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1)
배드 본 블러드-71화(71/197)
071
길고 긴 인사치레가 끝났다.
난 연회의 참석한 주요 인사와 통성명을 끝냈다. 그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총알 백 발 정도를 피하고 튕겨낸 듯한 피로감이었다.
“고생했네, 루카. 이제부턴 자유로이 즐기게.”
헤일라스가 내 곁을 떠나며 말했다.
“하아.”
지친 나는 벽에 기대며 숨을 돌렸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말랐다. 내가 손짓하니 시종이 음료가 올라간 쟁반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술밖에 없군.’
난 머뭇거리다가 술잔을 집었다.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었다. 어차피 한두 잔 마시는 걸로는 취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대다가 눈을 찌푸렸다.
“윽.”
내 감각은 예민하기에 알코올 냄새가 코에 박히듯 깊게 들어왔다. 생각할수록 이딴 걸 왜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혀에 닿는 액체에서 불쾌한 맛이 났다.
나는 입술만 축이곤 테라스를 응시했다.
‘라비앙로즈의 마르티나 디바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진가우는 제국의 명사였다. 그는 젊은 나이부터 지금까지, 한 세기 넘게 연구소장을 맡아왔다. 헤일라스도 존중할 만큼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마르티나 디바는 귀족이 아니야.’
난 감시자의 눈으로 마르티나 디바의 이력을 확인했다. 그녀의 나이는…… 내 예상보다 많았고, 출생은 하층 구역에서도 밑바닥 배경이었다.
‘진가우 정도의 권력자면, 귀족 연회에 하층 구역의 사람도 데려올 수 있나 보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진가우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물인 듯했다.
‘제멋대로인데도 남들이 용납한다는 건, 그만한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겠지.’
생각하던 나는 습관적으로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음.”
눈을 재차 찡그렸다. 술은 역시 맛이 없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내 초대에 응한 근위대 생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귀족답게 연회에 자연스레 잘 어울렸다. 나와 달리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루카.”
생도 동기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저 멀리 드레스를 입은 지젤을 보며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지젤에게 약혼자나 남자친구가 있어?”
“……글쎄다.”
“그래도 가족이잖아. 모르는 척하지 말고.”
“아마 남자친구는 없을 거야. 성질머리가 나빠서.”
“그건 상관없어. 성격이 좋은 귀족 아가씨는 난봉꾼이 아닌 귀족 도련님만큼 찾기 힘드니까. 인사하게 소개나 해줘.”
생도 동기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툭 쳤다. 나는 조금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소개하지 못할 건 없지.
난 동기와 함께 지젤에게 다가갔다.
“지젤, 이쪽은…….”
나는 지젤에게 생도 동기를 소개했다. 지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생도를 보더니 짧게 통성명만 했다.
“저기, 잠시만 이야기를…….”
생도 동기가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 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조금 바빠서요.”
지젤이 냉랭하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소개한 내가 머쓱할 정도였다.
“성질이 나쁘다고 내가 말했지?”
나는 지젤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말했다.
“이 정도야 일상이지.”
내 동기는 까이고도 쾌활하게 웃었다. 그는 금세 다른 귀족 아가씨에게 말을 걸더니 대화를 이어갔다.
‘다들 즐기고 있네.’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나와 몇몇뿐인 듯했다.
난 외부인처럼 관망하며 연회의 흐름을 관찰했다.
‘이게 내가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귀족 사회인 건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연회에 참석해야 저들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정말로.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 되고 싶다. 그러나 출신의 벽은 컸다. 타인의 무시나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나 자신의 내면이 문제였다. 호화스러운 연회와 만찬은 한없이 불편했고…… 가브리엘이나 길다와 어울리던 작은 공간이 더 편했다. 상한 음식을 먹고 다음 날 배탈이 나더라도 말이다.
내 심경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영영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매번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겪으며 인고해야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다.
난 근위대의 적성을 가진 거지, 귀족의 적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그럼 귀족들은 내가 미쳤다며 떠들어대겠지.
“히야아아호오오오오-!!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아아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 상상을 현실로 실행하는 인간이 있긴 했다.
“진 소장님! 아, 안 돼!”
진가우의 수행원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진가우가 테라스 난간에 서더니 팔을 파닥파닥 흔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굴더니 4층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콰당!
소리가 요란하다. 테라스 아래는 대리석 바닥이었다. 전신의체니까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저 양반은 또 시작했군.”
“취하기만 하면 저런다니까.”
귀족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진가우의 돌발행동에 익숙한 듯했다.
‘비범하네.’
개성 하나는 확실한 인간이었다. 제국에서 보기 드문 인물상이다.
“어이, 주인공.”
혼잡함을 틈타 일레이가 내게 접근했다.
“주인공은 무슨.”
“퉁명스레 굴지 말고, 좀 웃어. 너한테 말 걸려던 여자가 몇 명이나 도망간 줄 알아? 내가 본 것만 다섯 명이야.”
잘 차려입은 일레이가 귀족 아가씨 무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내 옆에 선 그는 빈 술잔을 시종에게 넘기더니 새 잔을 들었다.
일레이와 같은 공간에 들어서자 드디어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일레이, 진가우 소장에 대해 알아? 제국에도 저런 사람이 있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알다마다, 진 소장님은 아케인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걸.”
난 일레이의 표정을 살폈다. 상쾌한 얼굴에선 눈빛이 동경으로 반짝였다.
“저 괴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어서 가봐.”
“하하, 오늘도 늦었어. 만날 기회도 드물지만, 이렇게 보더라도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사람이야. 금방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거든.”
카르티카도 괜찮은 집안이다. 그 자제조차 진가우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힘든 모양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으면 저런 자유분방한 태도도 용납되는군.”
나는 진가우가 부럽기도 했다. 엄숙주의가 만연한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진 소장님은 특별해. 그거 알아? 소장님은 벨라토와의 왕래도 허가받은 사람이야.”
나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벨라토와?”
“아무리 잠재적 적성국이라도 왕래는 계속해야 해. 삼국시대잖아. 만약, 두 국가가 작심해서 기술협약을 맺으면 다른 한 국가만 뒤처지지. 민간차원에서의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암암리 오가는 이들이 많아. 특히 보더시티에…….”
예전에도 보더시티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있다. 릴리안이 가고 싶어 했던 벨라토의 도시다.
일레이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연회장의 음악이 느릿하게 바뀌었다. 내 귀에도 익숙한 곡조였다. 크라치아 아카데미의 ‘사교 행사의 기초’ 수업에서 지겹도록 들은 그 음악이었다.
“춤을 출 시간이야, 주인공. 어여쁜 아가씨를 찾아보라고.”
일레이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는 적당한 여자를 찾아가 정중히 인사하더니 춤을 췄다.
모두가 춤을 추는 건 아니었다. 나처럼 연회장 외곽에 서 있는 이도 많았다.
또각, 또각.
나는 음악 사이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지젤.’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가 내 옆에 섰다.
“루카, 멀뚱히 구경하는 게 아니라 춤을 춰야지.”
지젤이 내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춤은 젬병이야. 상대의 발이나 밟을걸.”
이건 거짓말이다. 내 반사 신경이면 배우지도 않은 춤이라도 눈치껏 상대방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연회의 주인공이 춤을 추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걸. 예의에도 어긋나.”
지젤이 지적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반문하며 지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젤은 내 시선을 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정 상대가 없으…….”
지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알싸한 향이 멀리서부터 풍겼다. 지젤도 말을 멈추곤 뒤를 응시했다.
향을 풍기는 성숙한 여인이 잘록한 허리를 흔들며 나와 지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난 눈을 옅게 떴다.
‘마르티나 디바.’
마르티나 디바가 내 앞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미리 짜 맞춘 듯이 음악도 잠시 멎었다.
“연회의 주인공께서 춤출 상대가 없으신 것 같네. 저라도 괜찮을까요, 도련님? 제 춤 상대는 테라스에서 떨어져 실려 갔거든요.”
마르티나가 끼어들더니 내게 춤을 청했다. 나는 허락을 구하듯 지젤을 쳐다봤다.
“잘됐네. 춤 상대가 없으면 적당한 여자를 붙어주려고 했어. 때마침 상대가 생겼으니 다행이야, 루카우스 오라버니.”
지젤이 건조하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지젤에겐 미안하지만…… 마르티나와 지금 이야기해 둘 필요가 있어.’
마르티나도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듯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셈이니까.
“연회 주인공이 누군지 이름을 들었을 때 설마설마했어. 도련님,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었잖아. 깜짝 놀랐다고.”
마르티나가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춤을 추는 인파 사이로 들어갔다.
음악이 다시 울려 퍼졌다.
나와 마르티나는 춤을 췄다. 날 이끄는 마르티나의 솜씨는 굉장히 능숙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쪽은 어떻게 연회장에 온 거지? 아니, 그거보다 진 소장과 무슨 관계인 거야?”
마르티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추궁하듯 물어볼 건 없어. 다 말해줄 테니까. 라비앙로즈의 디바는 대대로 제국 유력인사의 애인 역할을 했어. 디바의 숨겨진 자격 중 하나야. 제국 권력자의 애첩일 것. 초대 디바가 황제의 정부였다는 전설이 있거든. 말 그대로 전설이라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라비앙로즈 갱단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귀족이라는 걸 알고도 과감히 공격한 이유도 이해됐다.
‘라비앙로즈는 미인계를 통해 제국 귀족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라비앙로즈 내부에는 고위 귀족의 애인이 많이 있을 것이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도 포함해서.
하층 구역에서 활동하는 귀족 중에서는 고위층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층 구역을 탐내며 이권에 개입할 정도면 하위 가문의 귀족이거나 말석이다.
‘권력자와 연줄이 있으면 하위 귀족을 겁낼 필요가 없긴 하지. 더군다나 하층 구역에서 벌어진 사건은 무마하기 쉬우니까.’
나는 라비앙로즈 갱단을 조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경직된 권력 구도를 뒤집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방식을 누군가는 멸시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자신에게 특출한 무기가 있다면 전부 써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 공격성이 뛰어나고 전투 감각이 탁월한 것처럼, 마르티나에게도 자신만의 재능이 있었다.
“도련님의 질문에 내가 답했으니, 내 궁금증도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마르티나는 한쪽 발끝만 세우더니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드레스는 등이 전부 드러나 있었다. 탄탄하면서도 매끄러운 등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새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가브리엘은 이런 매력적인 여인과 뒹군 건가.’
흠, 하지만 나도 마르티나의 내면을 종종 보곤 했다. 그걸 떠올리니 피가 차갑게 식었다.
‘생각해 보니 가브리엘도 감이 좋은 모양이네.’
젊은 남성이 마르티나에게 생리적 혐오감을 느끼려면, 그녀 내면에 갇힌 노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썰미가 좋아야 한다는 뜻이다.
“왜 근위대장의 아들 정도 되는 거물이 하층 구역에서 활동하는 거야? 불건전한 취미 생활?”
“마르티나 디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궁금증에 답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걸 듣고 나면 당신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 진 소장도 당신을 지켜주지 못할 거고. 라비앙로즈도 건사할지 장담할 수 없어. 나이만큼이나 현명한 당신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르티나의 입술 주름이 깊어지면서 떨렸다. 노파의 모습이 잠시 드러났다.
신기할 따름이다. 저토록 아름답게 외면을 꾸며도 내면이 튀어나오니 말이다.
나는 감시자의 눈으로 봤기에 마르티나의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다. 꽤…… 아니, 상당히 많았다. 가브리엘의 예상보다도 더.
꾹.
마르티나는 춤을 추다가 내 발을 밟아서 눌렀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자를 놀리면 못 써, 도련님.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으니까 걱정 마. 내겐 언제나 라비앙로즈의 생존이 최우선이니까.”
어느덧 춤이 끝났다. 마르티나는 내 손을 놓으며 고운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나는 내게서 멀어지는 마르티나를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방금은…… 마르티나와 헤일라스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마르티나와 헤일라스는 각자의 갱단과 가문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조차 기꺼이 소모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