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1)
배드 본 블러드-81화(81/197)
081
나와 지젤이 탄 공중차량은 아크바란의 제1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비행장 따위와 규모가 달랐다. 제1공항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도시의 비행장은 중소형 비행체만 수용할 수 있다. 대형 비행체인 함선이나 비행선은 도시 안쪽이 아닌 외곽에 있는 공항에서 이착륙한다.
그 때문에 아크바란의 공항들은 외곽인데도 치안과 시설이 상층 구역 못지않게 좋았다.
우우우웅!
지금도 제국의 물류를 담당하는 초대형 화물선이 까마득한 그림자를 만들며 오갔다. 하부에 달린 대형 추진체만 수십여 개가 넘었는데, 저게 혹여나 저공비행이라도 한다면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미치겠군.’
내가 미칠 것 같은 이유는 딴 곳에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비행선의 위용은 지금 내겐 와닿지 않았다.
스륵.
내 하반신에서 흐느적거리는 치마가 낯설었다.
“얼굴 펴. 화장 뭉개지니까.”
공중차량 밖으로 먼저 나간 지젤이 말했다. 나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건 임무다.’
그리고 난 제국의 군인이지. 알량한 자존심으로 임무를 망치는 머저리가 아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게 불필요한 감정을 변기 물을 내리듯 내려보냈다. 난 불량품이 아니다. 불온하지도 않다.
“네, 아가씨.”
내가 변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초커에 달린 기능이었다. 다소 중성적이었다. 그러나 내 외견은 누가 봐도 여자였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 내 신분을 상기해 보자. 지금 내 이름은 케이사다. 두 달 전에 쿠스토리아 가문의 시녀로 들어왔다. 케이사는 하층 구역 출신이지만, 어릴 때부터 귀족 가문의 시녀로 내정된 상태로 교육을 받았다.
‘선별검사에서 귀족 가문의 몸종으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지.’
케이사는 순종적인 성격이며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하다. 나는 지금부터 그런 여자가 돼야 한다.
“아가씨? 아, 뭐, 맞지. 음.”
순식간에 바뀐 내 태도에 지젤이 더 놀란 것 같았다.
또각, 또각.
난 구둣발 소리를 내며 공중차량에서 내렸다. 하인은 자신의 위치를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기에 듣기 좋은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다닌다. 주인은 그 소리만 듣고도 자신의 하인이 오는지 알 수 있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비슷했다.
“곧 카르티카 가문의…….”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빌어먹을, 일레이에게도 이딴 식으로 말해야 한다. 다잡은 마음이 흐트러질 정도다.
“……일레이 도련님이 오실 겁니다.”
시작했으니 대충할 생각은 없다.
“그래, 루, 케…… 이사.”
정신 차려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지젤 쪽이다.
‘지젤은 군인이 아니다.’
그녀는 나와 다르다. 지젤은 감시하며 지켜야 할 대상이다. 이번 임무에 실수가 생긴다면 지젤에게서 나올 것이다. 그 실수를 덮고 메워야 하는 건 군인인 나다. 내가 정신 차려야 했다.
또각, 또각.
나는 지젤 앞에 섰다. 공항을 오가는 인파 사이에서 일레이가 보였다.
여러 가지로 허전한 나와 달리 일레이는 무장한 채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생체 부위를 지키려고 가슴 보호구를 착용했고, 목덜미에는 얇게 접힌 가변식 헬멧이 걸려 있었다.
움찔.
일레이가 머뭇거렸다. 날 봤기 때문이다. 일레이의 테두리 안광이 나를 분석하느라 바쁘게 빛났다.
나름 철저한 분장이지만 나와 수년을 지낸 일레이의 눈썰미를 속이긴 힘들다.
……젠장.
날 알아챈 일레이는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의 뺨이 붉다 못해 잔뜩 부풀고 있었다.
“미, 미안, 미안.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역시…….”
일레이가 내 앞으로 걸어오며 작게 속삭였다. 그는 내가 여장한 까닭 따윈 묻지 않았다.
표면적인 임무인 지젤 쿠스토리아의 호위다. 하지만 그 내막에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적인 일이 있다. 일레이라면 벌써 눈치챘을 것이다.
‘권한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
제국 군인의 덕목이다. 일레이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날 시녀 취급하며 지나친 일레이가 지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근위대에서 호위 임무로 파견 나온 일레이 카르티카입니다.”
생김새와 행동거지만 보면 일레이는 귀족 도련님의 모범 그 자체였다.
“……지젤 쿠스토리아입니다. 몇 번이나 뵀는데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지젤과 일레이는 긴밀하게 교류한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때문이지.’
난 일레이에게 지젤에 대해 말했고, 지젤에겐 일레이의 이야기를 했다.
“당신과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지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겠네요. 이쪽은…… 제 시중을 맡은 케이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케이사.”
일레이가 날 보며 말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기계적인 미소로 중립을 유지했다. 아까의 폭소가 거짓말 같았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일레이 님.”
나도 치맛자락의 양끝단을 잡으며 인사했다.
내 표정과 어투도 일레이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이었다.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건 아니다. 일레이의 미소처럼 나도 인위적이고도 가식적인 감정을 기계 위에 덧대고 있다.
우린 그런 존재다.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의 꼴을 한 기계가 될 수 있었다.
“……끝인가요?”
단조로운 인사에 지젤이 머뭇거렸다. 절친한 두 사람이 만나서 떠들어댈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 케이사와 일레이는 처음 만난 사이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방에 눈이 많았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아가씨, 더 늦기 전에 수속부터 밟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내가 지젤을 떠밀 듯 말했다.
“고마워, 케이사. 간만에 공항에 오는 거라 정신이 없었네. 응, 정신 차려야지.”
지젤은 걸음을 서둘렀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 * *
제1공항에는 출입역만 오십 개가 넘었다. 개인용 공중차량을 통한 국내선은 30번대 역이 담당했다.
제국의 도시 간 이동에서 공중차량을 쓰는 이는 귀족과 부유층이다. 하층민은 지상차량이나 열차를 주로 이용했다.
하지만 특권층조차 허가를 받아야 아크바란의 영공을 출입할 수 있다. 허가증이 없이는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칙의 이야기다.
현실적으로는 불법적인 비행과 통행을 전부 막진 못한다. 그리고 진짜 권력자들은 원칙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뒤가 구리지 않다면 출입 허가증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지.’
수속을 마친 지젤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출입 허가증이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것도 귀족의 특권.’
우린 당일 방문해 십여 분 만에 허가증을 받아냈다. 가문의 후광이 신분을 보증하기에 별다른 조사를 받지도 않았다. 하층민이라면 허가증 발급만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지금부터 지젤의 출입기록과 행선지가 공항 전산망에 등록됐을 것이다. 우린 바바라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허가장을 받은 우리는 인파를 헤치며 타고 온 공중차량으로 돌아갔다.
-운행 방식을 수동으로 전환합니다.
지젤이 조작하자 안내 음성이 나왔다. 그녀가 운전석에 앉으려 하자, 일레이가 황급히 다가왔다.
“운전을 제가…….”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기계장치를 만지는 걸 좋아해서요.”
지젤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 말은 사실이다. 그녀의 아카데미 전공은 기계공학이다. 실제로 그녀가 사이버네틱 의체와 기계를 만지는 걸 나는 자주 봤었다.
“그렇다면야 맡기겠습니다.”
일레이도 순순히 물러나며 안쪽에 앉았다.
“일레이도 이미 알겠지만, 제 목적지는 오토노바스의 연구소입니다. 시제품 차량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요. 아마 이쪽 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견학하러 오겠죠.”
지젤이 공중차량을 차근차근 조작해 이륙을 준비하며 말했다.
“오토노바스의 시제품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하죠. 저도 궁금할 정도니까요. 아, 혹시…….”
일레이가 사교성을 발휘해 관심 있는 척하며 말했다. 그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면서 지젤에게서 말을 끌어내려고 기계공학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오토노바스.’
나도 잘 알고 있다. 지상차량 위주로 생산하는 거대기업이었다. 공중차량과 비행체 분야에선 한 끗 밀려도 지상차량에선 압도적인 기술력과 신뢰성을 자랑했다.
‘모든 게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헤일라스가 안배한 계획다워.’
많은 귀족이 오토노바스 시제품을 보러 갈 것이다. 지젤의 방문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바바라가 지젤이 전시회에 올 거라고 확신하면서 이날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
“아크바란 시내에선 사족 궤도차량을 보기 힘들죠. 도심지에 적합한 형태는 아니니까요.”
일레이가 말했다. 그는 지젤과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험지에선 사족 궤도차량을 쓰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오토노바스의 시제품도 사족 궤도차량이라고 추측하고 있죠.”
“흠, 전 고전적인 사륜차가 좋더라고요. 그쪽도 많이 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두 사람의 대화는 내 관심사와 까마득히 먼 이야기였다.
나는 눈을 감으며 딴생각을 했다. 지금 내 무장은 허벅지에 달고 있는 단검이 전부였다.
난 치맛단 너머를 더듬으며 단검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라켄 부트.’
어려운 이름을 가진 단검이다. 충격권총 루이나나 고압축 중량병기 크루시스와 달리, 그라켄 부트는 쓸 일이 없다시피 했다.
‘일레이가 준 선물이지.’
일레이의 설명으론 굉장한 보검이었다. 외계 종족 에퀘시안의 지휘관급 전사만 가질 수 있는 보물이라고 했다.
‘여차하면 지금은 이걸로만 대응해야 한다.’
루이나와 크루시스는 공중차량의 보관함에 있었다. 둘 다 제국 공방에서 생산한 고위력 무기인지라 일개 시녀가 소지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뭐, 일레이가 있으니 괜찮겠지.’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일레이를 관찰했다.
지난 몇 달간, 일레이는 남들보다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으르게 보낸 세월을 책망이라도 하듯이 자신을 몰아갔다.
일레이가 강해지고 있다는 게 내 직관으로 느껴졌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케이사.”
시선을 느낀 일레이가 느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찰나였지만, 우린 눈빛과 표정을 통해 암묵적인 동의를 끝낸 뒤였다.
“보기 드문 미남이신 것 같아서요. 눈이 가네요.”
내가 단정한 태도로 천천히 말했다.
끽, 덜컹!
공중차량이 사고라도 난 듯이 크게 흔들렸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지젤이 내 말을 듣고선 휘청거린 탓이다.
“끕, 끅. 일, 일레이. 부탁입니다. 조종을 대, 대신…….”
지젤이 한 손으로 조종간을 잡고, 반대 손으론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우리의 장난이 조금 지나쳤던 모양이다.
일레이는 공중차량이 뒤집히기 전에 운전석에 앉았다. 자리를 바꾼 지젤이 겨우 표정을 추스르더니 나를 노려보며 입을 뻥긋거렸다.
‘진지하게 임무에 임해야 한다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지젤의 지적이 옳다. 방금은 장난쳐선 안 됐다. 충동을 참지 못한 나와 일레이의 실수다.
그러나 우린 완벽한 기계가 아니다. 그래, 완벽하지 않지. 그래서 아직은 기계에 가까운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