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79)
배드 본 블러드-79화(79/197)
079
방대한 데이터는 빛의 속도로 제국의 네트워크들을 오간다. 그러나 우린 중요한 말을 입과 입으로 전하고, 정보는 손과 손을 통해 건넸다.
네트워크는 보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근위대에 돌아온 나는 데이터칩을 헤일라스에게 넘겼다. 네메시스 연락책의 기억이 담긴 칩이다.
달그락.
헤일라스가 데이터칩을 받더니 액체가 담긴 유리잔에 떨어뜨렸다.
츠즈즈즈…….
데이터칩에 도포된 화학물질이 유리잔의 액체와 중화반응을 일으켰다.
‘저게 쿠스토리아 가문의 봉인(封印, Seal)이로군.’
가주와 일부 사람만 저 화학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봉인을 풀지 않고 칩을 단말기에 연결한다면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단말기가 고장 나는 건 물론이고 칩도 망가지겠지.
데이터 봉인은 귀족 가문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쓰는 여러 보안책 중 하나다. 어쩔 수 없이 기밀을 디지털로 저장해야 한다면, 아날로그식 보안을 한 번이라도 덧댄다. 쿠스토리아 가문은 칩에 화학물질을 도포하는 방식을 썼다.
‘내가 저 칩의 내용을 먼저 열람했다면…… 바로 추궁당했겠지.’
헤일라스는 내게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내가 당연히 보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일 수도 있고, 날 시험한 것일 수도 있다.
“흠, 이제 됐겠군. 정해진 시간보다 덜 담그면 봉인이 완전히 중화되지 않고, 더 오래 담그면 칩이 망가지지.”
헤일라스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손가락을 유리잔에 집어넣어 칩을 꺼냈다.
끼릭.
단말기의 렌즈가 열렸다. 칩이 삽입되자마자 푸르스름한 빛이 렌즈에 맴돌더니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기밀을 보지 않기 위해 말했다.
“아니, 자네는 볼 자격이 있어. 이번 임무를 같이 수행했으니까.”
헤일라스의 신뢰가 종종 무겁게 느껴졌다. 난 너무나 많은 비밀과 기밀을 알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내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정보다.
기이잉.
헤일라스가 홀로그램에 손을 집어넣더니 데이터를 매만졌다. 지루한 보안절차가 끝나고 나서야 기억 영상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기억을 영상화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단편적인 장면을 억지로 이어간 수준에 불과했다. 해상도가 낮은 영상은 심해처럼 어두웠고, 소리는 두서없이 쪼개져 귀가 아플 정도였다. 간간이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는 변조한 것처럼 탁한데 그마저도 툭툭 끊어졌다.
홀로그램 영상을 봐도 맥락과 내용을 알아먹기 힘들었다. 조현병 환자의 뇌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작 이런 조잡한 정보를 위해 인간이 ‘해체’된 건가?
‘뇌에서 짜낸 기억.’
파이곤은 연락책의 뇌를 쓰고 버리는 걸레처럼 쥐어짰을 것이다. 실제로도 정보를 다 캐내고 나면 바로 폐기하겠지.
내 실망을 눈치챘는지 아닌지 몰라도 헤일라스는 설명을 계속했다.
“지금부터 인간의 인지 알고리즘을 흉내 낸 인공지능에 이 데이터를 입력해 연산을 가속할 거야. 그러면 영상과 소리가 열화 보정되네. 우리 인간은 파편화된 오랜 기억을 스스로 보정 하고 메꾸며 ‘앞뒤가 맞는 그럴싸한 추억’으로 만들지. 그것과 같은 원리네.”
나도 처음 듣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보정된 추억의 정보는 부정확하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열화니까요.”
인간의 기억은 오래될수록 부정확하다. 그래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관측과 이해가 가능한 수준까지 맥락이 생기면서 선명해지지. 부정확해도 괜찮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음 추적을 위한 흔적이니까.”
헤일라스가 손짓하자 홀로그램에 떠오른 기억 데이터가 가속했다. 재생이 반복될수록 장면의 배치가 바뀌고 소리도 달라졌다.
허름한 뼈대만 있던 이야기가 거짓말쟁이의 입을 통해 구체화 되는 셈이었다.
-……전달, 하고.
-신중히……
-이틀, 공백.
나도 점차 내용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음, 까다롭게 됐어. 이 사내는 메멘토리였군.”
“메멘토리?”
오늘은 배우는 게 많을 것 같다.
“메멘토리, 장기기억 기능을 극단적으로 떨어뜨린 인간을 말하네. 과거의 일부 기억만 가진 채, 현재 기억은 짧게는 수 분, 길게는 며칠 정도만 기억해. 기밀을 전달하는 연락책으로는 적격이지.”
헤일라스는 담담했다. 그러나 나는 눈살을 찌푸려지는 걸 참지 못했다.
“따로 부르는 명칭과 이용법이 있다는 건…… 인위적으로 뇌 기능을 제거해 사람을 병신으로 만든 겁니까?”
“보통은 그렇네. 나도 오랜만에 봤어. 요즘엔 거의 보기 힘든 보안 방식이거든.”
“그럼 우린 무의미한 짓을 한 겁니까?”
내가 헤일라스에게 따지듯 말했다.
쿠스토리아 가문에 편입된 이후로, 헤일라스를 대하는 게 갈수록 편해졌다. 젠장,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 불량한 태도에도 헤일라스는 놀라거나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컴퓨터조차 데이터를 완전히 증발시키기 힘들지. 하물며 인간의 뇌에서 완전한 기억 소실은 불가능에 가깝네. 어딘가에 우리가 알아볼 만한 흔적이 있을 거야.”
헤일라스가 기억 영상을 가속했다. 우리의 동공도 빛났고, 뇌는 고속 사고를 시작했다. 흔적을 찾아야 한다.
흐릿한 영상과 조각난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지나갔다. 맥락을 겨우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따스한 추억과 끔찍한 트라우마마저 흘러나왔다.
한 사람의 인생이 낱낱이 해체되고 있었다. 그게 노이즈가 잔뜩 낀 영상일지라도 말이다.
-이번, 중요, 쉿, 쿠스, 나의.
나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쿠스토리아 가문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난 이 부분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끼릭, 끼릭.
헤일라스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방금 부분을 반복 재생했다.
영상에는 여자 한 명이 뭐라 말하고 있었다. 여자라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목소리는 열 마디 중에 한 마디 정도만 들렸다.
“더 또렷하게 볼 수는 없습니까?”
“이 이상 보정하면 아예 현실과 다른 내용이 되어버릴 거야. 거짓을 넘어선 상상의 영역이지. 여기까지가 한계선이네.”
“그럼 이 부분만 제 단말기로 전송해 주실 수 있습니까? 뭔가 걸리는 게 있는데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지.”
헤일라스가 홀로그램 영상을 편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근거리 통신으로 영상이 내 단말기로 전송됐다.
“뭔가 알게 되거든. 언제든 찾아오게. 사전에 허락은 필요 없어. 이건 근위대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이니까.”
나는 헤일라스의 집무실을 나갔다.
-이번, 중요, 쉿, 쿠스, 나의.
난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목소리를 들었다. 돌아가서 쉴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들었다. 나중엔 눈을 감아도 뇌리에는 짧은 영상이 지나갔고, 환청처럼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하루가 더 지났다. 나도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철망 사이로 떨어진 물건을 줍고 싶은데 손톱만 간신히 닿는 느낌이었다.
나도 무작정 무식하게 영상을 듣는 게 아니다. 내 직관이라는 근거가 있었다.
어쨌거나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우득, 우득.
난 목과 허리는 물론이고 의체도 부위별로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오늘 안에 끝낸다.’
나는 호흡도 일정한 간격으로 내뱉었다.
‘명상.’
외부가 아닌 내부로 모든 집중력을 쏟는다. 지금은 누가 나를 기습하더라도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바깥으로 향한 감각을 꺼뜨렸다.
난 의식세계에서 기억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나눠서 쭉 펼쳤다. 예술품을 구경하듯 한 장 한 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 번, 중.
의식세계의 내가 빨리 걸을수록 목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느리게 걸으면 한없이 느릿하게 발음이 끌렸다.
‘아무리 내가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혔을지라도…… 헤일라스도 눈치채지 못한 걸 알아채진 못할 거야.’
그렇다면 내가 이 영상에 꽂힌 이유를 생각해 보자. 설명하기 힘든 직관의 영역이다.
-이번, 중요, 쉿, 쿠스, 나의.
직관은 초능력이 아니다. 내 경험과 기억, 지식에서 뭔가 걸린 것이다.
‘헤일라스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것.’
생각이 깊어진다. 사고가 빨라지면서 두통이 생겼다. 신경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츠즈즈.
머릿속에서 섬찟한 소음이 일었다. 찰나였지만 뇌리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바라.”
나는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헤일라스는 바바라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났더라도 굉장히 오래전의 일이겠지. 반면, 나는 바바라를 최근에 만났다.
난 내가 기억하는 바바라를 기억 영상에 대입해서 겹쳤다.
물리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난 기억 영상의 여자가 바바라일 거라고 확신했다.
바바라가 연락책의 기억 속에서 나오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그녀는 제국이 네메시스에 잠입시킨 첩자니까.
나는 헤일라스가 집무실에 있는 시간대를 확인하고선 곧바로 찾아갔다.
“바바라입니다.”
헤일라스를 찾아간 내가 짧게 말했다. 물증이 없는 심증이니 뭐네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헤일라스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부하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뛰어난 상관이다.
헤일라스의 동공에서 미미하게 떨렸다.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 정돈 나도 알 수 있었다.
“알았네. 다음 지시를 기다리게.”
* * *
내가 보고하고 나서 이틀이 더 지났다.
연락책의 기억 영상에서 찾은 증거와 연결고리는 ‘마녀 바바라’였다.
헤일라스는 바바라와 접촉해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제국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네메시스에 바바라를 집어넣었다.
‘바바라는 제국을 위해 네메시스 내부의 동태를 살피고 있어.’
제국의 군인이 바바라에게 먼저 연락하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다. 이건 바바라에게 위험하다는 뜻이다.
‘바바라가 네메시스에 잠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온전한 신뢰를 얻기엔 부족한 시간이지. 조금만 수상하게 행동해도 처분을 당할 거야.’
아직까진 바바라가 네메시스 내부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섣불리 바바라와 접촉해선 안 된다.
그러나 바바라와 접촉하지 않으면, 당장 니콜라오스 쿠스토리아의 죽음을 파헤칠 방법이 없었다.
‘헤일라스가 사적인 일을 위해 제국의 공적 자원을 사용할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는 헤일라스는 공사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다. 훌륭한 군인인 그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
“루카, 여기서 끝이네. 다른 증거와 흔적이 나오기 전까지는 근위대 업무에 충실하게.”
헤일라스와 나는 쿠스토리아 저택으로 가는 공중차량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가끔 이런 식으로 저택에서 식사하고 근위대에 복귀했다. 가문의 일원으로 얼굴을 비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헤일라스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바바라와 접촉할 방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민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라면?”
헤일라스의 눈동자는 나를 관찰하듯 예리하면서도 묵직했다.
“지젤이 아크바란 외부로 나가면…… 바바라가 먼저 접촉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 기억에 바바라는 지젤에게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만큼은 연극이 아닐 겁니다.”
이 방법을 헤일라스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일종의 꼼수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미끼를 두어 제국의 공적 자원인 바바라를 끌어들이는 셈이니까.
난 말을 빠르게 덧붙였다.
“네메시스도 바바라가 지젤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놈들도 바바라의 요청으로 지젤을 납치하려 했으니까요. 바바라가 지젤에게 무리하게 접촉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죠.”
“자칫하면 지젤에게 사고가 생길 수 있네. 그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자는 이야기인가?”
내용만 보면 추궁하거나 화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헤일라스는 자식을 과보호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내 의도를 물어보는 것이다.
“대장님도 지젤을 아카데미에서 미끼로 쓰신 적이 있죠. 그리고 속이지 않아도 지젤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 기꺼이 미끼 역할을 받아들일 겁니다. 집안일이니까요. 그 정도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지젤에겐 있습니다.”
헤일라스는 침묵하며 턱을 매만졌다. 공중차량은 묵묵히 이동했다. 저택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그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라스의 허가가 떨어졌다. 근위대장이 아니라 가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