, 당신이?”
내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지젤은 대답 없이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표독스레 나를 노려봤다. 어찌나 얼굴을 찡그리는지 예쁘장한 얼굴이 망가질 정도였다.
“아버지가 알았다고? 아버지가…… 어, 어디까지 말, 말한 거죠?”
“그걸 당신에게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쪽은 제 상급자도 아닐뿐더러, 항상 비협조적이었으니까.”
지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자리를 빙빙 돌면서 걸었다. 공황에 빠진 모습이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터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젤의 공황 상태는 내가 노린 바였다. 사람은 불안할수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극심한 공황 상태에서는 평소에 싫어하는 상대에게조차 의지하려는 게 인간이다.
“지금이라면 제가 아직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하세요.”
“너, 너 때문이야. 네가 오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전부 너 때문에…….”
지젤의 어휘가 단순해지고 있었다. 불안이 정신을 좀먹고 있다는 뜻이다.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제가 근위대 생도라는 걸 기억하세요.”
내가 지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젤은 처음에는 나를 밀어내다가 이윽고 내 옷깃을 붙잡으며 몸을 지탱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제게 협조한다면, 저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넌, 넌 나를 도울 수 없어. 이건 우리 가문에서 내 입지의 문제라고. 너는 고작해야 일개 생도야.”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제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 된다면요?”
지젤이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믿든 안 믿든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장차 쿠스토리아 가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근위대 생도라지만, 고귀한 신분인 당신이 제 안내역을 수행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진실이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네가 쿠스토리아 가문 사람이 된다고?”
“순조롭게 경력을 쌓아가면 가능하겠죠. 저는 생도 중에서 몇 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수재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무공훈장도 받았고요. 군인 가문에서 절 영입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이런 말을 제 입에서 하기에 민망하지만, 근위대장님께서 절 꽤 좋아합니다. 제가 쿠스토리아 가문이 된다면 입지가 그리 좁진 않겠죠.”
내가 지젤을 살짝 밀어내며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진, 진짜야?”
“오점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이번 일을 잘 해결해야 저도 근위대장님의 양자로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거든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으면 신뢰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나는 지젤의 벤치에 앉혔다. 그녀는 바닥을 바라보다가 말을 내뱉었다.
“내, 내…… 아니, 제가 안드로이드를 조작했어요. 바바라의 저주는 제가 만든 거죠.”
지젤의 입에서 저주와 악연의 실체가 나왔다.
* * *
나는 지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리했다.
바바라와 지젤의 인연은 3년 전에 시작됐다. 그들은 같은 시기에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바바라는 쿠스토리아 후원으로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피후원자 학생들은 졸업하고 나선 후원자의 종사나 가문의 가신으로 봉사하고 일하게 된다.
지젤은 쿠스토리아 가문의 가신이 될 바바라와 가까이 지내려 했다. 장차 자신을 지지해줄 가신이 한 명 더 생기는 셈이니까.
두 사람은 전공과 관심 분야도 비슷했기에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빨리 친해졌다.
“……사실, 바바라는 제 첫 번째 친구나 마찬가지였어요. 단순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처음으로 생긴 거죠.”
지젤이 쓸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차갑고 공격적인 지젤이 하층민 출신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상상되진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귀족적인 모습은 만들어진 가면일 터다. 원래 성격은 다정다감하고 여린 편이겠지. 공황에 빠졌던 지젤의 모습에서 그 편린이 드러나긴 했다.
바바라는 사교성도 좋고 잘 웃는 소녀였다. 그 특유의 밝은 모습에 지젤은 바바라에게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바바라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특례 입학한 수재다. 하층 출신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배울 점도 많았다.
“그때 한 남자애가 바바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어요. 바바라는 밝은 성격과 미소 덕분에 인기가 많았으니까요. 저는 바바라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없을 줄 알았죠. 그런데 제게 그 남자애가 마음에 든다고 털어놓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제 하나뿐인 친구를 남자에게 뺏기기 싫었어요. 저도 당시엔 많이 어렸거든요.”
시작은 사소한 질투였다.
“처음에는 그 남자애가 미워서 골려주려고만 했어요. 그래서 가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죠.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한 로봇요.”
지젤은 로봇을 이용해 남학생을 협박했다. 바바라에게 떨어지라는 음성 파일을 로봇에 넣고선 한밤중에 쫓아다니게 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장난은 지젤이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가져왔다.
“넘어진 남자애는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후유증으로 자퇴까지 해야 할 정도였죠.”
지젤은 로봇을 분해해 처분했다. 그러나 상해 사고까지 번진 터라 조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바라가 가장 먼저 제가 한 짓인 걸 알아챘죠. 종종 그 애 앞에서 로봇을 조립하곤 했으니까요.”
나는 일련의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지젤은 함정에 빠졌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바바라는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했어요. 제가 또 다른 피해자가 되면 의심을 사지 않을 거라고요.”
“어차피 아카데미 내부 사건이라 조사가 깊게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흐지부지 넘어갔겠죠.”
내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지젤은 자신의 허벅지에 올린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녀의 손등이 떨렸다.
“그땐 저도 어려서 그걸 몰랐으니까요. 마냥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저주의 두 번째 피해자로 자진해서 나선 겁니까?”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교내 안드로이드 정비하곤 해요. 그때 바바라가 넘겨준 칩을 안드로이드에게 부착했죠. 외부입력으론 인공지능 쪽을 조작이 불가능할 텐데,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안드로이드가 저를 찾아오더니 오작동과 폭주를 일으켰어요. 제가 두 번째 피해자가 될 수 있었죠.”
“그때부터 소문이 퍼졌겠군요. 바바라와 친하게 지내면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에 휘말린다고 말이죠.”
지젤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피가 그녀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바바라가 이상해진 것도 그 시점부터였어요. 저한테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거든요. 완전범죄가 되려면 자신이 교내에서 고립돼야 한다느니…… 주기적으로 피해자가 필요하니 하면서…….”
“이상해진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여자였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죠. 저는 이대로 조용히 졸업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바바라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길 진심으로 바랐던 거고요.”
지젤의 이야기에선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지젤이 거짓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치직.
잡음이 일었다. 처음에는 내 단말기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우리의, 비밀을…… 남자에게, 말했구나?
지젤의 단말기에서 소음이 났다. 그녀는 명문가의 자제인 만큼 단말기의 보안 등급이 굉장히 높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말기가 해킹을 당했다.
-……배신자, 지젤. 허나 사랑스러운 나의 지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단말기의 소리만 문제가 아니었다.
우우웅.
미약한 프로펠러 소리가 났다. 드론이 주변에 있었다. 위치까진 바로 파악되지 않는다.
내 직관과 감각이 매섭게 경보를 울려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루…….”
나는 지젤을 감싸듯 안고선 옆으로 뛰면서 한바탕 굴렀다.
피융!
소음기 특유의 얇은 총성이었다.
……젠장, 왼쪽 옆구리가 아프다. 눈동자를 내려보니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활짝 열린 수도꼭지처럼 피가 철철 흘렀다.
“으음.”
나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 대신에 앞니로 옷소매를 물어서 찢었다. 그리고 찢은 천을 둘둘 말아서 상처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이 정도면 출혈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근, 근위대는 총 맞아도 안, 안 아파요?”
지젤이 내 배를 보며 멍청한 질문을 했다. 지능이 내려갈 정도로 당황한 모양이다.
“당연히 아프죠! 그걸 말이라고.”
나는 짜증을 내며 눈동자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