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3)
배드 본 블러드-83화(83/197)
083
나는 숙소 방에 들어가자마자 내부를 확인했다.
카메라 같은 감시장비는 보이지 않았다. 내게 발견되지 않을 정도면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러나 당연히 나라고 완벽한 건 아니다. 혹시 있을 도청에 대비해 시녀의 말투와 태도를 유지했다.
‘침대는 둘이지만…….’
공간을 나눌 가벽조차 없었다. 하나의 방으로 훤히 개방된 구조였다.
“저는 소파에 쉬고 있겠습니다.”
내가 그리 말했다.
소파에 앉으면 침대와 욕실을 등진 채로 입구를 볼 수 있었다. 지젤의 사생활과 보안을 둘 다 챙길 수 있는 위치였다.
“편하게 있어도 돼.”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내가 강조했다. 나는 하루 이틀 정도는 자지 않아도 문제없었다. 아마 일레이도 오늘은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알았어.”
지젤은 찜찜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끌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씻는 소리가 났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귀를 쿵쿵 두드렸다. 내 멍청한 뇌는 물줄기에 부딪히는 지젤의 나신을 자꾸만 상상했다.
‘임무에 집중해, 루카.’
난 눈을 게슴츠레 뜨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바라가 움직인다면…… 내일 시제품 현장 운행과 복귀할 때다.’
최악은 바바라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내 행동은 머저리 같은 광대 짓이 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이 꼴이 됐는데 얻는 게 없다고?
제발, 우리에게 접근해라, 바바라.
나는 간절히 기도하듯 바랬다.
쏴아아.
소리가 날 때마다 내 감각은 자꾸만 지젤에게 향했다. 이건 호위를 위해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딸깍.
물줄기가 멎었고,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광경이 그려졌다. 덜 마른 몸으로 나오는 지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바닥에 톡톡.
스륵.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소리도 났다.
나는 당연히 씻지 않았다. 분장에 가까운 화장을 내일까지 유지해야 한다.
“이제 이쪽을 봐도 돼.”
지젤이 말했다.
난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펄럭거리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고급 원단을 쓴 잠옷은 부들부들하면서 광택이 흘렀다.
위이잉.
침대에 편히 앉은 지젤이 단말기를 조작해 홀로그램을 띄었다. 오토노바스 시제품에 대한 상세제원이었다.
“차량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쪽으로도 장래를 계획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녀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어디까지나 내 관심사는 사이버네틱 의체야. 그래야 가문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저는 잘 모르지만, 오토노바스는 의체 쪽과 크게 관련이 없는 회사인 듯합니다.”
“차량 전문 기업이지. 하지만 하나를 파고들려면 연관된 분야도 같이 두루두루 알아두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말인지는 너도 알잖아, 케이사.”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나는 군인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싸우는 법만 배우는 게 아니었다.
잘 싸우기 위해선 온갖 자질구레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다방면으로 얕고 넓게 알고 있어야 한다.
“케이사, 내 손위 형제이자 가문의 양자인 루카우스를 알지?”
지젤이 문득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턱만 움직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멋대로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조금 놀랐어. 새삼 새롭게 보게 되더라고. 아버지가 왜 아끼는지도 알 것 같고.”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서요.”
“집안을 위해서 그 드센 자존심을 굽히면서 행동하더라고.”
“군인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제국의 군인은 그 어떤 명령에도 절대복종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덤덤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 루카는 마냥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 아니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거지.”
“그게 군인으로서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억양이 좀 더 차갑게 가라앉은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우린 잠시 말없이 서로를 보았다.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내가 일어서서 음료와 간식이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자기 전에 따뜻한 음료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지젤이 단말기의 홀로그램을 껐다. 방안의 환한 불빛도 하나둘씩 사그라들었다.
달빛처럼 은은한 등만이 유일하게 사물의 윤곽을 간신히 밝힐 뿐이었다.
“……케이사. 그보다 이리 와서 한번 안아주고 가, 유모처럼. 늘 안고 자던 인형을 놔두고 왔거든.”
지젤의 목소리가 유독 더 달콤하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였다.
지젤은 바바라 때문에 불안한 것이리라.
나는 망설이다가 발걸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침대 옆에 선 나는 상체만 숙여 팔을 뻗었다.
지젤도 몸을 살짝 들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좋은 냄새가 난다.
턱과 목덜미가 살짝 닿았다. 포옹은 짧았다. 등과 어깨를 잡던 그녀의 손이 느슨하게 떨어졌다.
어둠 속의 윤곽만으로도 지젤의 표정이 보였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네, 고마워.”
“천만의 말씀.”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곧 지젤의 고요한 숨소리가 들렸다.
……난 아마 임무가 아니더라도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 * *
기다리던 아침이 밝았다.
일출과 똑같은 색온도로 내부의 조명이 하나둘씩 밝아졌다.
“으, 으음, 아, 그래. 여긴…….”
지젤은 신음하듯 일어나더니 혼탁한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날 보더니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일어나자마자 내가 보이니 당황한 모양이다. 이런 상황은 익숙지 않을 테니까.
나도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잡념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했다. 느슨한 건 끝이다. 지금부턴 다시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
준비를 마친 나와 지젤은 방문을 나섰다.
“아가씨들, 간밤은 푹 주무셨나요?”
우릴 기다리던 일레이가 가슴을 손을 대며 인사했다. 저 미소 그득한 낯짝에 주먹이라도 꽂아 넣고 싶었다.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무 뻔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의 아침 기온은…….
오토봇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안내를 시작했다.
견학 일정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린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오토노바스 사의 안내를 따라 연구소 외부의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드륵, 드륵.
시험장에는 시제품 차량 아라크네가 보였다. 기술자와 연구원이 차량에 들러붙어서 정비와 조율을 하고 있었다.
“전술적으로 봐도 굉장히 까다로운 지형입니다. 차량 진입도 힘들고요.”
일레이가 드넓은 시험장을 보며 말했다. 시험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울퉁불퉁한 암석지대였다. 크고 작은 바위가 불규칙하게 땅에 박혀있었다.
-아라크네로 암석지대를 가장 빨리 통과하시는 분에겐 당사가 준비한 소정의 선물이 있습니다. 가벼운 여흥으로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오토봇이 눈앞에 홀로그램 지도를 투사하며 말했다. 지도에는 암석지대를 통과하는 경로가 여럿 나왔다.
“내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군.”
“실력은 무슨, 가다가 꼬라박지나 마.”
사람들 사이에서 들뜬 말이 오갔다.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견학을 즐기러 왔다.
기이잉, 기잉.
오토노바스의 직원이 시제품 아라크네에 탑승했다. 아라크네는 사족 바퀴로 가속하더니 단숨에 암석지대로 들어갔다.
위이이이잉!
네 개의 다리가 완충 역할을 하며 험한 지형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간혹 큰 바위라도 나오면 다리를 높여 통과했고, 낮은 틈 사이로는 다리를 낮춰서 빠져나갔다.
“오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걸.”
“호오…….”
험지 주파 성능이 상당히 뛰어났다. 어지간해선 속도가 줄지 않았다.
거리가 꽤 멀어졌다. 의안의 성능이 미진한 이들은 시각 보강 장비를 고글처럼 덧대거나 망원경을 이용해 아라크네의 질주를 관측했다.
아라크네는 거암에 접근했다. 모두가 우회해서 통과할 거라 생각했다.
키이이잉!
아라크네의 출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멀리서도 들릴 만큼 소리가 요란했고, 보조 다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퉁!
아라크네는 뛰어오르더니 거암에 들러붙었다. 가파른 경사인데도 보조 다리가 용케 접지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거미 같기도 했다.
좌중이 순간 고요해졌다. 이어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이건, 꽤 놀랍네.”
일레이가 팔짱을 풀며 감탄했다.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라크네의 기동성은 굉장히 뛰어났다. 잘만 보완하면 가변형의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군사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암에 들러붙은 아라크네는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위로 올라가더니 반대편으로 뛰어내렸다.
삑!
도착한 아라크네가 멈췄다. 기록은 4분 32초가량이었다.
시범 주행을 마친 아라크네가 암석지대 외곽을 돌아서 복귀했다.
아라크네가 돌아오자, 손뼉을 치는 이도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차량이었다. 벌써 직원에게 다가가 선주문하는 귀족도 있었다.
“지젤, 시범 주행을 해보실 겁니까?”
일레이가 지젤 곁에 서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러려고 왔으니까요.”
지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크네는 2인승 차량이었다. 높은 수준의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차량 내부의 안정성도 도모하려면 탑승자를 늘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제가 같이 타겠습니다. 경호 역이니까요.”
일레이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를 부탁합니다, 일레이 님.”
바바라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고가 터지면 일레이가 행동하기 편했다. 내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뛰어다니면 보기 이상할 테니까.
그리고 그만큼 난 일레이를 믿고 있다. 일레이라면 설사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지젤의 목숨을 우선시할 것이다.
기잉, 기이잉.
견학자들이 아라크네에 탑승했다. 오토노바스의 직원이 들러붙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라크네는 한 번에 네 대씩 기동했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경쟁이 붙는 느낌이 있기도 했다.
나는 지젤과 일레이가 탑승한 2번 아라크네를 응시했다.
‘여기서 바바라가 접근할 가능성은 낮아.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바바라가 반사회적일지라도 어쨌거나 제국 측의 인간이다. 은밀하게 일을 벌이려고 하겠지.
나는 3번 아라크네로 시선을 돌렸다. 2번을 탄 지젤을 보고 허겁지겁 지원한 엔리코 라간이 보였다.
‘바보인지 순정파인지…… 아니면 둘 다던가.’
난 엔리코 곁에 붙은 사내를 응시했다. 그는 경호원인 듯이 총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생각해 보면 좀 웃기긴 하다. 저렇게 단단히 무장해도 맨손의 일레이보다 위험하지 않다니 말이다.
기잉.
나는 감시자 권한으로 상위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엔리코 곁에 붙은 경호원의 신원을 확인했다.
‘네더 알롱.’
신원이 불명확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전신의체 등록번호까지 정직하게 제국의 전산망에 나와 있었다.
내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 상세한 정보가 망막 디스플레이에 강조됐다.
‘어머니와 함께 하층 구역에 살았지만, 친부는 상층 구역의 귀족 가문 가신이라…… 넉넉하게 지원을 받았어. 사생아지만 하층 구역에선 남부럽지 않게 살았군. 교육도 꽤 괜찮게 받았고.’
네더 알롱은 선별검사를 끝내고 적성에 맞는 직업학교를 들어갔다.
움찔.
여기서 난 눈을 잠시 멈췄다.
네더 알롱은 직업학교에서 기초사무원 양성과정을 거쳤다. 군인이나 용병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뭐, 뒤늦게 경호업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괜찮은 성능의 전신의체를 가지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긴 하다. 계속 저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엔리코가 라간 가문에서 어느 정도 지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귀족 집안에서 네더 알롱 같은 반쪽짜리 경호원을 붙일까?
내가 생각하는 사이에 아라크네의 기동음이 커졌다.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와, 참, 멋져요! 저, 저게 아, 아라크네라는 거죠?”
귀에 익은 목소리가 굉음과 소음 사이를 뚫고 내 귀를 찔렀다.
내 동공이 빠르게 목소리를 쫓았다. 인파 사이에서 한 소녀가 보였다. 화사한 적금발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바바라!’
내 오른쪽 의안이 바바라의 신원을 빠르게 확인했다. 사소한 생체 데이터까지 모든 게 일치했다. 누가 뭐래도 바바라였다.
그녀는 테러리스트 수배범 주제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는 고작 삼십여 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나는 인파를 밀어내듯 바삐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