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0)
배드 본 블러드-80화(80/197)
080
쿠스토리아 저택은 옛 건축 양식만큼이나 엄숙하다. 오가는 시녀조차 침묵이 미덕이라는 듯이 입을 닫은 채로 시선을 낮게 두었다.
저택에선 할 말이 있다면 방에 들어가서 했다. 가족인데도 서로 간에 비밀이 많다는 듯이 말이다. 다른 귀족 가문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
나와 헤일라스는 지젤을 호출한 채로 기다렸다.
끼익, 쿵.
지젤이 문을 열고 헤일라스의 서재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은 앉아, 지젤.”
내가 헤일라스를 대신해 말했다.
헤일라스는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우리가 모르는 변수까지 포함해 계획을 세우고 작전을 짜고 있을 것이다.
지젤이 내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는데?”
“임무가 있어, 집안일로.”
내가 짧게 말했다. 그제야 지젤도 굳은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니콜라오스 때문에?”
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륵.
헤일라스가 창문을 등지며 우리를 쳐다봤다. 그는 지젤에게 시선을 두더니 신중한 입을 뗐다.
“지젤, 나와 루카는 니콜라오스 암살을 사주한 자를 찾고 있다. 이미 꽤 가까이 접근했어.”
“……그건 네메시스의 짓이지 않습니까?”
지젤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네메시스를 괴멸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국도 박멸하지 못한 테러 집단이다. 거기다가 점조직이라 연쇄 소탕도 어려웠다.
“다신 쿠스토리아 가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놈들에게 위력을 과시할 필요는 있지.”
적어도 니콜라오스 암살과 관련된 자들은 우리가 찾아내 죽일 것이다.
‘가문의 위신, 그리고 안전과 관련된 문제다.’
나도 헤일라스가 이번 일에 이만큼 시간과 여력을 투자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사주자는 릭 실바 누네즈가 아니었나요? 루카가 죽였잖아요.”
“릭은 네메시스의 간부지만, 계획을 짜고 지시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아. 윗선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지.”
맞는 말이다. 릭이 정말로 머리 역할을 한다면 번번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릭은 유능한 전사지만, 네메시스에겐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 정말로 잃어서 안 되는 자는 릭과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제게도 역할이 있다는 건가요?”
지젤은 분위기를 읽고선 바로 핵심을 찔렀다.
“우린 네메시스의 바바라를 끌어내야 한다, 지젤. 너와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던 그 소녀를 말하는 거지.”
헤일라스는 차분히 말했다.
바바라가 ‘제국의 첩자’란 사실만큼은 지젤에게 기밀이다. 지젤은 바바라가 사이코 테러리스트라고만 알고 있다.
“바바라…….”
지젤이 움찔했다. 미미하게 떨리던 그녀의 손이 점차 눈에 띄게 흔들리려 했다. 나는 떨림을 대신 누르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내 손길을 느낀 지젤이 움찔했다. 효과가 있는지 그녀의 동요가 잦아들었다.
‘지젤은 아직도 바바라를 두려워하고 있어.’
바바라는 섬뜩한 인간이다. 지젤이 감당키 힘든 본성을 가진 여자였다.
“루카의 말로는 네가 바바라의 유인책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 생각에 동의하나?”
지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처음에는 책망이나 분노가 내게 쏟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 여자가 제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던 건 사실이죠. 저 때문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루카의 말이 맞을 겁니다. 저보다 감이 좋으니까요.”
지젤은 엄지손톱을 입술까지 가져갔다가 내렸다. 나는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불안과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헤일라스는 딸의 정서적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이야 어쨌든 간에 겉은 강철같은 사내였다.
“우린 바바라와 접촉해야 해, 지젤.”
헤일라스가 지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모인 세 사람은 모두 머리가 좋았다. 나도 포함해서 말하니 새삼 쑥스럽군.
지젤은 눈을 감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총명의 빛이 불안을 밀어냈다.
“계획을 말씀해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 * *
계획은 단순했다.
그럴싸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서 지젤을 아크바란 외부로 보낸다. 바바라가 지젤에게 관심을 계속 두고 있다면 어떻게든 접촉하러 올 것이다. 본인이 직접 오든 아니면 대리인을 보내서든.
‘누가 오든 간에 니콜라오스의 죽음에 대해 추궁한다.’
당연하지만, 지젤이 미끼이며 함정이라는 낌새를 풍겨선 안 된다. 그렇다고 호위도 없이 내보내는 건 더욱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나를 호위로 배치한다면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이라는 냄새가 강하게 난다. 거기다가…….
“자네를 공식적으로 지젤의 호위로 배정해 아크바란 밖으로 내보낸다면…… 분명히 암살 시도가 있겠지. 릭을 죽인 자네를 노릴 거네. 릭은 인망이 두터운 사내였어. 보복하고 싶어 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이야.”
날 노리는 이도 많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호위도 없이 지젤을 밖으로 내보낼 순 없다. 근위대장 가주가 있는 군인 집안에서 사기업 용병을 고용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
지젤의 호위를 맡을 적임자를 찾기 힘들었다.
“생도 임무로 일레이 카르티카에게 지젤의 호위를 맡기지. 이 정도는 배치는 내부 회의 없이도 내 재량으로 가능하네.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고.”
“일레이 말입니까? 혹시라도…….”
입막음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일레이가 내 친구인 것도 문제지만, 내 힘으로 일레이를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루카, 일레이는 자네에게 진 빚이 크지 않나? 웬만한 비밀은 지켜주겠지. 내 입으로 더 말하진 않겠네.”
헤일라스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 말했다. 나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겨우 눌러 내렸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난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나와 일레이는 ‘릴리안 라모네스’를 구하기 위해 반제국적인 행위를 했었다.
당시에도 헤일라스는 뭔가 안다는 듯이 나를 쿡쿡 찔렀었다.
‘또 떠보는 건가?’
나는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입을 열었다. 화제를 돌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저는 거리를 두고, 지젤과 일레이를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그래선 안 되지. 즉각 대응이 중요한 일이야. 자네를 위해 또 다른 신분을 준비했네.”
헤일라스의 목소리엔 들뜬 기색이 섞여 있었다. 내 안의 불안감이 커졌다.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헤일라스가 나를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보낼 때…….’
헤일라스는 내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전자잉크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시, 씁.”
난 서류를 보자마자, 얼굴의 모든 근육을 동원해 인상을 찌푸렸다. 욕이 앞니까지 튀어나왔다가 혓바닥에서 빙빙 맴돌았다.
“진심이십니까?”
난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최대한 정중히 말했다.
“집안일에 농담은 안 하네.”
“아니, 시발, 무슨 이런 좆같은 작전을…….”
아아, 내뱉고 말았다. 3년 전에 내가 근위대장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즉결 처분을 당했을 것이다.
“흠, 좆같은 작전이 아니라 좆 없는 작전이지. 이게 가장 확실한 위장법이네, 루카.”
헤일라스는 자신의 농담이 뿌듯한지 입술의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웃었다.
그렇다. 난 여자 행세를 해야 한다. 지젤의 시녀로서 말이다.
* * *
죽고 싶다.
나는 움직이는 공중차량에서 창밖을 응시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망상이 떠올랐다.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다. 머리부터 처박으면 고통도 없겠지.
“흐으음, 눈 좀 크게 뜨고 이쪽을 봐. 케이사.”
지젤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비행 중인 공중차량 내부엔 나와 지젤만 있었다.
‘케이사.’
내 가명이다. 서류상으론 쿠스토리아 가문에 고용된 몸종이었다.
“임무는 시작도 안 했어. 한 번만 더 케이사라고 부르면…… 윽.”
으름장이 끝나기도 전에, 지젤이 내 눈꺼풀을 이상한 도구로 집었다.
“부르면, 뭐?”
지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도구가 담긴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한 도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이름이 내 입에 익어야 나중에 실수하지 않을 거 아니야. 난 너와 달리 이런 임무에 익숙하지 않아.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게 군인 아니야? 고작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임무 실패 가능성을 늘리는 그런 사람이었어? 응? 케이사?”
지젤이 유창하게 말했다. 정론인지라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
난 자포자기한 투로 말했다.
“넌 제법 생기긴 했지만, 남성적이라서 꼼꼼하게 작업해 둬야 여자처럼 보여.”
지젤이 차가운 액체를 내 얼굴에 펴 발랐다. 낯선 촉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스륵.
내 체온에 달아오른 액체가 피부에 흡착하듯 들러붙으며 살과 비슷한 질감으로 굳어갔다.
“이게 얼굴의 부족한 지방을 대신할 거야. 각진 선이 둥글고 가늘어지지. 원래 날카로운 편이라 효과가 좋네.”
지젤의 화장 기술은 대단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변하는 걸 느꼈다.
휙.
지젤은 그림이라도 그리듯 내 얼굴 위로 붓을 움직였다.
내 입술은 붉어지고, 눈은 훨씬 커 보였다. 정체불명의 액체 화장품 덕분에 이마와 뺨, 턱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체격은 바꿀 수 없으니까, 노출이 없고 펑퍼짐한 옷을 준비했어. 목젖은 가려야 하니까, 초커를…….”
지젤이 준비해 둔 옷을 꺼내서 내 무릎에 던졌다.
“치마? 여자도 바지를 입잖아.”
“그 다리가 어딜 봐서 여자인데? 닥치고 입어. 계속 애새끼처럼 징징거릴 거야?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으음, 또 할 말이 없었다.
지젤은 옷을 한 벌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준비한 옷을 하나씩 내 몸에 가져다 대며 눈대중을 했다.
내가 보기엔 아무거나 입으면 될 것 같았다.
“지젤, 즐기는 건 좋지만 이건 임무야.”
슬슬 지루해진 내가 불만을 내뱉었다.
“잘 알고 있어. 나를 미끼로 내던지자는 작전을 짠 루카우스 오라버니.”
날이 선 말이 나를 찔러댔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리고 난 니콜라오스에게 빚을 진 게 있거든. 사주한 사람을 찾아 갚아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그래, 날 미끼로 던지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참 훌륭하네, 역시 훈장도 여럿 받은 군인다워. 박수라도 쳐줄까?”
난 손뼉을 치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위험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만약 우리가 위험에 빠진다면 너 대신에 죽어줄 테니까, 걱정 마. 절대 너 혼자 뒤지게 놔두진 않을 테니까.”
내가 강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지젤의 투정도 어른스럽지 못했다. 그녀는 똑똑하니까 자신이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건 알 것이다.
지젤은 한숨을 쉬더니 풀어진 목소리를 냈다.
“……나 대신 죽을 것까진 없어, 루카. 아, 이렇게 입으면 되겠다. 전파 교란기를 팔다리에 붙이는 거 잊지 말고.”
지젤이 옷가지를 내 옆에 두곤 앞 좌석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