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46)
배드 본 블러드-46화(46/197)
046
연회장에서 식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들 나와 쥬페의 대립을 보고 들었다.
누가 봐도 궁지에 몰린 건 쥬페였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성취가 없다는 열등감에도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뻔했다. 그 약점을 초면부터 내가 지적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제가 예법은 배운 게 없어도, 싸우는 법은 제법 잘 압니다. 훌륭한 근위대장 밑에서 배워서요. 궁금하면 시험해 보셔도 좋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식사용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렸다. 나이프가 세차게 돌아가며 내 손가락 위에서 춤을 췄다.
‘쿠스토리아 가문에선 귀족이기 전에 군인으로의 가치가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을 것이다.
헤일라스는 우리의 다툼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속으론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내게 바란 역할이 이런 것이니까.
“루카, 쥬페를 그만 놀리게. 쥬페, 너도 그만하고. 새 가족이 생긴 좋은 날에 언성을 높이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공백을 틈타서 장남 니콜라오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절묘하게 쥬페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넓은 아량을 드러냈다.
“저는 손위 형제로 동생에게 예의를…….”
쥬페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우리의 새 형제는 이미 식사 예절을 잘 알고 있네. 일부러 짓궂게 모르는 척한 거지. 그렇지 않나? 루카.”
나는 식기를 똑바로 놓았다. 제대로 된 나이프와 포크로 고기 한 조각을 썰어서 입에 넣었다. 맛은 끝내주는군.
“미리 공부해서 알고 있었는데 방금은 잊었습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라 긴장했거든요.”
긴장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뒤에 서 있는 하인들조차 알 것이다. 쥬페는 내 덫에 걸려 놀림감이 되었다.
쥬페는 입을 다물곤 자리에 앉았다. 그는 식기만 움직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니콜라오스가 말을 이어갔다.
“7급 십자검 무공훈장을 받았다지? 나는 군인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생도가 받기에는 어려운 훈장이라 알고 있네.”
뭐, 어디의 누군가는 십 년간 복무하고도 받지 못했죠.
나는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한 번 더 도발했다간 쥬페는 정말로 식탁을 뒤집으며 식기를 던질 수도 있었다. 음, 생각해 보니 솔직히 그 난장판을 두 눈으로 보고 싶긴 하다.
“근위대에선 누구나 달고 다니는 훈장입니다. 저도 준근위대원이나 마찬가지고요. 그다지 자랑할 건 아닙니다.”
쥬페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난 장남이지만 타고나길 몸이 약했네. 그래서 군인이 되지 못했지. 늘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려 죄송한 심정뿐이었네. 자네가 뛰어난 군인이라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군. 관료로 빠르게 승진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가 군인 가문만 아니었다면 이견이 없는 후계자였을 것이다.
“형님, 방금 그 말은 제가 군인으로 뛰어나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쥬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제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오해를 했나보군, 쥬페. 누구보다 형인 내가 네 능력을 잘 알아. 훗날 큰 공을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
“저도 답답한 심정입니다. 아버지가 근위대장이라는 이유로 상관이 눈치를 보며 저를 실전에 내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코라나 벨라토와 전면전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저도 실전에 투입될 테니까요.”
쥬페가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헤일라스의 성격상 아들이 죽는다고 그 상관을 문책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소인배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헤일라스는 쥬페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을 것이다.
니콜라오스의 중재로 사나운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그 이후론 평범한 식사와 연회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이름도 외우기 귀찮은 친족들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방금 쥬페와의 갈등으로 나는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가 어떤 성격이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았을 것이다.
“잘했어.”
지젤이 내 곁을 지나가며 속삭였다.
“니콜라오스는 만만치 않던데.”
내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쪽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
이렇게 첫인사와 소개가 끝났다.
이게 본가에서의 첫날이었다. 아직 난 이틀을 더 체류해야 한다.
* * *
고성능 고출력 의체를 사용하는 군인은 ‘잠 잘 자는 법’을 따로 배운다. 수면통제법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수면의 질은 중요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
우린 일반인보다 신경계 부하가 몇 배로 걸린 상태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린 극도의 스트레스를 버텨내는 한계치가 높은 것뿐이지 무적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면통제법이니 명상이니 어울리지 않는 방법까지 동원해 신경계 휴식에 신경을 쓴다.
나도 마찬가지다. 잠자리가 어딜지라도 빠르고 깊게 잠들 수 있었다.
하여튼 난 지금도 낯선 침대에서 푹 자고 있었다. 3초 전까지는 말이다.
‘누구지?’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금장치는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각성제가 담긴 주사기를 뇌에 꽂은 듯이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의식은 심해에서 수면까지 한순간에 올라왔다. 강제 각성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졌다. 휴식에서 전투로 갑자기 전환된 의식 상태 때문에 신체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심장이 황급히 일하며 혈류의 속도를 높였다. 깊은 수면을 위해 차단했던 감각이 하나둘씩 열렸다. 의체인 팔다리는 누가 꼬집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이렇게 일어나면 컨디션이 엉망이다. 난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문을 응시했다.
키잉.
일어난 나는 머리맡에 둔 호신용 나이프를 역수로 잡았다. 내 신체와 정신은 전투 준비를 끝냈다.
‘아직 새벽…….’
시계를 보니 3시였다. 정상적인 방문이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반응이 빠르군, 루카.”
“대장님?”
나는 나이프를 든 팔을 내렸다. 희미한 조명에 비친 사내는 헤일라스였다.
“야심한 밤에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네.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해서 말이야.”
헤일라스가 술병을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대장님도…… 술을 마시는군요.”
의외였다. 근위대원에게 담배와 술은 원칙적으론 금지다. 물론 대놓고 하지만 않으면 걸고넘어지진 않는다. 그 정도로 근위대가 융통성 없진 않다.
하지만 헤일라스가 술을 마실 줄은 몰랐다.
“의사와 과학자들이 말하길, 술과 담배 같은 건 전투에 맞게 조율한 신경계와 호르몬 체계에 악영향을 준다고 하더군. 한 잔 마시겠나?”
근위대원만 망가지는 게 아니다. 술과 담배는 사람을 천천히 죽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불필요하게 위험요소를 늘리고 싶진 않습니다. 아키에스 전투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죠.”
나는 헤일라스의 권유를 거절했다.
헤일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근위대장이 아니라 근위대 선배로 조언하겠네.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불순물이 내면에 있어야 오래 버틸 수 있어. 그게 인간성이라는 상자를 여는 열쇠거든.”
나는 반문했다.
“……우리에게 인간성이 필요합니까?”
“자네처럼 말한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먼저 레기온에게 먹혔지.”
내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으리라. 나는 눈을 조심스레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취하신 것 같습니다, 대장님.”
물론, 나는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전투와 무관하다 못해, 되려 방해가 될 만한 취미나 습관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게.”
“명령입니까?”
“아니, 다시 말하지만 조언이네. 가족이 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게.”
나는 목구멍이 꺼끌꺼끌한 걸 느꼈다. 목에 뭐가 들러붙은 건 아니다. 심리적 이유였다.
“기억은 해두겠습니다.”
내 대답은 부정에 가깝다. 헤일라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을 예리하게 갈고 닦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불순물까지 짊어질 여유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안에 불순물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더 늘린다고? 난 일레이나 키누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드륵.
헤일라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본 그의 모습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득이 될 게 없는 조언을 내게 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말이다.
* * *
본가의 이틀째 일정도 내겐 달갑지 않은 일투성이였다. 그나마 즐거운 거라곤 가문의 병기고를 들를 때였다.
‘병기고.’
일개 가문의 병기고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무구가 많았다. 수백 년은 넘은 골동품부터 첨단무기까지 벽을 따라 진열되어 있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병기고로 쓰고 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오래되고 묵직한 무기가 있었다. 이윽고 진열된 전갑의체 앞에 도착했다. 세대별 레기온과 미르미돈은 물론이고, 지금은 사라진 모델까지 있었다.
“병기고 안내는 네 역할이야?”
나는 나란히 걷는 지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왜 아카데미에서 기계공학을 배운다고 생각해?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병기고 관리와 정비는 여자가 맡아.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는 물건도 있으니까. 꽤 중요한 자리지. 지금은 어머니가 병기고 주인을 맡고 계셔. 나중엔 내가 이어받을 거고.”
“기름때가 어울릴 분위기는 아니시던데…….”
나는 양어머니 에바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귀부인이었다.
“실력만큼은 대단해. 지금도 아버지의 의체와 무구는 어머니가 맡아서 정비하시거든.”
“귀족은 정략결혼이 많지 않아? 만약 사이가 나쁘면…….”
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지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 그러니까 정비를 어머니에게 맡기는 거지. 가문의 오랜 전통이야. 믿음과 신뢰가 단단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거든.”
지젤의 말을 듣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홀린 듯이 고개를 들어 낡은 전갑의체를 응시했다.
레기온의 흔적이 드문드문 보이는 전갑의체였다. 그러나 좀 더 투박했고, 오랜 개수를 거치며 사용했는지 파츠의 색깔 일관되지 않고 변색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외뿔이 달린 머리와 비대칭 팔이었다. 오른팔이 왼팔보다 좀 더 길고 컸다. 어떤 특수한 무기를 다루기 위한 개조인 듯했다.
아마도 레기온의 오랜 조상쯤 되는 모델일 것이다. 쿠스토리아 가문은 근위대와 대대로 연이 깊으니까.
난 옛 전갑의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시선을 계속 잡아끌었다.
“루카?”
지젤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잠시 생각 좀 했어.”
“피곤해도 이건 보고 가야 해. 우리 가문의 역사와 관련된 물건이니까. 전갑의체 스킬라야.”
지젤이 외뿔 전갑의체 앞에 서며 말했다.
“스킬라?”
“모델명은 아니고 그냥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돼. 이것과 같은 모델의 전갑의체는 없거든. 쿠스토리아 가문의 시조…… 아가타의 전용 전갑의체야. 이건 외부엔 절대 반출되지 않아. 지금은 미르미돈보다 못한 골동품이지만 일단은 가보거든.”
전갑의체 스킬라, 시조 아가타 쿠스토리아.
나는 눈을 들어서 스킬라의 모습을 사진 찍듯 머릿속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