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65)
배드 본 블러드-65화(65/197)
065
켄 노마 사건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너…… 이 자식, 루카……!”
나는 가브리엘의 술주정을 듣고 있었다. 내가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이건 들어줘야 했다.
“내가, 내가…… 마르티나에게, 크윽, 거기서 무슨 꼴을 당한 줄 알아? 아냐고!”
가브리엘이 내 멱살을 쥐며 흔들었다. 난 순간적으로 욱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넘어갔다.
털썩.
가브리엘은 내 멱살을 놓으며 어깨가 무너질 만큼 한숨을 쉬었다.
나는 힐끗 가브리엘을 보다가 합성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이건 사과 맛이군. 진짜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정말로 사과의 맛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젯밤, 가브리엘은 도살장의 돼지처럼 그레이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라비앙로즈의 보스와 밤을 보냈다. 마르티나 디바와 침대에서 뒹굴었다는 이야기다.
“고생…… 했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기계적으로 말했다. 가브리엘은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울먹거리듯 목청을 높였다.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단순히 돈, 돈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해주는 줄 알아? 젠장!”
“여러 가지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한탄을 듣기가 슬슬 지겨워서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게 고맙다는 새끼의 태도냐? 차갑다! 차가워! 아이고! 얼어 죽겠네! 젠장!”
난 징징거리는 놈의 태도를 탓하려다가 겨우 말을 삼켰다. 내 기준으로는 한 시간이면 충분히 들어줄 만큼 들어줬다고 생각한다.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가브리엘은 내게 우정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난 가브리엘을 ‘소모’할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정을 더 붙일 생각은 없었다. 이 이상으로 친밀해졌다간 가브리엘을 도구로 쓰지 못한다.
‘키누안은 토라와 켄 노마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소모했지.’
나도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
가브리엘은 인사불성이 된 채로 술을 퍼마셨다. 그는 의리는 있지만, 근시안적이며 자제력이 부족한 사내였다.
끼이익.
우리 갱단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 거라서 경비도 비워뒀다. 올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난 이질적인 손님을 응시했다.
사무실로 들어온 건 두건을 깊게 눌러쓴 여자였다. 옷의 질감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하층 구역 사람은 아니었다.
두건 아래의 하관은 공기필터가 달린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귀족들은 종종 저런 마스크를 쓰고 하층 구역을 방문하곤 했다. 하층 구역의 공기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지젤?”
그러나 난 멀찍이서 그녀를 알아봤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었다.
지젤 쿠스토리아.
그녀가 두건을 넘기며 마스크를 매만졌다. 턱과 귀를 따라 유압 실린더가 움직이더니 마스크가 턱 아래로 내려왔다.
지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으음, 안 좋은 냄새가 나네.”
“아, 그건 이 녀석 방귀 냄새야.”
내가 팔꿈치로 가브리엘을 치며 말했다. 지젤은 가브리엘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더니 눈을 찌푸리며 입을 가렸다.
“루, 루카. 누, 누구야? 이, 이 아가씨는?”
지젤을 보고 놀란 가브리엘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뭐라 소개할지 생각하는 사이에 지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루카의 여동생입니다.”
지젤의 말투는 공손하면서도 무미건조했다.
“여동생 양? 여동생?! 루카, 이 자식! 왜 여동생이 있다고 말을 안 했어!”
가브리엘이 눈을 크게 뜨며 내 앞을 막듯이 일어섰다.
“내가 왜 말을 해야 하는데?”
“그, 그 정돈 말해줄 수 있잖아! 우리 사이에!”
가브리엘이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난 가브리엘의 어깨너머로 지젤을 쳐다봤다. 지젤은 눈짓으로 가브리엘을 내보내 달라는 뜻을 표했다.
“자리나 비켜줘.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가브리엘을 밀며 일어섰다. 가브리엘은 투덜거리다가 술병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저 사내가 우리 대화를 엿듣지 않을까?”
지젤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럴 녀석은 아니야. 그 정도로 청력이 좋지도 않고.”
“꽤 신뢰하나 보네.”
신뢰라, 어찌 보면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지. 가브리엘은 항상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믿을 수 있는 부하다.
딸깍.
지젤이 데이터칩을 내게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네게 보내신 거야. 그 안에 든 게 뭔지는 나도 몰라.”
나는 데이터칩의 내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유령 회사들의 자금이 흘러간 종착지.’
니콜라오스는 자금 흐름을 조사하다가 죽었다. 네트워크는 아무리 정교해도 보안의 빈틈이 있다. 제국의 고위 관료가 관련되어 있다면 네트워크 사용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전해주는 게 확실한 보안책이었다. 그것도 가장 믿을 수 있는 딸을 심부름꾼으로 보냈다.
‘헤일라스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내가 맡은 임무에 누가 어디까지 얽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헤일라스조차 그 윤곽을 어렴풋이 파악할 뿐이다.
“하층 구역에 머무는 이유는 묻지 않을게.”
지젤은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본가 분위기는 어때?”
나도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실제로 본가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양자인 내게 친절하게 정기 보고해 줄 사람은 없었다.
“너도 자리를 장시간 비웠으니 쥬페만 살판이 났지.”
지젤이 선반에 놓인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멍하니 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거 술이야.”
“나도 알아. 난 이런 이야기 하면서 주스 마실 생각은 없어. 애새끼도 아니고.”
내 손을 내친 지젤은 내 앞에 놓인 주스를 지그시 쳐다보며 웃었다. 어쩐지 조금 창피하다.
“……근위대 생도에게 술은 섭취 금지 품목이야.”
“네, 네, 그러시겠죠. 우와, 이거 진짜 끔찍하게 맛없다. 여기 사람은 이걸 술이라고 마시는 거야?”
술을 잔에 따라 마신 지젤이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나와 지젤은 쥬페와 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쥬페는 요즘 본가에서 살다시피 해. 너와 아버지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운 탓에, 다들 쥬페에게 들러붙고 있다고.”
“어쩔 수 없잖아. 이쪽은 반백수인 쥬페와 달리 상시 임무가 있는걸. 그 꼴이 보기 싫으면 네가 견제하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당장은 힘이 없어. 정식으로 성인이 돼야 뭐라도 할 수 있다고. 그래야 종사도 받고 사업체도 꾸릴 수 있으니까.”
나는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 말은 내가 듣기엔 그냥 핑계야, 지젤.”
내 말에 지젤도 눈을 매섭게 떴다.
“네가 잘난 건 알겠는데, 남의 속도 모르면서 그딴 말 하지 마. 내가 하려는 일은 주먹구구식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법적으로 성인의 권한이 필요하다고.”
열 받은 지젤이 묻지도 않은 걸 줄줄 설명했다. 그녀는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학교에서 봐둔 인재를 데리고 사업체를 차릴 생각이었다.
“……물리적 연결 없이 무선으로 사이버네틱 의체를 운용하는 거야.”
“지금도 가능하잖아?”
“그것과는 달라. 현재 기술로는 직접적인 신경계 연결 없이는 반응도 느리고 단순한 행동만 가능하지. 복잡한 움직임이나 전투는 어림도 없어. 뇌파 신호만으론 신경계 신호를 흉내 내는 게 불가능하니까.”
나는 재잘거리는 지젤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관심 분야를 이야기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신경계 신호 패턴을 압축해 발신기로 보내고, 수신기에서는 그 신호를 재구성하는 거지. 물리적 연결만큼은 아니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원리는 들어도 잘 모르겠다. 투자를 어마어마하게 받을 수 있는 대단한 기술이라는 것만 대충 이해했다.
이야기를 마친 지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휘청.
나는 흐트러진 지젤의 어깨를 붙잡으며 지탱했다. 어쩌다 보니 과음한 모양이었다.
탁!
화들짝 놀란 지젤이 내 손을 후려치듯 내치며 일어섰다.
“혼, 혼자서도 설 수 있어.”
지젤은 걸음마를 막 뗀 아기처럼 비틀거렸다. 그 꼴을 보니 내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드론이 순찰하는 곳까진 데려다줄게. 밤에는 치안이 더 안 좋아지니까.”
“괜찮아. 총을 가져왔으니까. 내 사격술 성적은 꽤 괜찮아. 수상한 놈이 있으면…… 그냥, 확!”
지젤이 권총을 뽑아 앞으로 겨누는 시늉을 했다.
촤륵!
나는 손을 스치듯 뻗어서 총의 탄창만 빼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알고선 얼굴을 붉혔다.
“봤지? 경솔하게 굴지 마. 총 하나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곤란하다고.”
나는 그녀의 총을 빼앗으며 재장전한 뒤에 건넸다.
우린 사무실을 나갔다. 반쯤 식은 음식처럼 미지근한 공기가 골목길 사이로 흘렀다. 나는 지젤의 두건을 눌러 씌우며 걸어 나갔다.
뚜벅, 뚜벅.
지젤은 걷다 보니 술이 깼는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 루카. 폐를 끼쳤네. 원래는 칩만 전달하고 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들떴나 봐. 아, 간만에 외출이라서 들떴다는 소리야. 그리고 하층 구역에 혼자 내려오는 건 처음이었거든.”
“주절주절 말할 건 없어. 미안한 것만 알면 됐으니까.”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뒤에서 따라 걷던 지젤이 어느덧 보폭을 나와 맞추며 나란히 섰다.
간간이 어두운 골목길 너머로 비명과 주먹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중을 알기 힘든 스산한 눈빛이 우리를 훑어봤다.
지젤은 움찔하더니 내 옷깃을 잡았다.
“너도 이런 곳에서 자란 거야?”
“어두워지면 나도 어지간하면 나가지 않았어. 밤중에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애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하층 구역의 어둠을 볼 때마다 마음을 다졌다. 내가 떨어지면 추락할 곳은 무저갱이다. 난 귀족들과 다르다.
좀 더 걷자 도로가 넓어지면서 거리가 밝아졌다. 순찰 드론이 오가고 있었다. 하층 구역에선 중산층에 속하는 이들이 사는 구역이었다.
“이만 가봐.”
내가 자리에 서며 말했다. 날 경계로 빛과 어둠이 나뉘었다.
“루카…….”
걸어가던 지젤이 돌아서며 말을 걸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다음에는 용무가 아니라 그냥 놀러 와도 될까?”
지젤의 눈이 반짝인다. 나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고요히 그녀를 응시했다. 지젤은 내 묵직한 반응에 놀란 듯이 움츠러들었다.
“정신 차려. 여긴 놀러 오는 곳이 아니야.”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지젤의 동공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농, 농담해 본 거야. 나도 이런 지저분한 곳에 놀러 올 생각이 없어.”
지젤은 두건을 앞으로 당기며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며 날 등졌다.
난 걸어가는 지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나는 둔감한 바보가 아니다. 그녀와는 깊은 관계가 돼선 안 된다.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다. 그리고 우수한 일레이조차 여자 때문에 오판하는 걸 보았다.
지금 나는 얇디얇은 경계에 서 있다. 작디작은 실수조차 날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판단과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관계와 감정은 내게 불필요하다.
나는 지젤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