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57)
배드 본 블러드-57화(57/197)
057
마르티나는 고혹적인 동양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청백색 파도와 바다를 형상화한 무늬가 그녀의 드레스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펼친 부채로는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눈동자 테두리가 가늘게 빛났다.
따각, 따각.
마르티나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소리가 고요히 퍼졌다.
“누가 손님을 이렇게 대하라고 했지?”
마르티나가 안대 여자에게 말했다.
“제…… 독단입니다. 죄송합니다, 디바.”
안대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난 그게 거짓이라는 걸 대번 알아챘다. 말꼬리를 살짝 끌며 생각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날 제거하려다가 실패했으면서 체면치레하며 얼버무리고 있군.’
난 진실을 알지만 내뱉진 않았다. 여기서 내가 저들의 체면을 구기며 추궁했다간 라비앙로즈 갱단 전체와 싸워야 한다.
할 순 있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시체를 수십여 구를 치워야겠지. 그 정도 사고를 치면 난 당분간 하층 구역에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내 뒷조사 임무도 쫑나는 셈이고.
“미안하게 됐어. 내 부하가 과잉 충성을 했네. 도련님의 이름은?”
마르티나가 자리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른 부하에게 손짓해 시체를 치우도록 했다.
“루카.”
나는 짧게 대답했다. 분위기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마르티나의 부하들도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차분한 나와 달리 가브리엘은 씩씩거리며 마르티나에게 다가갔다. 그가 탁자를 양손으로 치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르티나, 날 초대해 놓고 기습이라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해?”
“부하의 실수라고 했잖아.”
“뻔뻔한……!”
가브리엘이 난리 치기 전에 내가 끼어들었다.
“진정해, 가브리엘. 우린 이야기를 하러 왔잖아.”
내 말에 가브리엘이 뒤로 물러났다. 이걸로 우리 사이의 상하 관계를 마르티나도 알아챘을 것이다.
마르티나는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지 알아채곤 나를 응시했다.
“도련님은 하층 구역 사람도 아니면서 왜 이쪽 일에 끼어드는 거야?”
이젠 상층 구역 사람으로 취급받는 게 익숙했다. 누가 봐도 내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그쪽이 알 바는 아니고.”
“우린 라비앙로즈야. 귀족이라고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미리 말해둘게.”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수도의 쥐새끼들이 무리를 좀 지었다고 뭐라도 된 줄 아는군, 나 원.”
내 어깨가 웃음으로 떨렸다.
마르티나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의 부하 사이에서도 움직임이 일었다. 여차하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전투 기술을 보고도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머저리거나 상대의 역량을 가늠도 못하는 수준이라는 소리다.
“잠시만요, 디바.”
안대 여자가 마르티나의 곁에 서더니 뭐라 속삭였다. 마르티나의 표정이 변했다.
안대 여자는 나와 싸우면 안 된다고 자신의 보스에게 조언했을 것이다.
탁!
표정을 갈무리한 마르티나가 한숨을 쉬며 부채를 접었다. 그녀의 하관이 드러났다. 얼굴에 손을 대면 미남미녀가 되는 건 일도 아닌 세상이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마르티나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단순히 이목구비가 예쁘다를 넘어서서 묘한 아우라가 있었다. 색기라도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자가 가브리엘을 좋아한다고?’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그녀는 권력과 미모를 다 가진 여자다. 그에 비하면 가브리엘은 그저 거리의 불량배에 불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요구는 하나야. 가브리엘이 내 애인이 되는 것. 당연히 라비앙로즈의 일원이 돼야 하고.”
마르티나가 내 뒤에 서 있는 가브리엘을 힐끗 쳐다보며 옅게 웃었다. 가브리엘은 여인의 과감한 추파에도 눈만 찌푸렸다.
“누구 맘대로? 난 누구 밑에 들어가는 게 질색이야.”
“하지만 가브리엘, 너는 이 도련님 밑에서 일하고 있잖아.”
“그, 그건 동, 동업자 같은 거야. 빚을 진 게 있어서…….”
가브리엘의 성격상 빚을 진 사람에게 약하다. 그래서 마르티나도 ‘병 주고 약 주고 작전’으로 가브리엘에게 빚을 지워두려고 했다. 그러면 부하로 부릴 수 있으니까.
“난 가브리엘의 보스가 아니야. 돈을 대주는 후원자나 의뢰인에 가깝지. 가브리엘이 날 떠나더라도 누구처럼 총을 쏘거나 습격하지도 않을 거고.”
내가 말을 거들었다. 가브리엘은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루카, 말 잘했어. 들었지? 마르티나? 루카는 내 보스가 아니라고. 이제 알겠어?”
마르티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표정이었다. 여자에 둔감한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끌릴 뻔했다.
“가브리엘, 감히 너 따위가 누님을 거부해? 길바닥의 부랑자나 다를 바 없는 새끼가?”
갱단원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마르티나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을 내뱉은 사내를 노려봤다.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저, 저도 모르게…….”
나는 자리에 일어서며 가브리엘과 잠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우린 갱단원과 거리를 둔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가브리엘, 저 여자랑 당분간 만나고 잠자리도 가져. 그게 일이 편할 거야. 갱단에 들어갈 필요는 없고, 연인 사이만 유지해. 이 정도만 타협해도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싫, 싫어.”
가브리엘이 기겁했다. 나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보고선 다시 한번 마르티나의 미모를 확인했다.
“야, 뭐가 문젠데? 네 얼굴로 저런 미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짜증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그냥 눈 질끈 감으면 되는 문제였다.
“저 여자는 나이가 나보다 많아.”
“나이가 좀 많으면 어때서.”
“돌아가신 내 할머니보다 연상이라고, 시발.”
음, 이건 잠시 고민할 만한 문제긴 하다. 하지만 난 태연한 척 가브리엘을 달랬다.
“……어차피 껍데기는 멀쩡하잖아.”
“난 못해, 차라리 여기서 날 죽여.”
가브리엘이 완고히 거절했다. 이 정도 반응이면 당장은 가브리엘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로 내 동공이 요동치듯 움직였다. 깊게 생각하며 결론을 냈다.
가브리엘과 나 사이에는 유대가 있었다. 이건 돈과 힘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관계다.
내겐 당장 유대감이 형성된 부하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로 가브리엘은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다. 갱단 따위에게 가브리엘을 내줄 순 없다.
‘협상이…… 안 되면 힘으로 눌러야지. 어쩔 수 없어.’
나는 자리로 돌아와서 마르티나 앞에 앉았다. 난 의도적으로 딱딱하게 앉았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됐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가브리엘은 자신만의 조직을 꾸렸어. 그러니까 너희 라비앙로즈와 함께할 수 없다.”
내가 단언했다.
마르티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 찰나만큼은 아리따운 미녀가 아니라 그 안에 갇혀있는 노파의 일부가 드러났다. 좀 웃긴 말이지만, 내면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갱단을 만들겠다고? 우리를 무시하고도 멀쩡히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도련님은 이곳 물정에 잘 모르나 본데…….”
“난 몰라도 투기장의 알레프는 이쪽 생리를 잘 알겠지. 이미 그쪽하고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자고 이야기를 끝냈어. 투기장 파벌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브리엘 갱단이 자리 잡는 건은 어렵지 않아.”
“……난 지금까지 원하는 남자를 놓친 적이 없어.”
“그럼 이번이 첫 경험이겠군. 그 나이에 ‘처음’은 신선한 경험이잖아. 즐기라고.”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언어유희였다. 내심 자랑스럽다.
마르티나는 날 제쳐두고 이번에는 가브리엘을 쳐다봤다. 가브리엘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가브리엘, 난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너에게 해줄 수 있어. 제발, 내 곁에 있어줘.”
이 정도로 간곡할 줄은 몰랐다. 가브리엘도 당황했는지 마르티나의 시선을 피했다.
“가브리엘은 대답한 것 같은데? 이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면 무력시위를 시작해 보던가.”
내 경고에 침묵이 일었다.
톡, 톡, 톡.
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쳤다. 내 한쪽 발도 같이 바닥을 두드렸다.
서서히 전투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전부 죽일 생각이다. 협상에 실패하면 방법은 이것뿐이지.
“하아……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왕 온 김에 사업 이야기나 하자고, 도련님. 갱단을 만들겠다고?”
마르티나가 등을 의자에 대며 김샌 표정을 지었다.
“뭐?”
나도 당황했다.
“갱단을 만들겠다면서? 보아하니 도련님 담력과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그런 상대를 적으로 둘 생각은 없어.
마르티나는 언제 애걸복걸했냐는 듯이 태도를 바꿨다. 전투 준비를 하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마, 마르티나? 날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해?”
이번엔 가브리엘이 반문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르티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난 못생긴 남자에게 매달리는 걸 좋아해. 내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이 들거든.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몸이 저릿저릿하지. 특히 역겨울 정도로 못난 남자에게 깔릴 때…….”
마르티나가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살짝 떨었다. 난 홍조가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오래 살면 기괴해진다는 게 귀족들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했다. 반세기도 살지 못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설명은 거기서 끝내. 난 네 이상성욕과 변태적인 취향에 관심이 없으니까.”
내 지적에 마르티나는 한쪽 입술만 비틀더니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그녀의 주름이 종종 깊어질 때마다 노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우린 말 그대로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가브리엘 갱단의 규모를 어느 정도까진 키울 생각이었다. 앞으로 내가 하층 구역에 영향력을 미쳐야 할 일이 있으면 도움이 될 테니까.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은 경호와 용역이야. 가브리엘이 잘하는 일이지. 그쪽 사업과 겹치는 일은 없어. 오히려 그쪽 가게의 경비를 외부인에게 맡길 때도 있다면서?”
우린 라비앙로즈 구역의 가게 경비를 종종 맡기로 했다. 가브리엘이 원래 하던 일의 연장선이었다.
이야기하던 마르티나가 손짓하더니 안대 여자를 불렀다.
“……도련님, 당분간은 그쪽 일손이 부족하지? 내 부하를 하나 빌려줄게.”
의도는 뻔했다. 심복을 우리 곁에 둬서 내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에 훤히 보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이 모아온 약쟁이들보다 저 안대 여자가 몇 배는 더 유용하겠지.’
내겐 버리기 좋은 패가 하나 더 들어온 셈이다.
“그레이스입니다, 도련님.”
안대 여자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공손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도련님이 아니라 루카야.”
“알겠습니다, 루카 님.”
나와 그레이스의 인사가 끝났다.
마르티나는 곁눈질로 그레이스를 보며 자랑스레 설명을 덧붙였다.
“놀라지 마, 도련님. 그레이스는 근위대 생도 출신이야. 중간에 관두긴 했지만 대단한 이력이지.”
난 잠시 침묵하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야, 놀랍네. 근위대 생도 출신이라고?”
놀랐다는 말은 연기가 아니라 사실이다.
당연히 놀랄 만하지. 이런 시궁창에서 선배님을 만날 줄이야. 비록 저쪽은 완주하지 못한 반쪽짜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