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5)
배드 본 블러드-85화(85/197)
085
거암이 바위산처럼 솟구쳐 있었다.
그 아래에는 아라크네 두 대가 여기서 뒤엉킨 채로 부서져 있었다. 하나는 지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엔리코의 것이었다.
세게 부딪혔는지 아라크네의 다리가 찌그러지고 꺾인 채로 너저분하게 널브러졌다.
“내려간다, 하나, 둘…….”
구급대원들이 착륙하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그들은 로프를 타고 가뿐히 착지하더니 가장 먼저 지젤과 엔리코의 상태를 살피며 챙겼다.
나도 한 손으로 줄을 잡고 미끄러지며 땅에 발을 내디뎠다.
일레이가 구급대원의 진료를 거부했다. 그는 손바닥과 옷을 툭툭 털면서 내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전투의 흔적이 그의 몸에 옅게 남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고의 흔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일레이가 내게 다가오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쪽 아라크네가 갑자기 통제를 잃고 멋대로 뒤집혔어. 바위 밑으로 떨어지면서 사각지대가 생기자마자 저쪽에서 날 공격하더라. 전기마취탄도 서너 발 맞아서 자칫하면 죽을 뻔했어.”
말과 달리 일레이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팔다리에 박힌 전기마취탄을 억지로 빼내더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젤을 감싸다가 대신 맞았을 것이다.
우리의 고성능 전투의체는 전기마취탄 한둘을 팔다리에 맞는다고 무력화되지 않는다. 둔해지는 게 고작이다. 정 효과를 보려면 중추신경계에 명중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사고, 비무장 상태, 전기마취탄으로 둔해진 의체.
일레이도 꽤 고생했을 것이다.
‘일레이를 데려오길 잘했어. 전투 상황을 남들이 목격했다면 수습이 까다로웠을 거야.’
나와 지젤은 비공식적인 사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단순한 사고로 처리해야 한다.
나와 지젤은 재빠르게 습격을 사고로 위장했다. 일레이도 눈치껏 우리와 입을 맞추며 증거를 숨기고 처분했다.
남은 건 엔리코 라간과 네더 알롱으로 위장한 바바라였다. 그들은 기절한 채로 구석에 누워있었다. 일레이의 깔끔한 실력이 돋보였다.
“죽이지 않았어. 지젤이 생포하라고 말하더라고. 죽이지 않는다고 꽤 힘들었어.”
일레이가 네더 알롱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레이, 휴게소 건물에 가면 제국의 수배범 ‘바바라’가 있어. 근위대 권한으로 신원을 확보해서 끌고 와.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정확히 말해서, 바바라의 육신에 갇힌 네더 알롱이지만.
사고 현장에는 오토노바스의 고위 간부까지 찾아왔다. 고위 간부는 공중차량에서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뛰어오며 식은땀을 뻘뻘 닦아냈다.
“정, 정말 죄송합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내고 책임자를 즉각…….”
고위 간부가 연거푸 사죄했다. 괜스레 내가 미안했다.
아라크네는 이상이 없었을 것이다. 바바라가 모종의 수단을 통해 조작해 사고를 유발했겠지. 바바라의 장난질로 옷 벗을 사람이 여럿 될 모양이다.
구급대원들이 엔리코 라간과 네더 알롱을 호송하려고 오고 있었다.
“아, 잠시만요. 엔리코 라간과 그 경호원은 이쪽이 데려가겠습니다.”
일레이가 들것을 펼치는 구급대원을 막으며 말했다. 그들은 의아한 눈으로 일레이를 쳐다봤다.
“일단 저희 의료진이…….”
“애초에 사고가 생긴 것도 귀사 측의 실수 때문인데 이대로 맡기긴 꺼림칙하군요. 혹시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겁니까? 귀족만 노려 납치하는 집단이 제국 곳곳에 있다는 소문도 들었거든요.”
일레이의 뒷말이 차가웠다.
“저흰 신원이 확실한 오토노바스 소속의 의료 전문가입니다. 정밀검사는 하고 나서 신변을 그쪽으로 인계하겠습니다.”
구급대원의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일레이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분위기가 사나워지려던 찰나에 고위 간부가 또 헐레벌떡 뛰어오며 중재했다.
“잠, 잠깐! 그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해드리게나. 어차피 여기서도 간이 검사를 할 수 있잖는가. 단순히 기절하신 것 같으니까, 별일이 없겠지.”
“그러다가 나중에 일이…….”
구급대장이 끈질기게 따지고 들었다. 난 그의 직업의식과 책임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해가 되는 사람이다.
“엔리코 라간과 그 경호원의 신변과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가 책임지겠어요. 녹음해서 기록으로 남기셔도 됩니다.”
지젤이 나섰다. 그 말에 고위 간부는 화색이 된 표정으로 구급대장을 다그쳤다.
“책임지신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하게!”
투철한 책임감이 아둔한 보신주의에 묻혔다. 이렇게 상황은 끝났다.
우린 엔리코 라간과 네더 알롱의 신변을 오토노바스에게서 빼앗아 확보했다. 이어서 일레이는 자리를 이탈해 바바라를 확보하러 갔다.
* * *
오토노바스의 시제품 전시회는 엉망으로 끝났다. 사고 직후에도 아라크네 시범 주행을 계속했으나, 타려는 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고가 난 아라크네는 통째로 연구소에 실려 갔다. 오토노바스에서 차량 내부의 기록을 살피겠지만, 바바라가 손댄 거라면 데이터가 전부 증발했을 것이다. 그녀도 자신의 흔적을 남겨선 안 될 테니까.
우린 엔리코 라간, 네더 알롱, 그리고 바바라를 데리고 공중차량에 탑승했다. 그들은 전부 기절한 상태였다.
“라간 가문에서 엔리코의 신변을 받으러 오고 있어. 1시간 후면 올 거야. 입막음해 둘 게 있으면 해둬.”
일레이가 단말기를 조작하며 말했다. 그는 현 상황을 다방면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그중엔 근위대도 있었다.
“일레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요. 단순한 경호 임무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면서도요.”
지젤이 물끄러미 일레이를 보았다. 일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게 시선을 넘기듯 던졌다.
“루카에겐 빚을 진 게 많아서요. 무슨 사정이 있으신지는 모르지만, 루카의 친구로서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훗날, 제 출세를 위해서라도요.”
일레이는 단호하게 비밀엄수를 약속했다. 그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적 임무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지젤, 엔리코는 어디까지 관여하고 기억하고 있지?”
내가 차분히 물었다. 상황을 정리할 때였고, 엔리코에게 둘러대는 게 우선이다.
“그건 내가 처리할게. 엔리코가 가장 먼저 기절해서 기억하는 게 거의 없을 거야. 그리고 정말…… 바바라가 왔네, 엉망진창인 꼴로.”
지젤은 불안감이 섞인 시선으로 포박된 바바라을 응시했다. 바바라는 발목과 손가락이 부러진 채로 기절해 있었다. 내가 행한 고문의 흔적이었다.
‘저 가짜 바바라의 속은 네더 알롱이지만…….’
내가 진짜로 촉을 곤두세워 감시하는 쪽은 ‘네더 알롱의 전신의체를 사용하는 바바라’였다. 그쪽이 이번 사건의 원흉이자 흑막이다.
“일단은 엔리코부터.”
내가 엔리코를 들어서 공중차량 바깥으로 이동했다. 지젤도 따라 나왔다.
지젤은 정신활성제 주사를 꺼내 엔리코의 목덜미에 꽂아 넣었다. 말이 정신활성제이지, 강심제와 각성제의 혼합물이다.
치익.
약물이 출렁거리면서 엔리코의 몸에 스며들었다.
엔리코의 손발 말단부터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눈썹이 빠르게 떨렸다.
“엔리코, 일어나세요. 전 지젤 쿠스토리아입니다.”
지젤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어어억! 헉, 하아, 하아.”
깨어난 엔리코가 비명을 지르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두근거릴 심장을 붙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접니다, 엔리코.”
“지, 지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시범 주행 중, 사고가 일어났어요. 어디까지 기억하시고 계시죠? 걱정돼서 묻는 겁니다.”
“저를, 걱, 걱정? 제 경호원은요?”
엔리코는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젤의 살가운 태도도 그의 혼란에 한몫했을 것이다.
“네더 알롱은 안타깝게도 방금 사망했습니다.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니, 딱히 친분은 없, 없습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됐고요. 싼 가격으로 경호해 준다고 하길래 그냥 고용했죠. 아마 제 종사라도 되고 싶어서 아부를…….”
사정을 들어보니, 엔리코의 행동은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모르는 듯했다. 누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를 납치한다면 세상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남은 일은 저희가 수습할 테니, 이대로 라간 가문으로 복귀하시면 됩니다. 유감스러운 사고가 일어났지만,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네요. 다음엔 식사라도 한번 하시죠.”
“물, 물론입니다! 지젤! 전 멀쩡합니다.”
엔리코는 기운을 차리고선 일어났다. 그는 이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물끄러미 움찔했다.
“제 시녀입니다.”
지젤이 빠르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묘하게 낯익어서 어디서 봤나 싶었습니다.”
엔리코의 눈이 장식은 아닌 듯했다.
“하층 구역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아이입니다. 보셨을 리가 없죠.”
“하기야 그렇죠. 하층 구역의 인간 따위를 제가 알 리 없으니까요, 하하.”
여전히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인간이다.
어쨌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간 가문의 공중차량이 도착했다. 문이 열리면서 라간 가문의 가신들이 두 명 내렸다.
라간 가문의 가신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게 조금 있는 듯했으나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고개만 숙였다.
“아, 지젤. 아까 말씀하신 식, 식사라면 언제쯤…….”
“조만간 연락하겠습니다.”
지젤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만으로도 엔리코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리코와 그 가신들은 자기네들 공중차량에 올라탔다.
“죄 많은 여자가 됐네, 지젤.”
내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바바라도 잡았으니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루카.”
지젤이 퉁명스레 말하며 공중차량으로 들어갔다. 이제 바바라와 네더 알롱을 신문할 차례다.
끼익.
공중차량의 문이 닫혔다.
“이제 어떡할 거야? 루카. 말만 해, 도와줄 테니까.”
네더 알롱과 바바라를 감시하던 일레이가 벽에 기댄 채로 말했다.
“……일단은 말해둘 게 있어.”
난 바바라의 육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적금발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서 옅은 수술 자국을 내보였다.
“뇌 수술?”
일레이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
“수술은 수술인데…….”
나조차도 설명하기 꺼림칙했다. 제정신으론 저지르기 힘든 일이니까. 난 심호흡하며 간격을 두고선 말을 이어갔다.
“……바바라는 자신의 뇌를 꺼내서 네더 알롱의 전신의체에 집어넣었어. 그리고 네더 알롱의 뇌는 바바라의 생체 육신으로 들어간 거지. 우릴 기만하려고 몸을 바꾼 거야. 이해했어?”
설명이 끝나자마자, 일레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지젤은 눈만 크게 뜨는가 싶더니 입을 막았다.
비틀.
정황을 파악한 지젤은 넘어질 듯이 흔들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이, 이 사내가 바, 바바라라고?”
“확실해. 널 직접 만나려고 몸까지 바꾼 거지. 이제 깨울 건데, 대면하기 힘들면 잠깐 자리를 피해도 돼.”
지젤은 바바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런 바바라가 기괴한 방법을 통해 신체를 바꿔 나타났다.
지젤이 느끼기엔 바바라는 악몽 속의 괴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는…… 괜찮아. 지금은 너도 옆에 있으니까.”
지젤이 내 손을 세게 쥐었다. 그녀의 떨림이 내게 전해졌다.
“지금부터 바바라, 즉 네더 알롱의 전신의체를 깨운다.”
내가 그리 말하며 ‘바바라’의 뒷덜미를 매만졌다. 전신의체인지라 다소 강압적인 방식으로 약물을 주입해야 한다.
나는 흉기와도 같은 주사기를 꺼내 약물과 체결했다.
콰직!
송곳처럼 길고 단단한 주사기가 전신의체의 후두부를 관통하며 깊게 들어갔다.
꿀렁.
약물이 바바라의 뇌로 들어갔다.
파르르.
바바라의 눈꺼풀이 떨리며 서서히 열렸다. 동공은 오류라도 일어난 듯이 빙글빙글 돌다가 겨우 멈췄다. 그러나 사시처럼 좌우 동공의 초점이 달랐다.
“아, 아, 반, 반가워요오오. 여, 러분.”
바바라가 말했다. 사내의 음성이지만, 나와 지젤은 그 너머의 바바라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