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64)
배드 본 블러드-64화(64/197)
064
켄 노마는 내 추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키누안의 후원을 받은 건 바로 토라가 아니라 켄이다.
나는 토라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켄 노마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아키에스 전투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혔다. 하층 구역에서 당해낼 자가 몇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토라가 켄 노마를 부하로 부릴 역량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키누안이 켄 노마를 통해 하층 구역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켄 노마는 토라를 보스로 내세워 방패로 삼았다.
이게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관계도였다.
‘켄을 죽일 방법은 무수히 많다.’
켄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내 모습이 잔영처럼 수두룩하게 보였다.
놈이 아무리 잘나봐야 폐인 상태에서 약물을 통해 뇌를 강제로 깨운 상태다. 팔다리는 보급형 의체였고, 아키에스 전투술 숙련도도 나보다 높진 않았다.
그러나 켄을 죽여서 내가 얻을 건 없다. 생포만이 유일한 이득이다.
짐승조차 죽이는 것보다 생포가 훨씬 힘들다. 그 상대가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키이잉!
켄이 양손으로 칼을 바로잡았다. 칼끝이 반원의 궤적을 그리더니 바닥까지 깔끔하게 떨어졌다.
켄의 자세가 정갈했다. 재기불능에 빠지기 이전에는 대단한 실력자였을 것이다. 알레프가 어떤 수단을 통해 켄을 제압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마 꽤 비겁한 수단이었겠지. 그러니까 켄이 이토록 이를 가는 것이다.
퉁!
내가 땅을 박차며 나아갔다.
난 크루시스를 휘둘러서 켄의 칼을 부수려고 했다. 켄의 칼도 꽤 괜찮은 수준이지만, 내 크루시스는 제국의 공방에서 생산한 고압축 중량병기다. 맞부딪히면 켄의 칼이 유리처럼 깨질 것이다.
휘릭!
켄은 노련한 검사였다. 칼을 맞대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 공격을 피했다. 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게 본연의 실력인지 아니면 약물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휙!
내 생체 부위만 노리는 켄의 찌르기가 날카롭다. 내 팔다리 사이로 칼끝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냥 죽여버릴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켄은 까다로운 상대였다. 자칫하다간 내가 당할 것만 같았다.
“아키에스?”
나는 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켄도 그제야 내 움직임을 보고 알아챈 듯했다. 같은 아키에스 전투술 사용자라도, 고성능 의체는 아키에스 전투술 특유의 움직임 빈도가 낮다.
나는 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켄이 키누안에게 아키에스 전투술을 배웠다면…… 나와 동문인 셈이다. 뭐, 그런 걸 따지는 게 웃기긴 하다.
‘재능을 안타깝게 낭비했구나, 켄.’
그 재능을 제국을 섬기는데 활용했다면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일반적인 전투와 달랐다. 둘 다 아키에스 전투술의 숙련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합을 맞춘 듯이 서로의 공격과 방어가 맞아떨어졌다. 수를 네다섯은 앞서 보고 있기에 일반적인 직관으론 이해가 어려운 위치 선정도 있었다.
근위대 생도 출신인 그레이스조차 우리의 싸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브리엘은 말할 것도 없고.
‘켄을 생포하려면, 더 멀리, 더 많이, 더 높이…… 흐름을 읽어야 한다.’
난 사고를 가속했다.
키누안의 조언을 떠올렸다. 난 아직 뇌의 전부 활용하지 않고 있다. 근위대원은 레기온이라는 초고성능 전갑의체를 사용하기 위해 뇌 신경계의 자원과 대역폭을 극단적으로 늘려야 한다. 난 그 훈련을 4년 가까이 받아왔다.
난 더 끌어 쓸 수 있다.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라.
이미 내가 인지한 시야와 정보 내에선 연산 처리를 전부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뇌의 가용자원이 남는다.
난 한 가지 활용법을 떠올렸다.
‘……이중사고.’
사고를 하나 더 만든다. 왼손과 오른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듯.
그러나 이건 까다로운 방식이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다르다. 의식적으로 사고를 분리해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처리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기에 두 번째 사고에는 일정한 규칙과 대칭성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사고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파생된 형태로 말이다. 두 번째 사고는 본 사고에서 온전한 별개가 될 순 없다. 일종의 보조 사고인 셈이다.
‘당장 눈앞의 전투는 첫 번째 사고가 처리한다.’
두 번째 보조 사고는 더 거시적인 흐름을 보도록 하자.
보조 사고는 내 감각 기관에서 입력된 환경 정보를 바탕으로 더 효율적인 전투방식을 구상한다. 3차원 입체 지도의 연장선이었다. 입체 지도 내에서 적과 나를 넣어 미리 시뮬레이션을 상시 돌리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첫 번째 사고와 연동해 적과 환경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현실과 가상의 오차를 보정한다.
사실 특별한 건 없다. 이건 아키에스 전투술의 방식이다. 다른 점은 보조 사고의 분리를 통해 ‘더 빠르고’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연산이 많아져도 빠른 반응이 필요한 전투 사고를 방해하지 않는다.
……설명은 길어도, 정리하면 간단하다. 난 최적화를 끝마쳤다.
팟!
켄의 칼날이 내 가슴을 가르며 지나갔다.
내 회피가 늦었다. 그래서 피부까지 베이는 걸 피하진 못했다. 사고의 방식을 재정립하느라 현실 전투에 소홀히 했다.
주륵.
가슴에서 흐른 피가 내 옷을 적셨다.
‘기존의 첫 번째 사고는 전투 사고다. 눈앞의 전투를 처리한다. 두서넛 수를 보며 빠르게 대응하는 사고다.’
‘두 번째 사고는 전술 사고다. 즉각적인 전투 반응은 첫 번째 사고에 맡긴다. 전술 사고는 큰 그림을 그리며 두서넛 수가 아니라 길게는 삼사 초 뒤의 수를 계산해.’
내가 고안한 이중사고가 키누안이 말한 다음 단계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떠오른 건 이것뿐이었다.
난 전술 사고를 바탕으로 켄 노마를 몰아세울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곳까지 그를 몰아세워 팔과 다리를 벤다.
‘생포’라는 전술 목적에 맞게 나는 움직였다. 난 단기적인 위험을 무릅쓰며 켄의 범위 안쪽까지 몸을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캉!
나는 왼팔로 켄의 칼날을 막았다. 켄은 칼날이 잡히기 전에 재빨리 몸과 팔을 동시에 빼며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켄은 벽까지 몰렸다. 그의 왼편에는 반쯤 쓰러진 장식장이 있었다. 왼쪽으론 피하지 못할 것이다.
켄에게 남은 공간은 정면과 오른쪽. 나는 그곳을 막듯이 서서 칼을 길게 휘둘렀다. 완벽한 외통이었다.
스륵!
켄은 마치 내 칼에 목을 내주듯 앞으로 나왔다. 내 목적이 생포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목을 내민 것이다.
‘이것조차 예상했다, 켄 노마.’
나는 켄이 저런 행동을 할 거라 예측했다. 나도 ‘날 생포하고자 하는 강자’를 상대로 같은 전술을 쓴 적이 있었다. 그간 쌓아온 실전 경험이 빛을 발하는군.
릭 카이저, 그와 싸울 때 나는 의도적으로 안전책을 버리고 목숨을 내던졌다. 그래야 적이 망설인다.
고압축 중량병기인 크루시스를 휘두르고 나서 궤적을 비트는 건 힘들다. 내 몸이 칼에 끌리듯 움직이기 때문이다. 제동을 잘못 걸었다간 내 팔이 부서질 터다.
부웅!
그래서 나는 칼을 휘두르다가 아예 놓았다. 내 칼이 부메랑처럼 바닥을 찢으며 날아갔다.
휘리릭!
난 칼을 놓으면서 땅을 박찼다. 내 몸이 날렵한 벌처럼 허공에 떴다. 나는 켄 노마의 머리 위까지 치솟으며 그를 뛰어넘었다.
무방비하구나, 켄.
켄의 뒷덜미와 등이 훤히 보인다.
콰직!
난 무릎으로 켄의 등을 누르며 낙하했다. 그의 척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켄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몸을 돌려서 칼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으득!
난 켄의 오른팔을 붙잡아서 꺾었다. 내 의체의 출력은 압도적이다. 내 손에 붙잡힌 이상에야 켄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렇게 쉽게 부수니 반칙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켄이 나와 대등한 수준의 의체를 가졌다면 쉽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상태의 켄과 붙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를 생포하는 것이다.
으드득!
난 켄이 자해하기 전에 그의 입에 손을 넣어서 아래턱을 당겼다. 턱관절이 부서지면서 아래턱이 빠졌다.
나는 켄을 무력화했다.
“후우우…….”
내 숨이 입가 사이로 빠져나왔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그레이스와 가브리엘이 사무실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가브리엘에게 알레프와 켄을 투기장 의료실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가브리엘은 알레프와 켄을 하나씩 양어깨에 메더니 복도로 걸어 나갔다.
“제 생각보다 실력이 더 대단하시군요, 루카 님.”
그레이스가 내 곁에 서며 말했다.
난 의자에 앉아서 휴식하고 있었다. 이중사고는 뇌의 부담이 두 배가 아니라 몇 배는 더 가는 것 같았다. 짧은 전투였는데도 신경계 피로가 쌓여 손끝이 떨릴 정도였다.
“……근위대 생도이십니까?”
그레이스는 조심스레 말했다. 생도 출신인 그녀는 내 싸움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 전투법의 원칙은 근위대 제식 전투술과 아키에스 전투술에서 나오는 거니까.
“알 것 없어.”
난 퉁명스레 말했다. 그레이스에게 들킬 거라곤 예상한 바다.
“디바에겐 일단 말하지 않겠습니다. 꽤 위험한 정보 같으니까요.”
그레이스가 자의적 판단을 했다. 그녀는 마냥 충성스러운 인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르티나 디바를 아끼는 보호자 같은 느낌이었다.
* * *
나는 켄 노마를 병원으로 보내 구금 치료를 했다. 하층 구역에선 제대로 된 치료를 하는 병원이었다.
켄은 팔다리도 잃고 재갈만 물린 채로 갇혔다. 거기다가 급성 약물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분간은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려울 것이다.
“우, 으으, 아, 아아! 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알레프가 병원 침상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맛이 간 건 고문당한 알레프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을 마친 그의 얼굴은 누더기처럼 어긋나있어 비대칭이 심했다. 정신적 문제인지 입술이 삐뚤어진 게 문제인지 몰라도 말투도 어눌했다.
날카롭던 기회주의자 알레프의 면모는 온데간데없었다.
“재기불능이로군.”
내가 알레프의 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알레프는 투기장 운영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정상이 되더라도 복귀는 힘들 것이다.
투기장은 정상적인 사업체가 아니다. 갱단이 운영하는 사업이다. 알레프의 회복을 기다려 주지 않을 거다.
갱단의 속성은 짐승 무리와 다를 바가 없고, 약해진 우두머리는 쫓겨날 뿐이다. 알레프가 재기불능에 빠지자마자, 투기장 파벌은 살아남은 간부들 중심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남은 간부들은 조직을 추스르자마자 투기장 관리자의 자리를 두고 다툴 것이다.
“라비앙로즈가 투기장을 관리할 순 없나?”
병실에서 나온 내가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투기장 인수는 라비앙로즈 내부에서부터 반발이 심할 겁니다. 갱이지만 우리에겐 나름의 전통과 규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투기장 사업에 손대는 순간, 다른 갱단이 매섭게 견제하겠죠. 한쪽 세력이 일방적으로 커지는 걸 바라는 갱단은 없으니까요.”
“흠, 가브리엘에겐 투기장을 운영할 만큼의 수완이 없고…….”
가브리엘은 사업 감각이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투기장에 대한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투기장의 앞날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난 하층 구역에 혼란을 남겼다. 내 개입으로 인해 하층 구역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