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52)
배드 본 블러드-52화(52/197)
052
진통제를 두둑이 맞은 가브리엘이 날 따라 나왔다.
“젠장, 아파죽겠네!”
가브리엘이 소리를 지르며 투덜거렸다. 나는 귀가 따가워서 인상을 찌푸렸다.
“엄살 피우지 마. 덩치가 아깝다.”
“난 엊그제 총에 맞았다고! 총에!”
“내가 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너, 너는 사람의 마음도 없는 거냐?”
나는 가브리엘의 불만을 무시하며 암시장으로 향했다. 길은 가브리엘이 잘 알고 있었다.
“비켜, 비켜.”
가브리엘이 험악하게 말하며 인파를 헤집고 갔다. 덕분에 길도 넓었고, 소매치기도 옆에 붙지 않아서 편안했다.
길고 긴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불법 증축으로 얽힌 건물더미가 보였다. 일조권 따윈 고려하지 않았기에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운 곳이 많았다. 암시장이 가까워졌다.
암시장 변두리에는 갱단의 영업허가도 받지 못한 부랑자들이 장물을 팔고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본격적인 암시장이 나왔다. 좌판의 규모도 컸고, 번듯한 가게도 있었다.
“가브리엘? 총에 맞았다면서? 용케도 살았네.”
“벌써 소문이 퍼진 거야?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아주 죽여버릴 거야. 지금도 아파 죽겠다고.”
가브리엘이 지인과 떠들어댔다. 지인은 렌즈형 안구를 빛내며 금속으로 된 앞니를 드러냈다.
“옆에는 누구야?”
“아, 얘는…… 어, 음.”
가브리엘은 날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나는 눈을 옅게 뜨며 대신 대답했다.
“가브리엘의 보스다.”
내가 그리 말하자, 가브리엘이 나를 쳐다봤다.
“네가 왜 내 보스야?”
“그럼 고용주라고 치자고.”
“뭐, 그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우리의 대화를 듣던 가브리엘의 지인이 웃었다.
“암시장으로 놀러 온 도련님이요? 호위를 잘 골랐군. 가브리엘은 믿을 수 있지. 적어도 돈 받아 처먹고 뒤통수를 칠 녀석은 아니야.”
그는 나를 상층 구역의 귀족 도련님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어느 정돈 맞는 말이지.
우린 계속 길을 걸어갔다. 인파 너머로 투기장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가가 좋네, 가브리엘.”
“혼자 활동할수록 평판이 중요하니까. 나도 여태 살아남은 이유가 있어.”
가브리엘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날개뼈에 새겨진 날개 문신이 퍼덕거리듯 움직였다.
“평판이 좋아서 총에 맞은 거냐?”
“그건 날 쏜 새끼들이 쓰레기인 거지. 자기들도 당당했으면 날 쏘면서 정체를 밝혔을걸.”
우린 암시장의 입구에 섰다. 경비를 서던 갱이 나와 가브리엘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가브리엘? 총 맞았다면서? 오늘은 네 시합이 있는 날도 아니잖아.”
“도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거야? 하여튼 알레프에게 볼일이 있어.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
“이 소년은 누군데?”
“굿보이잖아. 예전에 경기 몇 번 뛰었던 녀석 말이야.”
경비는 그제야 날 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 널 때려눕힌……. 이야, 몇 달 만에 온 거야? 잠시만 기다려. 어, 나야. 알레프 형님에게 가브리엘과 굿보이가 왔다고 전해줘.”
경비가 귓가에 손을 대며 무전했다. 귀에서 안구까지 연결된 외부 회로가 빛났다. 답신을 받은 그가 투기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오, 가브리엘! 총에 맞았다고 하더니 괜찮나? 그리고 굿보이, 오랜만이군.”
여전히 날카로운 인상의 알레프가 귀빈을 맞이하듯 일어서며 우리를 반겼다.
“굿보이가 아니라 루카라고 불러.”
“선생님은 이번에 같이 오시지 않았군.”
알레프가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의미로 입을 다시며 말했다. 선생님은 키누안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오늘은 내 일로 온 거야.”
“흐음, 시합이라도 잡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부하를 물렸으면 하는데.”
나는 알레프의 등 뒤에 있는 부하 두 명을 흘겨보며 말했다. 무장한 갱이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그건 안돼. 난 싸움에 능한 편은 아니거든.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알레프가 검지를 세워서 좌우로 흔들었다.
“내게 저 뒤에 두 명은 허수아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호위로 의미가 없어. 궁금하면 시험해 봐. 내가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너희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는 거야.”
내 말에 호위 두 명이 발끈하며 눈을 찌푸렸다. 그들은 총기를 세게 쥐었다.
“이봐, 굿보이.”
“루카라니까.”
내가 서늘하게 말했다.
“굿보이든 루카든 간에……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건방지게 굴지 마. 난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네의 무례를 넘어갈 이유는 아니니까.”
알레프가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며 말했다.
“가브리엘, 문을 몸으로 막아.”
“어?”
가브리엘의 어리숙한 대답을 들으며 내가 움직였다.
퉁!
난 무릎을 살짝 숙이며 뛰어올랐다. 내 손가락이 천장의 콘크리트에 박혔다. 천장에 거꾸로 들러붙은 내가 호위 두 명을 쳐다봤다. 그들의 총구는 내 움직임보다 늦다.
내겐 말재주가 없다. 무력으로 제압해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쿠웅!
내가 천장을 할퀴듯 빙글 돌며 낙하했다. 내 발끝이 호위의 총구를 걷어찼다.
탕!
궤적이 뒤틀린 총구는 허망하게 총알을 낭비했다. 다른 한 명이 나를 조준하려 했다.
휙!
나는 상체를 숙여 사선에서 벗어났다. 총성이 퍼지면서 총알은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덥썩!
난 호위 두 명 사이에서 일어서며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내 손아귀엔 총구가 하나씩 잡혔다.
으드득!
내 손아귀에서 총구가 으스러졌다. 방아쇠를 당겼다간 총이 터질 것이다.
지금의 나는 투기장에서 싸우던 시절과 다르다. 과거의 내가 서너 명씩 덤벼도 지금의 날 이기지 못한다. 수어 달 동안 난 그만큼 성장했다.
“……호위가 의미가 없긴 하군.”
알레프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손을 흔들어 호위를 밖으로 내보냈다. 호위들은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세우듯 바닥에 침을 뱉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굿보이…… 아니, 루카. 너 군인이지? 그것도 꽤 상급 부대 소속 같은데 말이야. 그럼 키누안 선생님도 군인이었나?”
알레프가 예리하게 말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그가 괜히 투기장 관리자까지 올라간 게 아니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끼어들 때와 빠질 때는 잘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이봐, 협박하려면 얼마든지 해도 좋아. 하지만 군이 엮인 일이라면 사절이야. 우린 밑바닥에서 빌어먹는 사람들이라고. 뒤지고 싶지 않아.”
알레프는 내 무력 과시를 보고도 협조를 거절했다. 난 그의 현명한 판단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겐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뭔가 해달라는 건 아니야. 정보가 필요한 것뿐이니까.”
“그게 그거지. 난 내 역량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에 끼어들지 않아.”
난 알레프의 목을 붙잡아 벽까지 밀며 협박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수단에 굴복할 것 같진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단말기를 내밀었다.
“그럼 내 신분을 확인해라, 알레프.”
“귀족 집안의 도련님이라는 걸 안다고 달라질 건 없어.”
“……네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배경이 돼줄 수도 있지.”
내 단말기 화면에는 내 신분을 증명하는 복잡한 코드가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바뀌기 때문에 위조나 복사가 어려운 최신 보안 코드다.
마지못해 알레프가 자신의 단말기로 내 코드를 훑었다.
알레프의 단말기 성능이 좀 떨어지는지라 코드 분해와 해석에 시간이 걸렸다. 그래 봐야 5초 정도 걸릴 뿐이었다.
알레프는 자신의 단말기 화면을 확인하더니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동공은 한없이 커졌다. 손끝도 떨리고 있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그의 단말기에 내 신상정보가 떠올랐을 것이다. 보통 집안과 신분이 아니다. 현 근위대장의 가문이며…… 양자이지만, 난 근위대장의 아들이다. 더군다나 알레프의 단말기에선 내가 양자라는 사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겠군. 하, 하하.”
알레프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의 한쪽 다리도 눈에 띄게 떨렸다.
“알레프, 나와 이야기할 준비가 됐어?”
기다리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일단 먼저 물어볼 게 있네, 도련님. 댁을 도와줘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내게 빚을 지워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긴장을 가라앉힌 알레프가 명료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렇긴 하지만, 나도 욕심을 좀 부려볼까 해서. 위험을 감수할 거면 확실한 대가가 필요하잖아. 안 그래?”
“이야기가 잘 통하고 손발이 잘 맞으면…… 그쪽과 꾸준히 교류할 수도 있지.”
“그건 됐어. 내가 도련님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까? 아니, 뭐, 확실히 말하지, ‘종사’로 임명해줘.”
알레프가 빠르게 요구를 꺼냈다. 일종의 주종계약이다.
알레프는 내 보증을 얻어 종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보증을 받은 자는 귀족의 종사로서 상층 구역 거주권을 얻을 수 있다. 그 대신, 종사는 주인의 충실한 신하가 된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알레프가 상층 구역에서 사고를 친다면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종, 종사? 지금 내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야?”
내 뒤에 있는 가브리엘은 대화 내용을 따라가기 힘든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알레프는 가브리엘을 무시하며 서로의 얼굴을 봤다. 아직 난 개인적인 종사를 임명해 부릴 정도로 가문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미성년자라서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직 난 미성년자야.”
“알아. 아직은 약속이면 충분해. 1년 후면 임명권을 얻잖아. 그동안 난 도련님의 종사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나도 다짜고짜 거저 해달라는 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구두지만 계약 관계가 형성됐다.
“좋아, 뭐든 맡겨만 주시죠, 도련님. 오늘부터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내 손을 잡은 알레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 투기장 관리자 토라에 대해 조사해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알레프의 전임자인 토라는 키누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토라를 조사하면 키누안의 흔적이 나올 수도 있었다.
“토라 말입니까? 음,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조사가 끝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레프는 말이 잘 통했다.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어정쩡한 귀족 가문이었다면 알레프가 쉽게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쿠스토리아 가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쿠스토리아 가문원의 보증이 있으면 어지간한 하급 귀족보다 나은 대우를 받는다.
쿠스토리아의 후광은 유용하다. 이것 또한 내가 거머쥔 힘이다.
알레프와 이야기를 끝낸 나는 가브리엘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가브리엘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나도 너를 루, 루카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알레프가 빌빌거릴 정도면 신분이 엄청 높은 거잖아. 으음, 흠.”
가브리엘의 뇌리에는 그간의 욕설과 무례가 떠올랐을 것이다. 내가 상층 구역에서 왔다는 건 알았어도 고위 귀족이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키누안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부르고 싶어?”
“음, 그건 아니지. 넌 싹퉁머…… 아니, 크흠.”
“그럼 됐으니까. 하던 대로 해. 결국, 나도 이쪽 바닥 출신이니까. 낯간지러운 소리는 듣기 싫어.”
내 말에 가브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 바닥? 뭔 소리야? 넌 귀족이잖아.”
“알아서 생각해.”
가브리엘이 눈을 찌푸리며 내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정답을 찾지 못한 그의 미간에는 주름만 깊어졌다.
일반적으로 나 정도의 출세는 상상하기 힘드니까. 나도 몇 년 전까진 그랬다. 감개무량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