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44)
배드 본 블러드-44화(44/197)
044
높은 지위의 특권층일수록 아랫사람과 부대끼길 싫어한다. 하다못해 하층 구역에서조차 그럭저럭 못사는 동네와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를 구분한다. 제국의 명가 중 하나인 쿠스토리아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저택은 수도 아크바란에서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심지어 육로 이동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는지 저택과 이어진 도로조차 없었다. 저택 주변은 어색할 정도로 붉은 황무지였다.
우리가 탄 공중차량이 저택 위까지 도달했다. 공중차량에서 바라본 저택 중앙에는 정원과 분수가 있었다. 저택 내부에만 초록빛 식물과 물이 있어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저택의 규모는 커다란 건물만 네 채였고, 자질구레한 별관은 세기도 귀찮을 정도였다.
“나도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만 본가에 들르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는데도 정이 붙지 않아서 말이야.”
근위대장 헤일라스가 창밖 아래를 보며 말했다.
기이잉.
공중차량 하부에서는 평형을 맞추는 분사 장치가 세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도가 차츰 내려갔다.
저택의 비행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공중차량이 여러 대 있었다.
“자네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네. 저 중엔 내 형제자매도 있지.”
“얼굴과 이름은 전부 외워 뒀습니다.”
나는 착륙의 진동을 느끼며 대답했다. 우리의 공중차량도 비행장에 안착했다.
끼릭.
공중차량의 문이 위로 열렸다.
근위대장, 아니, 이젠 헤일라스라고 불러야겠지. 우리의 관계는 상관과 부하로 끝나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헤일라스가 먼저 공중차량에서 내렸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 가주님께서 오셨군. 옆의 아이가 새로운 조카님이신가?”
헤일라스와 닮은 사내가 우리를 반겼다. 이목구비만 닮았을 뿐이지,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아르투르 쿠스토리아.’
그는 헤일라스의 형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동생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긴 등신이기도 했다. 흠, 표현이 좀 과한가.
헤일라스는 형을 밀어내고 가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나도 사전에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헤일라스의 말투는 공손했으나 태도는 거만했다. 그는 냉엄한 눈동자로 자신의 형을 보고 있었다. 상하 관계가 명확했다.
아르투르의 시선이 내게 멈췄다. 나는 인사하려고 한 걸음 나아갔다.
“루카…… 쿠스토리아입니다.”
거창한 성을 뒤에 붙이는 게 어색했다. 아르투르도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웃었다.
“그래, 앞으로 얼굴을 자주 보겠군. 내 막내아들하고도 나이가 맞으니 잘 어울려 주게나.”
의례적인 말이 오갔다. 아르투르가 먼저 저택으로 들어갔다. 나는 헤일라스의 인도를 따라 비행장에서 헤일라스의 누이 두 명과 인사를 나눴다. 내겐 고모가 되는 여자들이다.
아직 네 명이 더 남았다. 헤일라스의 형제자매는 일곱 명이었다. 그들이 지금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벌써 피곤해지는 걸 느꼈다. 이곳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며 서로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머진 아직 오고 있다고 하는군. 루카, 일단 저택에 들어가서 쉬게. 자네의 방도 마련해 뒀을 거야.”
우린 저택의 본관으로 향했다. 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저택의 계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 단순한 직무에 종사하는 하인, 그리고 중간 계급의 가신과 종사였다.
귀족 가문의 가신은 능력을 인정받은 하층민이거나 해당 가문보다 급이 낮은 귀족이 대다수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주인 가문을 보좌하고 있었다. 하인보단 지위가 높지만, 가문의 일원은 아니었다.
‘저들도 실력과 운이 따라준다면 데릴사위나 입양 등으로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겠지.’
나를 보는 가신들의 눈빛과 표정에는 부러움과 질시가 담겨 있었다. 저들이 원하는 지위를 내가 쟁취했다.
“절 따라오시죠, 도련님.”
중간 관리자로 보이는 하인이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호출하시면 됩니다.”
하인의 공손한 태도마저 내겐 낯설었다.
나는 ‘내 방’을 살폈다. 군인의 가풍이 느껴지는 방이었다. 벽면에는 장식용 창과 칼 따위가 걸려 있었다. 가구는 언뜻 원목처럼 보였으나 책상을 두드려보니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바로 떠올랐다. 옷장도 열어보니 내부는 철저한 최첨단 시스템이다.
타닥, 타닥.
나는 벽난로를 응시했다. 홀로그램이 아니라 진짜로 장작이 타고 있었다. 방을 데우는 온기는 벽난로에서 나오고 있었다.
“웃기는군.”
온갖 첨단 냉난방 장치가 있는데도 벽난로를 쓰고 있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벽난로 위쪽에는 굴뚝 모양을 본뜬 연기 배출 장치가 달려있었다.
성간비행을 하는 시대의 신기술로 까마득한 구시대의 양식을 흉내 내고 있다.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이게 사치와 과시라는 거겠지.’
비효율적이며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귀족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근위대에서도 이런 과시적 무력 전통이 간혹 있으니까.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과시야말로 강자의 특권이었다.
나는 방을 둘러보다가 창문 앞에 섰다. 사람 두 명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유리창이었다.
내가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저녁 식사 때였다. 그전까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낯선 곳이라 기척의 형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몸무게가 가벼운 여자라는 것 정도만 느껴졌다.
끼익.
문이 열렸다. 낯익은 소녀가 한 걸음 들어왔다. 쿠스토리아 가문원 중에서 나와 안면이 있는 자는 몇 없다.
“정말로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 되었군요, 루카.”
지젤 쿠스토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이 움직일 때마다 밤하늘이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다.
“저도 이렇게 빨리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달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젤은 의자에 앉더니 탁자에 팔을 얹으며 뺨을 괴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잠시 피하다가 힐끗 나를 보았다. 조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저번…… 일은 감사합니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경황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감사의 말은 펠릭스 아이겐에게 더 필요할 겁니다.”
나는 테러리스트의 납치 계획으로부터 지젤을 구했다. 바바라는 묘하게 지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펠릭스도 따로 찾아갔습니다. 저를 알아보진 못하더군요.”
지젤은 쓰게 웃었다. 재기불능에 빠진 펠릭스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듯했다.
“감사는 할지언정, 죄책감은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펠릭스는 근위대의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니까요.”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
“위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전 그다지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거든요.”
“당신의 성격은 이미 잘 알고 있어요. 푸른 불꽃 같더군요. 차가운 것 같지만, 실상은 붉은 불꽃보다 더 거칠고 뜨겁게 타오르죠.”
흠, 배운 사람답게 표현이 남다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젤의 태도는 예전과 바뀌었다. 가시 돋친 듯한 그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당연한 거긴 하다. 어쨌거나 난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면 고마움을 아는 법이다.
‘지젤은 근위대의 작전은 몰라. 아버지, 헤일라스가 자신을 철저하게 미끼로 썼다는 것도 모르지.’
내막을 알게 되면 지젤도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바바라의 저주조차 상부의 계획이었다. 어쩌면 지젤이 곤란한 처지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사전에 정해진 사항일지도 모른다.
헤일라스는 근위대장으론 훌륭해도 아버지로는 비정했다. 하지만 나는 헤일라스를 이해한다. 피아식별조차 흐릿한 혼돈 덕분에 바바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제 추태에 대해서 사과하겠습니다. 당시에 전 감정적으로 몰려 있었어요. 아니, 이런 말조차 변명이죠.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으로 보여선 안 될 모습이었습니다.”
콧대가 높고 자존심이 강한 아가씨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감사와 사과를 표했다.
솔직히 말해서,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난 지금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출신과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일반인이 그런 상황에서 공황에 빠지는 건 당연합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나는 짧게 말했다. 지젤이 눈을 살짝 감으며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루카, 혹시 그때 했던 말들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쿠스토리아의 일원이 된다면 절 지지하겠다는 말요.”
나는 지금부터 나올 말이 본론이라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저자세로 나온 이유가 있었다.
역시 이래야 제국의 귀족 아가씨지. 자기 몫과 이익은 스스로 챙길 줄 알아야 한다. 마음에 드는군.
“뭐, 거짓말은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이야기해 본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람이라곤 근위대장님을 제외하면 당신뿐이고, 거래할 정도로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아버지라는 말이 편하게 나오진 않는다. ‘거래’라는 단어를 들은 직후, 지젤은 잠시 생각하더니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위이잉
탁자 중앙에서 홀로그램 렌즈가 열렸다. 지젤은 자신의 단말기와 탁자의 홀로그램을 연동했다. 그녀는 쿠스토리아 가문원의 얼굴을 하나씩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쿠스토리아 가문 사람에 대해 거의 알려주지 않았겠죠. 아버지는 항상 자식이 스스로 뭔가 해내길 바라니까요.”
“확실히,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는 분은 아니시죠.”
“제가 당신과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저번의 일의 보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는 지젤의 설명을 기다렸다.
“루카, 당신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제 오빠 두 명입니다. 첫째와 둘째죠. 당신의 등장으로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위기감? 전 양자에 불과한데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아버지의 자식 중에서 엘리트 군인의 조건을 갖춘 사람 당신뿐입니다. 혈연이 아니라도 경계할 만한 위치죠. 누가 뭐래도 쿠스토리아는 군인 가문이니까요.”
나는 헤일라스의 두 친아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장남 니콜라오스 쿠스토리아. 그는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관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간의 이력만 보면 꽤 대단한 엘리트였다. 쿠스토리아 가문 입장에선 군인이 아닌 게 유일한 흠일 뿐이었다.
차남 쥬페 쿠스토리아. 일반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장교다. 근위대 같은 특수부대 소속은 아니며, 장교가 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진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는 귀족 출신의 평범한 장교였다.
장남은 나보다 스무 살은 많았고, 차남은 열세 살이나 위였다. 일반적인 집안이면 한참 어린 양자를 위협이라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쿠스토리아는 군인 가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명가다. 엘리트 군인을 꾸준히 배출해야 한다.
“다른 아이들은 어려서 제2차 적성검사도 받을 나이가 아니죠. 현재 아버지의 자식 중에서 군인으로 잠재력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루카.”
“고귀하신 분들께서 괜한 걱정을 하는군요.”
난 피식 웃었다. 그러나 지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아버지가 당신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데려온 게 아닐까 하고 다들 의심을 하고 있어요.”
나는 헤일라스의 말을 떠올렸다.
‘여러모로 신선한 자극이 될 거야. 내 아이들에게도.’
이런 의미였나? 내가 제대로 자극이 됐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