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4)
배드 본 블러드-84화(84/197)
084
내게 수십여 미터는 짧은 거리다. 가속만 붙는다면 도약 몇 번으로도 훌쩍훌쩍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파로 길이 막혀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헤쳐 나가며 바바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라크네를 구경하던 바바라는 뒤를 돌더니 냅다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그녀의 걸음이 묘하게 비틀거렸다.
‘젠장, 걸리적거려.’
내 기나긴 치마가 사람들에게 걸리고 밟혔다. 당장이라도 이 불편한 천 쪼가리를 찢어서 내던지고 싶었다.
바바라는 작은 몸집으로 인파를 빠져나가더니 곧장 견학자들을 위한 휴게소로 들어갔다. 휴게소라지만 5층으로 규모는 꽤 컸다. 화장실과 식당, 휴식실 등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무슨 속셈인 거냐.’
나도 인파를 빠져나오자마자 걸음을 서둘렀다.
바바라가 건물로 먼저 들어갔다. 내부는 텅 비어있을 것이다. 아직 시범 주행 초반인지라 사람들은 아라크네를 구경하느라 휴게소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화장실 용무로 오가는 이만 몇몇 있었다.
“하하, 아가씨, 화장실이라도 급한…… 어이, 이봐!”
막 입구에서 나온 중년의 귀족 사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용무를 방금 마쳤는지 손의 물기를 탁탁 털고 있었다.
나는 사내를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귀족 사내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휘릭!
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귀족 사내의 손목을 잡아채며 뒤로 꺾어서 제압했다. 이따위 일로 시간을 빼앗기는 게 짜증 났다.
“팔다리 멀쩡하고 싶으면 신경 끄고 갈 길이나 가시죠. 이해했으면 고개를 두 번 끄덕이세요.”
내가 한 번 더 압박을 가하자, 사내의 팔꿈치에서 부품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윽, 알, 알았네. 알았어.”
나는 그제야 사내를 놓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닫히는 문 사이로 사내의 경고가 들렸다.
“어, 어느 가문의 시녀인지 알아내 혼쭐을 내주마! 감, 감히!”
난 귀를 닫듯이 그의 말을 무시했다.
‘바바라는 어디로 간 거지?’
건물 입구에서 이어지는 복도는 고요했다. 바바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 감각과 직관을 믿어라.’
나는 눈을 감으며 바닥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토독, 톡, 따각.
미세한 잡음 속에서 내가 원하는 소리를 집어내야 한다.
‘청각 강화 훈련을 근래 꾸준히 하길 잘했군.’
청각 강화는 최근 내 개인 훈련 과제였다. 소리 반사를 이용한 환경의 식별과 인지, 즉 반향정위 능력을 터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타닥, 탁.
나는 눈을 떴다. 방향을 감지한 나는 소리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에서 선명한 발소리가 났다. 나는 계단의 난간 사이를 펄쩍 뛰어다니며 단숨에 층을 오갔다.
“하아, 하아.”
복도 중앙에는 숨을 헐떡이는 바바라가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마지막 힘을 짜내듯 뛰었다. 그 걸음은 위태로울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함정인가?’
너무나 쉽게 따라잡았다. 그렇기에 나는 잔뜩 경계하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내가 아는 바바라는 기이하다 못해 기괴한 소녀였다. 그 어둠이 깊어 나조차도 꺼림칙했다.
그러나 주변 환경에서 걸리는 이물감과 위화감은 없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오로지 ‘바바라’뿐이었다.
“하아, 하아…… 으윽!”
뛰어가던 바바라가 철퍼덕 넘어졌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동공은 공포로 흔들렸다.
지금의 나는 고작해야 시녀다. 무서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설사 바바라가 내 여장을 꿰뚫어 봤을지라도 나를 두려워할 인간이 아니었다.
“너, 정말로 그 바바라가 맞는 거냐?”
내가 넘어진 바바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까이서 홍채의 무늬를 분석해 봐도 바바라가 맞았다.
그러나 내 직감은 ‘저 소녀는 바바라가 아니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 나는…… 바, 바바라입니다.”
추궁을 길게 할 시간은 없다. 난 어두운 갈망과 욕망을 끌어냈다.
……난 예전부터 바바라를 반쯤 죽여버리고 싶었다.
우둑!
내가 바바라의 약지를 잡아서 꺾었다. 깔끔하게 부러뜨리지도 않았다. 거칠게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으허, 아, 아아아!”
그래, 이 소녀가 정말 바바라라면 이딴 나약한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문과 폭력을 선택한 나를 비웃겠지.
“넌 바바라가 아니잖아. 똑바로 말해. 안 그래도 그 쌍판을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고 싶으니까.”
“우, 우우, 우으으으, 제발…….”
소녀의 정신력이 강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기어코 입을 닫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겐 시간이 없다. 함정이 있다면 바로 알아내야 한다.
우득, 우득.
난 그녀의 손가락 두 개를 더 꺾고 꼬았다. 살점과 근육이 뒤틀리며 얽혔다.
내 의수의 출력이면 피와 살로 된 육체를 장난감처럼 부술 수 있었다. 타고난 육신은 이토록 나약하다.
우드득!
그녀의 부러진 손가락을 감싸며 쥐어짰다. 움켜쥔 내 손아귀에서 진액 같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녀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짜악!
난 손바닥으로 소녀의 뺨을 긁듯이 때렸다. 그녀의 피부가 뜯겨나가며 걸레짝처럼 너덜거렸다.
“비명 말고 대답을 해. 넌 누구이고, 바바라는 어딨지?”
“제 이름은 바바…….”
뭐, 이제 됐다.
휘릭.
나는 치맛자락을 젖히며 단검 ‘그라켄 부트’를 꺼냈다. 난 기다리지 않고 칼끝을 소녀의 눈 밑에 찔러넣고 튕겼다.
툭!
그녀의 안구가 칼에 걸리며 튀어 올랐다. 생체인지라 감촉이 물컹물컹했다.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말없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소녀의 몸을 훼손할 생각이었다. 알아서 질문에 답할 때까지 반복하면 그만이다.
훈련받지 못한 민간인이 이겨낼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 소녀도 내 각오와 결단을 느낀 듯했다.
“으, 아아악, 아아아! 말, 말하겠, 아, 아, 눈, 아파, 아파아아아…….”
“아니, 대답하든 뭐든 이젠 상관없어. 난 네 네 살가죽부터 천천히 도려낼 거야. 죽여달라고 할 때까지. 날 짜증 나게 했으니까.”
소녀의 남은 눈이 커졌다. 겁에 질린 혓바닥이 진실을 토하려 했다.
“제, 제 이름은 네더, 네더 알롱입니다! 제발! 그만, 너무 아파서, 견, 견딜 수가 없어요. 부, 부탁입니다, 흐으윽.”
“네더…… 알롱?”
나도 당황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네더 알롱은 지금 엔리코 라간 곁에 붙은 경호원이다. 전신의체 등록번호도 일치했다. 지금 내 눈앞에 ‘바바라의 형태’를 한 소녀가 네더 알롱이라면?
엔리코 라간 곁에 붙은 네더 알롱은 누구란 말인가?
‘설마, 바바라는…….’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바바라는 정말로 비범할 정도로 정신이 나간 여자였다.
휙!
난 자칭 네더 알롱이라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잡아채서 젖혔다. 내 끔찍한 추측은 사실이었다.
희미한 수술 자국이 이마 테두리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두개골을 열었다가 닫은 흔적이었다.
“이 미친년이……!”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난 ‘그’를 내려다봤다. 소녀의 몸에 갇힌 사내가 불쌍하면서도 혐오스러웠다.
‘바바라는 자신의 뇌를 네더 알롱의 전신의체에 집어넣고, 네더 알롱의 뇌는 원래 자기 육신에 집어넣은 거야. 그저 미끼로 삼기 위해서…… 타고난 육신을 버렸다!’
타고난 육신은 유치와 같다. 닳고 부러지더라도 버리면 된다. 그렇다고 이따위 방식으로 육신 전부를 소모할 정도로 가벼이 여기는 자는 없었다. 심지어 전신의체로 바꾸고 나서도 타고난 육신을 냉동 보관하는 이도 있었다.
바바라는 네더 알롱 전신의체와 자신의 육신을 바꿨다. 자신에게 맞춘 전신의체가 아니면 부작용이 심하다.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바바라는 토하고 싶을 정도로 역한 변신을 했다. 내 여장은 애교 수준이었다.
“그럼 엔리코 라간 곁에 있는 네 전신의체가 바바라인 건가?”
“말, 말만 잘 들으면 원래 신체를 돌, 돌려준다고 해서…….”
네더 알롱이 울먹이며 말했다. 난 그를 내동댕이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바깥에선 지젤과 일레이, 그리고 엔리코와 바바라가 아라크네를 타고 있다.’
엔리코가 아라크네를 조종해 지젤에게 가까이 접근할 것이다. 엔리코가 그런 행동을 해도 지젤은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엔리코의 집착과 성격이라면 당연한 거니까.
‘우리가 바바라를 끌어들이려고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꾸몄듯이, 바바라도 역겨운 희생을 치르며 지젤에게 자연스레 접근했다.’
나는 귓가에 손을 대며 통신을 시도했다. 일레이와 지젤은 둘 다 통신을 받지 않았다.
‘이미 일이 일어난 거다.’
엔리코의 아라크네가 지젤의 아라크네에 접촉하고 남을 시간이었다. 암석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외부에서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내 불안감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지금 지젤 곁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일레이다.’
바바라가 어떤 준비를 했든 간에 일레이는 그녀의 예상을 넘는 기량을 보여줄 것이다. 바바라는 결코 일레이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일레이는 지금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바바라는 네 몸을 돌려주지 않을 거야. 살고 싶으면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난 짧게 말하며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웅성, 웅성.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내가 휴게소 건물에서 벌인 소동은 신경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부, 부딪힌 건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아가씨가 타고 있지 않았어?”
“기계 결함?”
“어떻게 된 거요?”
암석지대에서 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오토노바스의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드론을 조작하고 있었다. 전시회 일정 도중에 사고가 생겼다. 그리고 자칫하면 쿠스토리아 가문의 아가씨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오토노바스의 정찰 드론이 빠르게 암석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탄 공중차량도 이륙하려고 했다.
끼이이이익!
나는 구급 공중차량의 닫히는 문을 붙잡아 세웠다. 개폐를 담당한 모터는 터질 듯이 굉음을 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지금은 응급 상황이라고!”
구급대원들이 날 보며 소리를 질렀다.
“쿠스토리아의 고용인입니다. 제 아가씨께서 사고를 당했으니 저도 탈 자격이 있습니다.”
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쿠스토리아라는 말에 구급대원들도 자리를 내어줬다.
“뭔 시녀가 힘이 그렇게…….”
그들은 내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공중차량의 문은 내 손자국을 따라 찌그러져 있었다.
공중차량은 암석지대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구급대원들은 정찰 드론의 시야로 사고 현장을 미리 확인하고 있었다.
불안이 팽배하게 맴돌았다. 일이 잘못되면 전시회 관련자는 문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루카, 이쪽 상황은 방금 정리했다. 지젤은 무사해.
내 망막에 일레이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