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2)
배드 본 블러드-72화(72/197)
072
연회는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사람도 절반으로 줄었다.
마르티나 디바도 연회장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더는 내게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었다.
‘슬슬 내가 빠져도 될 분위기로군.’
나는 벽에서 등을 떼다가 연회장 한쪽을 살폈다. 가장 시끄러운 무리가 있는 곳이었다.
‘쥬페.’
쥬페와 그 추종자가 모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듯 여러 귀족과 어울려 다녔다.
‘일레이?’
쥬페와 일레이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레이는 사교성이 좋은지라 쥬페 앞에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와 일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도와줘, 루카.’
일레이가 입술만 빠르게 움직여 말했다. 쥬페가 일레이를 붙잡아두는 듯했다.
쥬페 입장에선 카르티카의 차기 가주로 유력한 일레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겠지.
‘이를 어쩐다.’
나는 되도록 이번 연회에서 쥬페와 말을 섞기 싫었다. 하지만 저대로 일레이를 놔두기도 뭣했다.
난 쥬페와 그 무리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일레이, 여기에 있었네. 잠깐 시간 돼?”
내가 일레이를 부르자, 쥬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루카, 지금 나와 이야기 중인 게 보이지 않나? 무례하군.”
“무례인 건 알지만, 근위대 업무 때문입니다.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업무? 연회 중에?”
쥬페가 무슨 말인지 말해 보라듯이 나를 노려봤다.
“근위대 소속이 아닌 외부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순 없죠.”
내가 차분히 말했다. 이래서 쥬페와 말을 섞기가 싫었다.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려고 시비다. 나는 쥬페의 앞니를 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생도 따위에게 무슨 그런 중요한 임무가…….”
쥬페는 말하다가 실수인 걸 알고 다물었다. 이번 연회가 무엇을 축하하는지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중요한 임무야 많죠. 예를 들자면 일급 수배범을 쫓는 일이라든가 하는 것요. 근위대의 업무에선 보안과 기밀이 기본입니다, 형님.”
“나, 나도 알고 있어. 일레이, 그럼 다음에 또…….”
쥬페가 일레이를 놓아주며 자리를 떴다.
일레이도 쥬페가 사라지고 나서 숨을 돌렸다.
“덕분에 살았어, 루카. 네 형님이 좀 끈질기더라.”
“네 잘못도 있어. 웃으면서 대화를 받아주니까. 달라붙는 거잖아.”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지?”
“그럼 진짜겠냐? 이제 너도 가봐. 연회는 끝났어.”
나는 연회장의 입구까지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쥬페와 무슨 이야기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시답잖은 말이겠지. 관심 없어.”
진심이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했을지 예상도 갔다.
“네게 약점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더라고. 조심해. 널 본격적으로 견제할 모양이야.”
일레이도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투로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도 몇 번의 대화로 쥬페의 그릇을 파악했겠지. 쥬페는 나쁜 의미로 진짜 도련님이다.
나는 예의상 일레이를 배웅하곤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가기 전에는 헤일라스에게도 보고해야 한다.
“오늘 제법 훌륭했네, 아들. 푹 쉬도록.”
헤일라스가 짧게 칭찬했다.
헤일라스의 옆에 있던 고위 관료와 장성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내게 꽂혔다.
저들의 눈빛은 건조하다 못해 무기질적이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인지라 감시자의 눈으로도 정보열람이 불가능했다.
바로 저들이 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아니, 괴물이라고 불러야겠지.
* * *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연회 내내 술로 갈증을 해소한 터라 묘하게 감각이 어긋났다.
‘불쾌하네.’
이걸 즐기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와 뇌 기능을 왜 의도적으로 떨어뜨린단 말인가?
나는 구시렁거리며 벽을 응시했다.
쿠스토리아 가문이 대여한 황실 연회장은 황궁의 별관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복도에는 역대 황제의 초상화가 드문드문 있었다.
특히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의 그림은 연작처럼 길게 늘어졌다.
‘디노 크라치아.’
나는 전신 초상화 앞에서 멈췄다. 칼을 높게 치켜든 초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발광 물감으로 그린 후광이 그를 감싸듯 빛나고 있었다.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니 깃발을 든 초대 황제와 그 추종자 무리가 보였다. 제국의 건국 시절을 상징한 그림인 듯했다.
저벅, 저벅.
나는 복도를 걸어가며 그림을 감상했다. 사악하게 묘사된 외계 종족과 그에 맞서는 황제의 용맹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거룩하고도 신성하군.
다른 황제의 업적과 기록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초대 황제만큼 위엄있진 않았다.
‘현 황제 유리 크라치아.’
마지막 황제의 초상화 앞에서 난 걸음을 멈췄다. 역대 황제는 모두 초대 황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닮아있었다. 유리 크라치아도 마찬가지였다.
디노 크라치아와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생겼다. 그만큼 초대 황제는 제국의 아버지로 경외 받고 있었다.
또각.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복도의 끝을 응시했다.
“네가 이번 연회의 주인공,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청량한 목소리였다. 중성적인 미성인지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힘들었다.
목소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복도의 어둠에서 걸어 나오는 자를 보았다. 목덜미까지 기른 보라색 머리카락은 일자로 단정했다. 잘생긴 듯하면서도 예쁜 이목구비인지라 성별이 모호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소년인 게 확실했다.
끼릭.
내 의안이 작동했다. 나는 상대의 정보를 열람하려 했다. 그러나 한 치의 정보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외견만 봐서는 나와 비슷한 나이인 듯했다. 난 빠르게 추론을 마쳤다.
“……건국의 후예를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호오, 머리가 잘 굴러가나 봐? 과연 생도 신분으로 무공을 세울 만하네.”
그가 감탄하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감시자의 눈으로도 정보열람이 불가능한 미성년.’
여긴 황실의 별궁이기도 했다.
‘내 눈앞의 소년은 아주 높은 확률로 황족이다. 어쩌면 현 황제의 자식 중 하나일 수도 있어.’
황실의 일가는 공직에 나온 자 말고는 베일이 싸여있었다.
황제와 그 후계자만이 공식 석상에 간간이 얼굴과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지금은 황제 유리 크라치아와 진홍의 황태자로 유명한 프란세크 크라치아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일어나도 좋아, 루카우스.”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일어섰다. 내가 아무리 시건방지더라도 황족에게 질문을 던지진 않았다.
황족 소년이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그 무엇도 물어선 안 된다.
“따라와. 정원을 구경시켜 줄 테니까.”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분명 연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복도는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인기척이라곤 나와 소년밖에 없었다.
‘소년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인파를 미리 통제했군.’
인파 통제가 얼마나 은밀했는지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황족의 개인정보는 제국의 최고 기밀 중 하나니까.’
사전 허락 없이는 황족의 얼굴을 ‘우연으로라도’ 보기 힘들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저 소년은 나를 만나러 찾아온 거다.’
난 소년의 의도를 읽어 보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추론은 사전 정보가 있어야 가능한 행위다. 아무리 대단한 컴퓨터라도 정보의 입력 없이는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소년에 대한 정보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가 황족이라는 것.
달그락.
소년이 양문형 유리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 중앙에는 못이 있었는데, 초승달이 그 안에 잠긴 듯이 비쳤다. 그 주변에는 이름도 모를 꽃과 식물이 혼돈과 질서의 균형을 이루며 무성하게 피어있었다.
“소문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
소년이 못에 서더니 손을 수면 위로 뻗었다.
첨벙!
못에 있던 물고기들이 뻐끔뻐끔 입을 드러내며 소년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소년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사료를 뿌리는 척했다.
첨벙! 첨벙!
물고기들이 앞다퉈 소년의 손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얘들은 바보야. 이렇게 손만 뻗어도 먹이를 주는지 알고 허겁지겁 달려들거든. 심지어 뒤에 따라오는 애들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모여들고 있지. 모두가 사실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 그저 남을 따라 흘러가듯 살아갈 뿐.”
나는 소년의 말을 듣다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닫았다. 아직 말해선 안 된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
소년의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진짜 먹이를 준 적이 있기에 저렇게 모여드는 걸 겁니다. 경험을 통해 학습한 거죠.”
“맞아, 루카우스. 먹이를 정말로 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모여들지 않겠지. 그래서 진짜 먹이를 종종 주는 거야. 그러면 이 아이들은 자신이 의미 있는 노력을 했다고 착각하겠지. 열심히 내 손을 따라다녔기에 먹이가 떨어진 거라고 말이야.”
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은유가 섞인 말이 단번에 이해되진 않았다. 그러나 난 몹시도 불쾌했다.
“하지만 그저 주인의 변덕에 의한 상일지라도, 무기력하게 포기한 채로 움직이지 않는 놈들은 그 보상마저도 가지지 못할 겁니다.”
“하하, 너와 대화하길 잘했어. 그 말도 맞아. 이왕 정원에 들어온 김에 구경하도록 해. 이 잉어는 물론이고 꽃과 나무도 지구의 원종이야. 환경적응을 위한 최소의 개량조차 하지 않았어. 이 정원이 작은 지구인 셈이지.”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내 눈에는 다른 동식물과 다를 바 없었다.
첨벙!
나는 못으로 다가갔다. 잉어 무리가 내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멍청하게 생긴 얼굴로 뻐끔거리는 물고기다.
“어때?”
소년도 내 옆에서 잉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다 보니 귀여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 명령이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전부 죽여.”
소년이 간단한 부탁을 하듯 말했다.
내가 지금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다.
철퍽.
나는 배꼽까지 잠기는 못에 들어갔다. 모여 있던 잉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작은 못에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난 차분히 명령을 수행했다.
달이 잠긴 못이 잉어의 피로 물들었다. 비친 달 위로 핏물이 구름처럼 흐느적거렸다. 내 손에 머리가 으스러진 잉어의 사체가 둥둥 떠올랐다.
“잘했어.”
날 칭찬한 소년은 죽은 잉어 한 마리를 덥석 잡았다.
으적, 으적.
소년이 잉어의 배에 입을 파묻은 채로 게걸스러운 식사를 했다. 그의 입 주변이 붉게 물들였다. 귀족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야만적인 행동이었다.
“너도 먹을래?”
소년이 죽은 잉어를 내밀며 말했다.
“명령이라면 먹겠습니다.”
난 못에 몸을 담근 채로 말했다.
“흐응, 먹기 싫다는 소리로 들리네.”
소년이 피로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엇나간 립스틱처럼 피가 뺨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난 부정하지 않았다. 건방지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하며 괴팍한 식생활에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가봐도 좋아. 다음에 또 보자고, 루카.”
못을 벗어난 나는 머리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뚝, 뚝.
내 발아래로 비릿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철퍽, 철퍽.
난 복도를 걷는다. 어느덧 고요가 끝나고 복도에도 사람이 한둘씩 보였다. 인파 통제가 끝난 것이다.
복도에는 연회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걸어갔다.
……피곤하군. 귀신에게라도 홀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