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6)
배드 본 블러드-76화(76/197)
076
제국의 수도 아크바란은 살아있는 도시나 마찬가지다. 도시의 경계는 증축과 확장으로 해마다 넓어졌다.
중심부인 상층 구역을 제외한 하층 구역이 아크바란을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 상층 구역의 테두리를 따라선 중산층의 거주지였고, 하층 구역 외곽으로 갈수록 무질서한 빈민가였다.
기이잉.
나와 이반이 탄 공중차량은 하층 구역에 착륙했다. 번화가 한복판에 마련된 공공 비행장이었다.
공공 비행장이지만 무료는 아닌지라 착륙하자마자 크레딧 비용이 발생했다.
끼릭.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공중차량의 문이 위로 열렸다.
저벅.
나는 먼저 나서서 바깥을 살폈다.
공공 비행장인지라 인파가 북적거렸다. 나와 이반에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여기선 황족조차 군중 속에 섞인 사람일 뿐이었다.
“루카, 경호는 네게 일임하겠어. 안전에 관한 일이라면 내게 명령하듯 말해도 돼.”
이반이 공중차량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곱상한 외모를 숨기듯 모자를 썼다. 아무래도 귀족적인 외모가 돋보이니 이편이 이목을 끌지 않을 것이다.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내가 묻자, 이반은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고민했다.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이것도 네게 맡기지. 원래 하층 구역 출신이라면서?”
경호 업무만이 아니라 안내역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상대가 황족만 아니었다면, 난 소리 내어 투덜거렸을 것이다.
젠장, 가슴이 무겁다. 나도 담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황족이라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컸다. 보통 일이 아니다.
‘건국의 후예.’
그 혈통이 바로 내 곁에 있었다. 그는 변덕 한 번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차라리 그가 철없는 도련님이라면 내 성질을 죽이면서 비위를 맞추겠지만…….
내가 본 이반은 범상치 않은 존재다.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진난만한 말과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차분하게, 이성을 차갑게 유지해.
흥분하면 안 된다. 난 실수해선 안 되는 임무를 맡았다.
이반은 공공 비행장의 계단을 내려가더니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는 싸구려 합성음식을 파는 길거리 노점 앞에 섰다.
이반은 계산도 하지 않고 꼬치 하나를 집어 들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이거 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야.”
그가 하층 구역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닌 듯했다.
“여긴 도둑이 워낙 많아서 계산은 꼼꼼히 하셔야 합니다.”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반을 쫓아오는 노점상 주인이 보였다. 크레딧칩이라도 던져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루카, 저 사람은 시끄러우니까 죽여.”
이반이 돌아서더니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서 노점상 주인을 조준했다.
……이반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건 물고기를 죽을 때와 다르다. 노점상 주인은 인간이다. 그리고 음식 도둑을 쫓아왔을 뿐이다.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니, 잘못이 없진 않지. 몰라봤을지라도 감히 황족에게 소리를 질렀으니까.
하지만 그 무지가 죽을 정도의 이유인가?
자의적 판단을 내리지 마라, 루카. 그저 명령에 따라라. 난 제국의 군인이다. 건국의 혈통이 내게 명을 내렸다.
사고는 길었으나 물리적 시간은 찰나였다.
“하하, 농담이야. 설마 이 정도로 사람을 죽이라고 하겠어? 계산이나 하고 와.”
이반이 웃으면서 손을 내렸다. 그가 내 망설임을 알아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노점상 주인에게 크레딧칩을 내밀었다. 내가 계산하는 사이에 이반은 고무가 섞인 고기 꼬치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이반은 내게 하층 구역의 안내를 맡겼다. 그는 하층 구역 관광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난 최대한 치안이 좋은 곳으로 다녔다. 적당히 하류층 분위기가 나고 소매치기도 있지만, 총을 든 강도는 없는 곳으로 말이다.
‘이 정도면 이반도 만족하겠지.’
이반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어떨 때는 뭘 파는지도 모를 잡화점에서 두서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이반 님.”
“이반이라고 불러. 님은 딱딱하니까.”
“알겠습니다, 이반.”
“그 딱딱한 태도도 조금 누그러뜨리고. 긴장할 것 없어.”
“뭐, 천성이 군인인지라…….”
나는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살짝 빈정거린다고 느낄 수도 있는 말투였다. 젠장, 참지 못했구나, 루카.
“바로 그거야, 루카. 말대꾸하니 좀 더 친한 느낌이 들잖아!”
이반은 오히려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뭐, 기뻐한다면야 종종 해줄 순 있다. 나도 참지 않는 게 나으니까. 문제는 이 황족 소년이 언제 변덕을 부리며 내 대꾸를 무례하다고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늦었으니 이제 숙소를 구해봐.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 거니까.”
하층 구역에서 자겠다고? 나는 이 근처의 모든 숙박업소를 검색했다. 황족이 잘 만한 거처는 당연히 없었다.
그나마 가장 괜찮은 호텔을 골랐다.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무인 호텔이었다.
호텔에 도착한 나는 크레딧칩을 긁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결제부터 입실까지 무인 자동화였다. 내게도 낯선 곳이다.
쏴아아아.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반이 샤워하는 동안 방을 살폈다. 별다른 장치는 없었다.
덜컹.
샤워를 마친 이반이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거실로 나왔다.
나는 이반이 나신이라는 걸 알기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루카, 날 봐.”
이반이 고요히 말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돌아봤다.
“바뀌었군요.”
“신기하지?”
이반이 맑게 웃었다. 바뀌었다는 건 ‘성별’을 뜻했다.
이반의 신체는 전신의체였다. 워낙 정교한 의체인지라, 나도 그가 전신의체인지 일부만 의체인지 지금까지 헷갈렸다.
기잉, 기잉.
이반의 젖가슴은 커졌다가 납작해지길 반복했다. 소년과 소녀의 미묘한 골격 차이도 기계음과 함께 바뀌었다. 생식기도 마찬가지였다. 시중에선 팔지도 않는 최첨단 가변의체였다.
이반의 의체는 여성형에서 고정됐다. 그는 자신의 알몸을 자랑하듯 내 주변을 빙빙 돌았다.
털썩.
이반은 침대에 앉았다. 그는 땅에 떨어진 수건을 발가락으로 짚더니 내 발아래까지 던졌다.
“이리 와, 루카. 놀아보자고.”
이반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내게 손짓했다. 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내가 경험은 없을지라도 성에 무지한 백치는 아니다.
“제 업무는 경호입니다, 이반.”
내가 딱딱하다 못해 공격적으로 대답했다.
“난 황족이야. 내 명령은 네게 절대적이지. 제국을 거스를 셈이야?”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헤일라스의 말이 생각났다.
‘이건 근위대의 임무야. 자네의 판단이 곧 근위대의 판단이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호흡을 내뱉었다. 헤일라스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생각을 마친 내가 입을 열었다.
“창부가 필요하다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남자든 여자든 간에요.”
“장난해? 루카, 이번엔 농담이 아니야. 아까와 달라. 사람을 죽이라는 것도 아니잖아?”
이반의 언성이 높아졌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이 고압적인 태도까지 내보였다.
“당신은 제 성격을 잘 아실 겁니다.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건…… 제가 불복종하고 명령에 거절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이반은 철없는 황족이 아니다. 그는 냉엄한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다. 짧은 만남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저런 기이한 태도에는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끼릭, 끽.
이반의 의체가 남성형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리를 꼬더니 무릎에 팔꿈치를 대서 턱을 괴었다.
“참 강직하네. 네가 더 좋아질 것 같아.”
“전 당신이 싫어질 것 같습니다.”
난 불손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이반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불쾌할 정도로 맑은 미소였다.
* * *
나는 소파에 앉아서 밤을 지새웠다. 사나흘 정도 잠을 자지 않는 건 내게 쉬운 일이다. 할 일도 없었기에 머릿속으로 전투 시뮬레이션을 몇십 번이고 돌렸다.
“루카, 오늘은 갈 곳이 있어.”
나신으로 잠을 잔 이반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목적지를 알려주시면 택시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걸어가고 싶어. 하층 구역의 공기를 좋아하거든. 미적지근해서 기분이 나쁘잖아.”
이야기하면 할수록 괴팍한 인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기분 나쁘니까 좋아한다니.
우린 무인 호텔을 나갔다. 이미 날은 밝았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오갔다.
나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소매치기를 걷어차며 이반을 경호했다. 그때마다 이반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키이잉!
노면전차가 사나운 소리를 내며 하층 구역의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낡은 철로에서 나는 굉음 때문에 사람들은 눈을 찡그렸다.
고개를 돌려 도로를 보았다. 사람을 짐짝처럼 구겨 넣은 대형차량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출근하고 있었다. 저들 같은 하층민 대다수는 공중차량을 평생 몇 번 타보지도 못한다.
“정갈한 상층 구역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지. 난 이런 난잡한 분위기가 좋더라고. 넌 그렇지 않아?”
이반이 하품하며 내 곁을 지나쳤다. 그는 목적지를 정해뒀다는 듯이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위에서 보면 하층 구역에 어떤 낭만적인 감성을 느낄지 모르나…… 여기 사는 이들은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반이 느끼는 감정은 가진 자의 교만이죠.”
물론 나도 하층 구역에 오면 해방감을 종종 느낀다. 그러나 난 하층 구역 출신이다. 상층 구역 사람, 그것도 정점에 있는 황족이 하층 구역의 낭만에 대해 떠드니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루카. 널 데리고 오길 잘한 것 같아.”
이반은 기분 나쁘다는 기색조차 없이 말했다. 그는 복잡한 인파 사이로 걸어갔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가며 경호 업무를 수행했다.
하층 구역 외곽으로 갈수록 도보 이동은 위험하다. 내가 경호하는 이상에야 별일은 없겠지만 번거로운 건 사실이다.
두 시간 정도를 묵묵히 걸었다. 어느덧 주변이 눈에 익었다. 어릴 적에 수없이 봤던 거리였다.
그리고 저 멀리서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제72보육원.’
여긴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얼굴 좀 펴. 네 고향 집이잖아.”
“좋은 기억은 그다지 없어서요.”
“원래 유년기가 불행해야 성공하는 법이지.”
그 말엔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아까도 그랬듯이 저 말이 황족의 입에서 나온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 볼까?”
이반은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보육원 건물로 다가갔다.
1층 사무실에 있던 보육원장이 창밖을 통해 우릴 발견했다. 내 주먹에 얼굴이 깨진 보육원장은 안면 재건 수술이라도 했는지 조금 더 잘생겨졌다. 수술비가 상당했을 텐데 그간 꿍쳐 둔 재산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루, 루카! 또, 또 왜, 왜 온 건가? 그, 그 이후로 나, 나는 빼돌린 적이 없네! 맹세코!”
보육원장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말했다. 지금 그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반이다. 황실의 일원 앞에서 횡령을 고백하고 있다.
“아니, 뭐, 제가 용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건강하신 것 같으니 보기 좋네요.”
나는 그리 말하며 이반의 뒤로 물러났다.
“제72보육원장 돈 알켄?”
“예, 예, 넵.”
보육원장이 어리둥절하다가 바짝 긴장했다.
이반의 동공이 환하게 빛났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성이었으나 주파수가 낮아져서 맹수처럼 위압감이 있었다.
보육원장도 눈앞의 소년이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 정도는 대번 알아챘을 것이다.
“……자네는 제국을 좀먹는 벌레 같은 인간이로군.”
이반은 보육원장에 대한 모든 걸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정말로 알고 있을 것이다.
“헤, 헤헤, 무슨 말, 말씀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
보육원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에 익은 아부를 해댔다. 그게 그의 생존 본능이었다.
이반이 보육원장 앞으로 걸어갔다. 보육원장은 뭔가에 압도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끼릭.
이반의 팔이 움직였다. 그는 손날로 보육원장의 목을 쳤다.
스륵!
그의 손날이 보육원장의 목을 가볍게 갈랐다. 어떤 장치인지는 몰라도 단분자 코팅이 된 칼날처럼 매끄러운 절삭이었다.
보육원장은 자신의 머리가 잘렸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선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려보지만 꺽꺽거리는 소리만 났다.
“루카, 네 입장에선 보육원장이 미워도 쉽게 죽이기 힘들었겠지. 뒤처리가 힘드니까.”
이반은 아직도 의식이 있는 보육원장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쪽.
이반이 보육원장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콰직!
보육원장의 머리가 썩은 과일처럼 허무하게 터졌다. 피와 살점이 비현실적으로 튀었다.
“돈 알켄의 죽음은 너를 위한 선물이야. 보육원장 후임으론 우수한 자를 내정해 뒀어. 능력도 좋고 청렴한 인물이지.”
피에 젖은 이반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황제는 제국에서 신이나 다름없으며 황족은 신의 가족이며 자손이다. 그리고 이반은 자애로운 신이 아니었다.
……사신이 줄 수 있는 선물과 애정은 타인의 죽음뿐이다.
“감사합니다, 이반.”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삑.
내 망막 디스플레이에선 경호 임무가 끝났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