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5)
배드 본 블러드-75화(75/197)
075
VIP실에는 나와 마르티나, 그리고 그레이스만 남았다.
“내 용건은 하나다, 마르티나 디바.”
“후후, 말하시죠, 도련님.”
마르티나는 부채를 펼친 채로 눈웃음을 쳤다. 많은 사내를 홀릴 미소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가 없더라도, 가브리엘을 챙겨주길 원한다. 녀석과 갱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말이야. 필요하면 가브리엘 갱단을 라비앙로즈의 산하로 넣어도 돼. 네 수완이면 할 수 있겠지.”
마르티나의 동공이 커졌다. 의외라는 듯이 말이다. 나도 내가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마치…… 가브리엘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는걸?”
“멋대로 생각해도 돼. 하지만 그쪽도 알다시피 난 하층 구역에 상시 머물 순 없어. 내가 장시간 자리를 비우는 일도 많겠지. 내가 다시 하층 구역의 영향력이 필요할 때, 가브리엘이 없으면 곤란해.”
나는 건조하게 말했다.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의 신호를 내면에 가두는 건 내게 익숙한 일이다.
“도련님께서 하층 구역의 영향력이 필요하다면, 우리 라비앙로즈가 대신해 줄 수 있어.”
“너흰 믿을 수 없어. 라비앙로즈의 다른 수입원 중 하나가 정보매매지? 필요하면 내 정보도 남에게 넘길 거잖아.”
라비앙로즈의 고급 창부는 고위 귀족과 어울린다. 허술한 자들은 잠자리에서 상대에게 비밀을 쉽게 말하곤 한다.
“아직 도련님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맹세해.”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앞으로도 입을 닫고 있을 거라고 장담하긴 힘들다.
“잡설은 집어치우자고, 마르티나. 그래서 가브리엘을 보호해줄 거야? 말 거야? 이것만 대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내가 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나와의 친분.”
나의 가능성.
쿠스토리아 가문의 유망한 근위대 생도. 누가 봐도 난 출세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자신만만하네.”
“자신만만하지.”
내가 짧게 대꾸했다.
기잉.
마르티나의 동공 테두리가 빛났다. 그녀는 의식을 내면으로 옮긴 채로 깊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탁!
생각을 마친 마르티나가 부채를 접었다.
“약간 손해 보는 느낌이지만, 투자라고 생각할게. 도련님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레이스가 가브리엘 갱단의 동태를 살필 거야.”
우린 거래를 끝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VIP실을 나섰다. 마르티나의 명령을 받은 그레이스가 나를 배웅하러 따라 나왔다.
“대단한 신분이신가 보군요.”
그레이스가 말했다.
“대단할 건 없어.”
사실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내 힘으로 얻어낸 지위다. 집안의 힘으로 거들먹거리는 귀족 도련님 취급당하긴 싫었다.
우린 가게의 복도를 걸었다. 오가는 자들이 많았다. 꽤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다. 사창가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취향이란 참으로 다양하다.
삑.
나는 단말기의 호출음을 들었다.
호출자는 헤일라스였다.
* * *
헤일라스는 드물게 집무실이 아닌 훈련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휘릭.
헤일라스가 말끔하게 창을 돌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앞에는 현역 근위대원 다섯 명이 근접무기를 든 채로 서 있었다.
귀한 광경이었다. 헤일라스의 전투를 볼 기회였다. 공중차량 추락 사건 때는 내 몸 건사도 힘들어 헤일라스의 싸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때마침 잘 왔군. 잠시만 기다리게.”
헤일라스가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근위대원 다섯은 거리를 벌리며 헤일라스를 둘러쌌다. 그들은 근위대 내부에서도 상급 부대인 제1백인대 소속이었다. 근위대 내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정예였다.
탁!
칼을 든 근위대원이 헤일라스에게 달려들었다. 그게 신호인 듯이 다른 근위대원도 여러 방향에서 헤일라스를 공격했다.
휘리릭!
헤일라스가 창을 크게 휘두르며 다른 근위대원의 공격을 걷어내며 공간을 확보했다. 그는 상체를 낮추며 미끄러지듯 뒤로 빠져나갔다.
다섯 명의 포위에서 벗어난 헤일라스가 가까운 근위대원의 목을 창대로 쳤다. 실전이었으면 바로 사망했을 일격이었다.
헤일라스의 동작은 화려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정교한 계산이 맞물린 창의 회전은 근위대원의 공격을 연거푸 쳐냈다.
헤일라스는 회전 방어로 쳐내면서 얻은 원심력을 이용해 공격을 이어갔다.
‘공방 일체.’
공격과 방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동작으로 끝났다. 얼마나 단련하고 경험을 쌓아 올려야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제국 최강의 군인…….’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힌 내 눈으로도 헤일라스를 어찌 공략해야 할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근위대원들이 허무하게 픽픽 쓰러졌다. 그들이 약한 게 아니다. 하나하나가 역전의 용사다. 단지, 헤일라스 앞이기에 상대적으로 무력해 보이는 것이다.
탁!
헤일라스가 마지막 근위대원의 가슴을 창대 밑동으로 후려쳤다. 근위대원의 가슴 보호대가 부서졌다.
‘헤일라스가 레기온을 사용하면…… 얼마나 강해지는 거지?’
레기온, 그 단어의 의미대로 ‘일인군단’이 될 것이다.
대련을 마친 근위대원들이 주섬주섬 물러났다.
헤일라스는 여전히 창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숨을 돌린 그가 나를 향해 턱짓했다.
“루카, 무기를 들고 올라오게나. 가볍게 대련하며 이야기하지.”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이건 대단한 기회였다.
“아, 자네의 전용 무기를 사용하게. 그 정도는 되야 나도 긴장감이 생길 테니까.”
헤일라스가 말을 덧붙였다. 내 안의 호승심을 긁듯이 자극하는 말이었다.
키이잉!
나는 고압축 중량병기 크루시스를 뽑으며 헤일라스 앞에 섰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내 말투는 혓바닥에 가시가 돋친 듯이 거칠었다.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헤일라스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게 오늘의 내 목표였다.
한 마디로, 난 헤일라스를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다.
헤일라스의 대련용 창은 살상 능력이 떨어진다. 전투의체를 가진 자끼리는 치명상을 주기 힘들다.
‘크루시스와 부딪히면 그대로 박살 날 창이지.’
헤일라스는 어떻게 대응할 생각이지?
나는 힘껏 크루시스를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헤일라스에 접근했을 즘엔 이미 가속력이 붙어서 첫 일격이 느리다는 중량병기의 단점은 사라졌다.
헤일라스가 나를 관찰하듯 눈을 옅게 뜨며 뒤로 물러났다. 크루시스가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회전력을 계속 이용해 가속한다.’
중량병기는 멈추고 다시 휘두르는 무기가 아니다. 한 번 휘둘러서 가속을 붙이면 멈춰선 안 된다. 그렇기에 다루기 힘든 무기다. 공격의 흐름을 이어가야 최고의 효율이 나온다.
흐름을 타라, 루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의체의 출력을 고점까지 단숨에 끌어올렸다.
헤일라스에게 바짝 붙으며 칼을 휘두르려 했다. 이건 그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헤일라스의 창과 함께 허리를 가르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헤일라스의 창이 흐려졌다. 내가 인지했을 땐 이미 공격받은 뒤였다.
키- 잉!
쇄도하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헤일라스가 내 왼쪽 어깨를 찔렀다. 이건 내가 반응조차 못 할 정도의 속도였다. 난 칼을 놓치며 뒤로 물러났다.
‘압도적인 속도.’
아키에스 전투술로도 대응하지 못 했다.
‘이게 제국의 방식.’
나는 어깨를 잡으며 헤일라스를 보았다. 그의 동공에서 안광이 너울거렸다.
헤일라스는 완벽한 전투기계였다. 그는 초고성능의 전투의체를 타고난 육체처럼 통제하고 있었다. 저런 뇌를 가진 자가 제국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백 번을 싸워도 백 번을 질 것 같다.’
키누안도 늘 말했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전투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길 가망이 있는 상대에게 효과를 발휘했다.
이 정도로 실력의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아키에스 전투술은 무용지물이었다.
“한 번 당한 걸로 포기하진 않겠지?”
“끈질긴 게 제 몇 안 되는 장점이죠.”
나는 저릿한 어깨를 매만졌다. 생체와 기계의 결합부를 노린 일격이었다. 충격이 깊게 울려서 신경계 결합이 일시적으로 깨졌다. 덕분에 팔이 잘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방식의 공격도 있었군.’
하나 배웠다.
헤일라스는 나를 가르치듯 다양한 방식으로 싸웠다. 무척이나 자상한 대련이었다. 웃긴 표현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생각나는 단어가 없었다.
“중량병기는 파괴력이 강하지. 기세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무기는 없어. 하지만 자네는 미숙해. 실력도, 경험도.”
이렇게 지적받는 건 오랜만이다.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그간 칭찬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키에스 전투술은 인위적으로 통찰력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사용하네. 하지만 태생부터가 약한 의체로 강한 의체를 상대하기 위한 약자의 기술이지. 도구로 사용하되, 너무 의존하진 말게.”
좋은 조언이다. 나는 그 말을 새겨들었다.
“이번에 자넬 부른 까닭은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야. 황실의 일원이 자네를 지정했네. 짚이는 게 있나?”
나는 여태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헤일라스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조차 벅찼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헤일라스가 내 대답을 기다리며 뒤로 물러났다. 난 겨우 숨을 돌리며 입을 뗐다.
“……있습니다.”
나는 연회가 끝나고 만났던 황족 소년에 대해 말했다. 보랏빛 소년의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흠, 자네에게 관심이 생기신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해. 자네의 이력은 무척이나 특이하네. 이레귤러 중에서도 이레귤러지.”
이건 칭찬인 듯하다.
“어떤 임무입니까?”
“경호 업무네. 일정은 짧으면 하루 이틀, 길면 며칠이 될 수도 있지. 뭐, 그분의 변덕에 따라 달라질 거야. 하나는 확실히 알아두게. 이건 근위대의 임무야. 자네의 판단이 곧 근위대의 판단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임무 하달이 끝나고도 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팔다리가 너덜너덜할 때까지 헤일라스와 대련했다.
‘헤일라스는 나를 위해 시간을 비웠다.’
근위대장의 업무가 얼마나 바쁜지는 내가 잘 안다.
나는 실전처럼 집중력을 매번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헤일라스의 동작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게 언젠가 나를 죽음에서 구해 줄 지식이 될 수도 있다.
* * *
황족이 내게 경호 업무를 맡겼다. 상식적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장 근위대만 해도 경험과 실력이 나보다 우수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효율만 보자면 내게 경호 업무를 맡길 이유는 없었다.
‘호기심.’
황족 소년이 날 택한 이유다. 내 입장에서 내키는 사유는 아니었다.
나는 꺼림칙한 마음으로 근위대 비행장에 섰다. 불안을 추스르듯 무기를 매만졌다. 내 허리춤과 외투 안쪽에는 크루시스와 루이나가 있었다. 탄창도 넉넉히 준비했다.
우우웅.
소속 특정이 불가능한 6인승 공중차량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외부는 검은색이었다. 착륙한 공중차량의 문이 위로 열렸다.
난 사전에 받은 지시대로 공중차량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보랏빛 황족 소년이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었다.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반가워,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루카우스는 좀 딱딱하고 긴데, 애칭이 따로 있어?”
“루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루카, 루카, 루카. 어감이 나쁘지 않네. 일단은 앉아.”
황족 소년은 턱을 괸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바깥에서는 시커먼 유리지만, 내부에선 그 청명할 정도로 깨끗한 시야였다.
‘나 말곤 아무도 없는 건가?’
차량 내부에는 나와 황족 소년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 황족의 경호를 담당해야 했다.
“루카.”
황족 소년이 여전히 밖을 보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말씀하시지요.”
“당분간 쓸 이름을 정하고 싶어. 네로, 이반, 셀림. 이 중에서 뭐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뭔가 저 이름에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지식과 식견으론 모르겠다.
“이반…… 이 좋을 듯합니다.”
“사실 나도 그게 마음에 들었어. 흠, 네가 정해주니 더욱 마음에 드네.”
황족 소년, 이반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