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0)
배드 본 블러드-70화(70/197)
070
축하 연회는 장소부터 거창했다. 수도 아크바란, 상층 구역의 중심에 있는 황실 연회장을 대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나 황실 연회장을 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현 근위대장 헤일라스의 위엄과 쿠스토리아 가문이 쌓아온 명망이 엿보이는 선택이었다.
난 파도에 휩쓸리듯 가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주인공인 만큼 복장도 신경 써야 했고, 사전에 숙지해야 할 사항도 많았다.
“루카, 이번에 오는 관료와 장교의 이름은 다 외웠지?”
지젤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
연회 준비하는 내내, 지젤은 날 보좌하듯 챙겼다.
제국의 복식은 대체로 실용적이지만 연회복만큼은 입기가 번거로웠다. 옷을 입는데도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브로치는 그보다 왼쪽에 달아. 아니다, 내가 할게.”
지젤은 가까이 다가오며 내 옷차림을 꼼꼼하게 정돈했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우린 잠시 서로를 보았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지젤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지젤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쥬페는 지금 엄청 초조할 거야. 네가 뛰어난 건 알고 있어도, 생도 신분에서 4급 십자검 훈장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운이 좋았어.”
“어머, 겸손한 성격인 줄은 몰랐네.”
겸손이 아니다. 사실이니까. 키누안이 없었다면 난 죽었을 것이다.
지젤은 시큰둥한 내 반응을 보고선 말을 계속했다.
“쥬페는 자신의 모든 인맥과 영향력을 이번 연회에 총동원할걸? 어떻게든 네 활약에 눌리지 않으려고 애쓰겠지. 꽤 볼만할 거야.”
그렇겠지. 나도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쥬페와 얼굴을 여러 번 마주했다. 쥬페는 언행에서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쥬페는 평범했다. 모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탁월하지도 않았다.
‘축복받은 환경에서도 쥬페는 성과를 내지 못했지.’
제국의 귀족이라면 남들처럼 평범해선 안 된다. 특별히 뛰어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하물며 위대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건 귀족도 마찬가지다. 그 허들이 좀 더 낮고, 기회가 많을 뿐이지.
“흠, 이 정도면 훌륭하네. 이젠 정말로 귀족 도련님처럼 보여.”
지젤이 세 발자국 멀어지며 말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안 보였단 소리야? 하층 구역에선 다들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던걸.”
“중간에 낀 자는 언제나 어중간한 취급을 받는 법이지.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거든.”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조언은 고맙게 들을게.”
“조언이 아니야. 사실이지.”
지젤이 차갑게 말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원래도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니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끼익.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때마침 헤일라스가 들어왔다.
지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그녀는 헤일라스 곁을 지나치며 나갔다. 대기실엔 헤일라스와 나만 남았다.
“지젤은 똑똑한 아이지. 군인으로 자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헤일라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거목 같은 사내였다. 한결같이 단단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조직과 가문을 이끄는 수장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젤에겐 야망도 있죠. 가주가 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하하, 그건 힘들지. 군인이 아니니까. 가문의 전통이라는 건 자네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네. 오래된 집안일수록 말이야. 영리한 니콜라오스도 그 전통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
난 그런 낡은 규칙이 싫다. 전통이니 관례니 하는 것 말이다.
“그래도 쥬페보다야 지젤이 낫죠. 쥬페는 저 나이가 되도록 무공훈장 하나 없는 군인입니다.”
“하하, 사람 앞길을 모르지 않나. 오늘은 자네의 전공을 축하하는 자리야. 그렇게 날이 서 있을 필요는 없어. 그게 네 장점이기도 하지만.”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곧 연회가 시작될 것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쥬페와 저는 앞으로 충돌할 겁니다. 제 의지야 어쨌든 간에 쥬페는 절 경쟁자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이대로 있다간 제가 쥬페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친아들을 가주로 만들고 싶다면 지금 말씀하시죠. 쥬페에게 져주고 양보하라고요.”
니콜라오스가 죽었다. 이제는 나도 헤일라스의 속뜻을 알아야 한다. 헤일라스가 내게 바라는 역할이 쥬페의 성장을 자극하는 거라면 거기서 끝낼 생각이다.
“……가주란 혈족과 집안을 이끌고 지키는 자를 뜻하지. 그럴 각오가 있다면 난 그게 누구든 상관없네. 내가 보기엔 자네도 쥬페도 아직 부족해. 자네는 쿠스토리아 가문을 위해 죽을 사람이 아니거든. 허술한 마음으로 가주를 입에 담지 말게.”
헤일라스가 차분하게 일어서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대기실을 나섰다.
쿵.
문이 닫혔다.
난 헤일라스의 말을 곱씹었다.
헤일라스의 말이 맞다. 난 가주의 자격이 없다. 나부터가 가문의 외부인이라고 정체성을 규정짓고 있다. 집안의 중심이 될 사람이 자신을 외부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인 셈이다.
반면에, 헤일라스는 지금껏 나를 다른 자식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능력을 그 누구보다 인정해주며 가까이 두었다.
……괜스레 소인배가 된 기분이 드는군.
* * *
연회가 시작됐다.
시종들이 음식 접시를 들고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잘 훈련받은 자들인지라 참석자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았다. 설사 누가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부딪히지 않을 정도였다.
“반갑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좋은 가문의 장성이 날 바라봤다. 이 사람이 열세 명째 명사였다.
나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었다. 아직도 소개하고 인사해야 할 사람이 수두룩하게 줄 서 있다시피 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장군님의 명성은…….”
나도 내가 뭐라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머릿속에 입력해 둔 기계적인 대사가 내 목구멍과 주둥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자네가 이렇게 알아주니 나도 아직 죽진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그래 봐야 나는 한물간 늙은이일 뿐이지. 자네야말로 제국의 젊은 피로…….”
내 말에 진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대면한 귀족들은 과장된 감정을 드러냈다. 연극 같은 그 모습이 가식적이다 못해 역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려니 머리가 아프다.
이건 내 성질머리에 맞는 일이 아니다. 차라리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을 오열 종대로 모은 다음에 총과 칼을 쥐여주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툭.
헤일라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오늘은 자네가 쿠스토리아의 얼굴이네.”
나는 오늘 밤을 견뎌내야 한다.
‘이 연회는 나를 위한 게 아니다.’
쿠스토리아 가문을 위한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가문의 일원이 되려면 싫은 것도 해내야 한다.
헤일라스도 한 시간 넘게 내 곁에 서서 고위 귀족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헤일라스도 천성이 군인이자 전사다.’
난 헤일라스의 전투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속박의 사슬을 깨부수듯 즐거워했다. 그도 전장이 그리운 것이다.
‘근위대장과 가주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헤일라스는 천성에 맞지 않은 일도 수십 년을 해왔다.’
나는 헤일라스를 따라 멋들어진 테라스로 향했다.
근처만 가도 남녀의 웃음소리가 쾌활하게 퍼졌다. 테라스에는 밤바람을 맞으며 유희를 즐기는 귀족들이 서 있었다. 따로 정보열람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부인이 아닌 여자를 곁에 끼고 있었다.
“오호, 근위대장님께서 오셨군.”
푸른 옷을 입은 사내는 헤일라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드는 기미가 없었다.
우우웅.
푸른 옷 사내의 손아귀에는 스스로 빛을 내는 광물이 있었다.
‘홀리스톤.’
군사, 경제적으로 막대한 잠재력을 지닌 자원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진 소장님, 이쪽이 제 아들 루카우스입니다.”
헤일라스가 정중히 날 소개했다. 나는 푸른 옷 사내의 이름과 직위를 떠올렸다. 이번 연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황실 직속 제4연구소의 소장, 진가우.’
황실 직속 연구소는 황제의 명에 따라 다양한 연구를 한다. 일레이가 포획했던 기계수도 황실 연구소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로군. 아, 그것보다 이것 좀 보게나.”
진가우의 반응은 다른 귀족과 달랐다. 그는 내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다는 듯이 한마디 툭 던지는 게 다였다.
누군가는 진가우의 언행을 기분 나쁘게 여기겠지만, 타인의 관심에 지친 나에겐 오히려 더 반가웠다. 저런 자유분방하면서도 솔직한 행동이 훨씬 더 편했다.
헤일라스는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진가우를 보고도 옅은 미소만 지었다.
사실 진가우의 언행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헤일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연구소장의 직위를 맡고 있던 거물이다.
‘제국의 유력인사 중 한 명인데도, 슬하의 자식도 두지 않고 연구에만 매진한 괴짜.’
그게 세간의 평가였다.
기이잉.
진가우가 손아귀를 펼치며 홀리스톤을 내보였다. 그는 홀리스톤을 허공에 던졌다가 받길 반복했다.
나는 저 광석에 홀리스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조차 모른다. 일레이라면 알고 있겠지.
“신기하지 않나? 손바닥만 한 크기로도 우주선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게 말이야.”
“에너지 차폐가 되지 않은 원석을 가까이 두면 위험합니다.”
헤일라스가 거리를 다소 두며 경계했다.
“괜찮아. 새로 개발한 차폐막을 얇게 도포했어. 지금까지와 달리 액상 형태인지라 가공도 쉽고 활용법도 다양해질 거야. 뭐, 아직은 시험 단계인지라 에너지가 다소 새어 나오겠지만 잠깐 접촉하는 정도론 별일이 없을 거네.”
진가우의 설명을 들은 주변의 귀족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진가우는 낄낄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구소의 시제품을 바깥으로 가져오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닙니다. 국가기밀이나 마찬가지잖습니까. 이 연회장에 코라나 벨라토의 첩자라도 있다면…….”
“어허, 나이도 어리면서 고지식하게 굴긴. 헤일라스, 우리가 원석에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된다면 모든 게 변할 거네, 모든 게. 그리고 장담컨대 이 연구는 삼국이 공동으로 진행하게 될 거야. 왜인지 아나?”
“저야 모르죠.”
헤일라스도 짜증을 드러냈다. 멋대로 구는 진가우가 지긋지긋한 모양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그 결과물을 보고 싶기 때문이지!”
“……정정하신 걸 보니 앞으로 백 년은 더 사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 난 앞으로 반세기도 살지 못할 거네. 내 몸은 내가 잘 알거든. 머리가 망가지기 시작했어. 예전 같지 않아.”
“저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낍니다.”
진가우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웃었다.
“공감하긴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난 ‘오염’되고 있다고. 아, 내 여자친구가 왔군. 어쨌거나 반가웠네, 헤일라스, 그리고 루키시스?”
“루카우스입니다.”
내가 대꾸했다. 오염이라는 말에 나도 관심이 생겼으나 뒷이야기를 듣진 못했다. 진가우의 애인이 우리 등 뒤까지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녀왔어, 자기야. 여기 화장실의 자동 세척 시설이 대단하더라. 지금 가랑이 사이가 엄청 뽀송뽀송해서 자기도 좋아할…….”
내 뒤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간질간질하게 퍼졌다. 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렸다.
……목소리가 무척 낯익었다. 그럴 만도 했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술잔을 가볍게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여우 같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나를 보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도 나도 당황했다.
서로를 여기서 만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라비앙로즈의 마르티나 디바.’
진가우의 애인이 바로 그녀였다.
“다신 그런 아까운 짓 하지 마. 난 뽀송뽀송한 것보단 적당히 냄새나는 편이 좋으니까.”
진가우가 우리를 밀치며 마르티나에게 다가갔다. 그는 마르티나에게 허리를 껴안더니 손을 드레스 깊숙이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