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59)
배드 본 블러드-59화(59/197)
059
나는 알레프에게 토라의 장부를 받았다. 칩을 단말기에 넣어서 확인해 보니 십수 년에 걸친 거래 내역이 나왔다.
“역시 수완이 좋으십니다. 도련님, 벌써 라비앙로즈와 협상을 하셨다니 말입니다.”
알레프가 날 배웅하며 말했다.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그는 그레이스가 어디 소속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알레프는 토라의 장부를 어디에 쓸 것인지 내게 묻지도 않았다. 영리한 사내다. 눈치도 빠르고 강자의 비위를 맞추는데도 능했다.
나와 그레이스를 투기장을 빠져나왔다.
“루카 님, 알레프를 신뢰하십니까?”
그레이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덤벼든 소매치기의 팔을 잡아서 부러뜨리고 있었다. 싸구려 의수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저 사내를 신뢰하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보였다면 네 남은 눈깔도 빼버리는 게 낫겠네.”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차라리 디바가…….”
“믿기 힘든 건 너희 보스도 마찬가지야. 변덕스럽고 종잡기 힘든 여자지.”
내가 마르티나를 험담하자, 그레이스는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충성심이 대단하군.
‘왜 생도를 관둔 거지?’
그레이스는 군인다운 성향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니까 선별검사를 통과해 생도로 뽑힌 것이다.
“루카 님이 어떤 조건을 내밀었는지 모르지만, 알레프는 저울이 기우는 쪽으로 움직이는 남자입니다. 불리해지면 배신하는 사람이죠.”
“알레프의 평판은 나도 잘 알아. 넌 이만 가도 좋아. 오늘 일정은 끝이니까.”
“사무실까지 호위하겠습니다.”
그레이스가 습관적으로 말했다.
“하하, 누가 누굴 호위한다고?”
내가 웃었다. 그레이스가 잠깐이지만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가서 디바에게 오늘의 일이나 보고해. 그게 네 업무잖아.”
난 그레이스를 내보내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단말기와 내 망막 디스플레이를 연동해서 토라의 장부를 재차 확인했다.
‘켄은 B로 시작하는 업체를 찾으라 했지.’
목록을 추린 나는 하층 구역의 싸구려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내 단말기의 방화벽이 작동하면서 바이러스를 걸러내고 있었다.
‘전부 다 오래전에 폐업했군.’
내 정보력으론 폐업한 회사의 흔적을 추적할 방법이 없다. 하층 구역의 네트워크와 데이터는 휘발성이 강한 데다가 잘못된 사실을 기록한 오염된 자료가 많았다. 유령 회사가 키누안의 것이라면 분명히 더미 데이터를 뿌려놨을 것이다.
공신력 있고 오염되지 않은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야 한다. 내가 접촉 가능한 근위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런 시시콜콜한 자료까진 없었다.
‘니콜라오스 쿠스토리아.’
내 뇌리에서 한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장남 니콜라오스. 제국의 고위 관료인 데다가 유능한 사내다. 명목상으론 내 형이기도 하다.
나는 단말기를 조작해 회선을 바꿨다. 최고 보안 등급에 속하는 일회용 회선이었다. 이걸 한 번 사용하면 하층민의 일급이 증발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나도 금전 감각은 하층민에 가까웠다.
어쨌거나 니콜라오스에게 호출을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락이 닿았다.
-바쁜 업무를 제쳐두고 왔네, 동생. 음, 이야기할 시간은 5분을 내주지.
단말기 너머에서 니콜라오스가 말했다.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니콜라오스에게 5분을 줄 테니 날 설득하라고 했다.
“제국의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고 싶습니다. 형님에겐 권한이 있을 것 같아서요.”
-있기야 있지. 하지만 자네에게 권한을 넘겨줄 순 없어. 아직은 내 머리를 어깨 위에 얹어두고 싶거든.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어려운 제안 다음에 쉬운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유령 회사 몇 개만 조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게 빚을 지운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루카, 자네가 가문 내의 지위를 올리는데, 도움이 되는 일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목록을 추려서 보내게.
니콜라오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틀 내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대충 훑어보니 길어야 두 시간이면 충분해.
유능한 일 처리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빚은 갚겠습니다.”
-형제끼리 서로 도와야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니콜라오스가 사람 좋은 척하며 통신을 끊었다.
분명 니콜라오스는 오늘의 빚을 이자까지 쳐서 받아낼 것이다. 내게 어려운 요구를 하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당장은 내 앞에 닥친 일이 먼저다.
* * *
‘켄 노마, 갱단 조직, 라비앙로즈, 투기장의 알레프.’
나는 이 일들을 연달아 처리하느라 사흘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다. 쪽잠과 짧은 명상으로 대체한 게 고작이었다. 피로가 누적된 탓에 머리가 몹시 무거웠다.
나는 상층 구역으로 올라가는 승강기에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니콜라오스가 보낸 자료까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이젠 한계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대뇌피질에 이물질이 낀 듯이 사고가 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내 물로 씻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도중에 나보다 아래 기수의 생도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저러했었지. 고작 2, 3년 전의 일인데도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아무도 날 호출하지 않길…….’
지금 마음 같아선 헤일라스가 부르더라도 짜증을 드러낼 것 같았다.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미 한계인지라 바로 잠들 수 있었다. 의지력으로 의식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뇌는 언제든 빛을 끌 준비를 마친 상태다.
빛이여, 사라질지어다.
내가 나직이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의식이 끊어졌다. 적막과도 같은 수마가 날 덮쳤다.
……나는 정확히 여섯 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물론 초 단위로 정확한 건 아니다.
벽면 디스플레이로 수면 시간을 확인하니 오차는 10초 정도였다. 체내 시계가 흐트러지지 않았군. 컨디션이 좋다는 뜻이다.
삑.
나는 단말기를 벽면 디스플레이와 연동했다. 근위대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온 메시지와 연락이 쌓여있었다.
나는 생도의 활동 기록에서 시선을 멈췄다. 일레이의 이름이 유독 많이 보였다.
‘일레이, 도대체 내가 없는 동안 임무를 얼마나 해치운 거야?’
일레이의 임무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중에선 가벼이 여기기 힘든 임무도 여럿이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도 자진해서 도맡다시피 했군.’
그러니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나도 일레이도 각자의 일로 바빴다. 같은 임무를 수행할 일도 없기에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꽤 됐다.
‘원래라면 지금쯤 일레이가 한 번 찾아올 텐데…….’
내 성격은 살갑지 않다. 볼일도 없이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일레이는 종종 날 만나러 왔다.
그랬던 일레이의 연락이 없으니 섭섭한 마음이 살짝 들었다. 뭐, 답답하면 내가 찾아가면 될 일이기도 하다.
그래, 한 번 정도는 내가 먼저 안부를 묻고 찾아가야지.
난 결정을 내리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빠르게 몸을 씻어낸 나는 생도복으로 갈아입고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루카, 요즘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수석에서 금방 멀어질 거다. 수료가 얼마 남지 않았어.”
복도에서 마주친 동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남이사.”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레이가 요즘 미쳐 날뛰고 있잖아. 어쩌면 훈련소 역사상 최다임무 기록을 세울 수도 있어.”
동기의 말은 호들갑이 아니었다. 나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생도 평가에선 실전경험, 즉 임무 수행을 가장 높게 친다.
“그럼 일레이가 수석을 하라지.”
“쿠스토리아 가문에 들었다고 여유만만이구나, 짜식. 하기야 나라도 근위대장님의 양자로 들어갔으면 마음 편하게 있겠다.”
나도 내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다. 내 속도 모르면서 지껄이는 동기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지금 동기 중에서 누구보다 칼날 위를 걷는 게 나다. 너무 높게 올라와서 이젠 내려가지도 못한다. 삐끗하면 추락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걸 호랑이 등에 탔다고 말하던가?
여기까지 온 이상에야 그만둔다면 ‘처분’당할뿐이다.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얻은 대가로 맡은 임무는 막중하면서도 복잡했다.
‘가끔은 예전이 그립기도 해.’
과거의 나는 복잡한 일을 생각할 게 없었다.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고 닦으며 앞만 보면 됐다. 적과 아군은 윗사람이 정해줬다. 난 그저 칼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기면 됐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누가 아군인지 적인지조차 내가 스스로 판단해 구분해야 한다. 누굴 따르고 누굴 믿을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다.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몇 번이고 집어치우고 싶었다.
‘나도 알아! 이 임무가 내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난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앞으로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 그리고 제국의 상급 군인으로 성공하려면 전투 말고도 다양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전부 해결하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대단한 사내가 될 것이다. 키누안이나 헤일라스같은 부류 말이다. 저들도 사람의 자식이다. 태어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라는 소리지.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했을 터다.
‘나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루카? 표정이 왜 그래? 비꼴 생각은 아니었어. 네가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건 누구보다 같이 훈련한 우리가 잘 알아.”
내 표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기의 말 덕분에 나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귀족 도련님조차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이게 내가 얻고 싶었던 지위와 권력이다. 누구의 아량과 자비가 아니라 내 힘으로 거머쥔 자리지.
나는 이 조그마한 권력조차 놓지 않을 것이다. 눈덩이를 굴리듯 키워나갈 생각이다.
“잠을 며칠 못 자서 그래. 귀족 도련님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
내가 주먹을 뻗자 동기도 주먹을 맞댔다. 우린 그렇게 인사하며 지나쳤다.
나는 일레이가 있는 개인정비실로 향했다. 메시지를 미리 전송했지만 바쁜지 답신은 없었다.
정비실의 홀로그램 문패에는 일레이 카르티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일레이가 지금 사용 중이라는 뜻이다.
삑.
센서가 날 인식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천장에서 내려온 정비용 기계 팔이었다. 그 옆에는 안드로이드가 정비를 보조하고 있었다.
정비 의자에는 일레이가 누워있었다. 그의 팔다리는 내부까지 활짝 열린 상태였다. 정교한 기계 손이 의체의 부품을 교체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여, 루카.”
일레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반겼다.
“요즘 몸을 험하게 굴린다면서? 카르티카 도련님.”
나는 벽에 기댄 채로 넌지시 말했다. 내 눈동자는 일레이의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훑고 있었다.
‘일레이는 변했다.’
서너 달 사이에 일레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속된 임무 때문에 갈지 못한 인공피부에는 생채기가 많았다. 내부가 드러난 의체의 부품은 닳아있었다. 그만한 격전을 연거푸 치렀다는 뜻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군.’
원래부터 일레이의 재능은 나보다 위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일레이는 훈련소에서 ‘열심히 노력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럭저럭하는 것만으로도 나와 대등한 성취를 이뤘다.
반면에 나는 정말로 피똥을 싸듯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이건 부정하기 힘든 객관적 사실이다. 일레이는 나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그리고 게으른 천재가 드디어 목적을 세우고 자신을 갈고닦고 있었다.
일레이는 그간의 실전 경험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 소화하며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일레이가 강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간 전투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기도 했고.’
일레이와 마주하니 초조함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아까 마주친 동기의 말이 생각났다. 수석과 차석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 녀석이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았다.
릴리안 라모네스 사건 때, 일레이는 나쁜 의미로 폭주했다.
‘그리고 지금은 좋은 의미로 폭주하고 있어.’
정비를 마친 일레이의 의수와 의족이 닫혔다. 천장에서 내려온 기계 팔이 접합부를 마감하며 밀봉했다.
“루카, 따라와. 내 전리품을 보여줄게.”
정비 의자에서 일어선 일레이가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그는 내가 찾아온 용건을 묻지도 않았다. 이번 방문이 안부 목적이라는 걸 녀석도 이미 알고 있겠지. 생각하다 보니 괜히 낯부끄러워졌다.
“그 천하의 루카가 안부 목적으로 날 찾아올 줄이야. 놀랍네, 놀라워. 친구가 된 보람이 있네.”
일레이는 정비실을 나가면서 날 놀리는 걸 잊지 않았다.
“뭐래, 병신아.”
나는 욕을 내뱉으며 일레이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