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8)
배드 본 블러드-88화(88/197)
088
쿠스토리아 저택에서의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쥬페는 내게 험한 꼴을 당했다. 격의 차이가 이번에 명확하게 드러났다. 더군다나 쥬페는 대련 막바지에 기괴한 모습을 보였다. 평판의 타격이 컸을 것이다.
난 짐을 챙기며 비행장으로 나가려 했다. 그 찰나에 백부 아르투르 쿠스토리아가 나를 방문했다.
“……난 때가 되면 자네를 지지하겠네. 비록 양자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쿠스토리아다워. 걸출한 군인이 될 재목이지. 쿠스토리아 가문의 가주는 자네처럼 강해야 해.”
아르투르는 내 어깨를 잡으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생인 헤일라스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긴 머저리 형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게 자네보다 열 살 많은 딸이 있네. 사촌 간이지만 유전적으로 혈연은 아니니…….”
아르투르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저 말이 날 지지하는 진짜 이유였다. 나를 통해 자신의 손자를 다음 가주 자리에 두고 싶은 모양이다.
“백부님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대답해 드리기 힘드니 나중에 다시…….”
난 연습해 둔 완곡한 어법으로 확답을 피했다.
내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아르투르는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물론이지. 아직 시간은 많네. 조만간 내 딸아이에게도 말해두겠네. 난 자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자넨 내게 없는 걸 가지고 있고, 난 자네에게 없는 걸 줄 수 있네.”
질척거리는 게 수준급이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지나쳤다. 무례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아르투르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의 자손은 점차 머나먼 방계가 될 테니까. 대가 더 지나면 귀족 취급조차 못 받을 수도 있었다.
“루카, 가는 거야?”
난 저택 입구에서 지젤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무가 끝났으니까 가야지.”
“조만간 하층 구역 쪽으로 만나러 갈게.”
“거긴 놀이터가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지젤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사업을 위해서 가는 거지.”
“사업?”
나는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반문했다.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지젤은 그리 말하며 내 등을 떠밀어서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끼익, 쿵.
뒤돌아볼 틈도 없이 문이 닫혔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목을 매만지며 비행장으로 걸어갔다.
위이이잉!
공중차량의 시동음이 컸다. 그 아래에는 준비를 끝낸 헤일라스가 가문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날 발견한 헤일라스가 말없이 공중차량에 먼저 탑승했다. 난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마자 공중차량이 이륙했다.
쿠스토리아의 저택은 금세 멀어졌다.
“가문의 사적 임무는 일시적으로 중단입니까?”
내가 창밖을 보다가 헤일라스에게 시선을 두며 물었다.
“당분간은 보류네. 자넨 원래 임무로 복귀하게. 자네가 해야 하는 일 말일세.”
키누안의 뒷조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없는 임무다.
……키누안은 황실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자니까.
‘나는 헤일라스가 모르는 것도 알고 있다.’
내게 많은 기회를 준 헤일라스에게 죄책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헤일라스도 내게 항상 모든 걸 말해주지 않았지.’
나와 헤일라스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난 내가 가치가 있다는 걸 헤일라스에게 증명했다. 그렇기에 헤일라스는 내게 기회를 준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호의로만 유지된 게 아니다.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곱씹었다.
“……저는 쿠스토리아 가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쥬페를 후계자로 공표하고 넘겨주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쥬페는 질투와 불안감으로 망가질 겁니다.”
이게 내 나름의 도리였다.
‘나는 감시자이기에 가문에 해가 될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난 쿠스토리아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다.
“루카, 후계자 지명은 자네의 권한이 아니라 내 권리이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장님께서 저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오만하다면 오만하다고 비웃어주시죠. 절 지명하셔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비웃진 않겠네. 하지만 자네답지 않군. 근위대 생도 루카는 루카우스가 되기 전부터 출세 지향적인 성격이었지.”
“일가를 이끄는 건 제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하층 구역에서 조직을 만들면서도 느꼈습니다.”
“어떤 면에서?”
헤일라스는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평온히 물었다.
난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유약해 보이니까 말하기 싫습니다만, 명령이라면 대답하겠습니다.”
헤일라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도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더는 캐묻지 않았다.
“흠, 근위대장의 입장이라면 대답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가족끼리 하는 이야기에 가깝지. 사춘기 아들의 복잡한 심경을 캐묻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네.”
“사춘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살짝 불만을 담아 말했다.
“하하, 정말 사춘기가 지났다면 방금은 웃어넘겼겠지. 아직 자넨 예민한 시기야. 그래서 더 성장할 수 있지.”
헤일라스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나는 공중차량에서 보내는 이 짧은 시간이 좋았다. 헤일라스와 단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헤일라스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헤일라스 개인을 위해서 말이다. 그만큼 그는 훌륭한 대장이었다. 자진해서 목숨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면모가 있었다.
‘이것도 헤일라스가 노린 걸까.’
우리의 유대는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헤일라스가 의도한 것일까.
입맛이 쓰다. 나는 목이 타는 것도 아니면서 물을 마셨다.
어느덧 아크바란이 공중차량 아래에 넓게 펼쳐졌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눈 감아도 지리를 다 알 것 같았다.
쉬이이이이.
공중차량은 근위대 비행장에 착륙했다.
척!
헤일라스가 내리자 마중 나온 부관과 근위대원이 절도있게 인사했다. 그들은 헤일라스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우린 근위대에 복귀했다. 헤일라스는 근위대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생도이자, 감시자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 * *
키누안은 늘 차를 마신다. 키누안의 차는 비싸디비싼 물건이다. 지구의 종자를 가져와 기른 차나무의 잎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차의 맛을 모른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조금 연하게 우렸네. 맛은 좀 어떤가?”
키누안이 내 반응을 기다리며 말했다. 지금 나는 키누안의 집무실에 있다.
“슬슬 이 정도면 권하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몇 번을 먹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난 혀를 댔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허, 자네가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래. 음미하면서 깊은 맛을 느껴보게나. 혀만 쓰는 게 아니라 후각도 동원해서.”
난 뜨거운 찻물을 키누안의 얼굴에 끼얹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절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쓰게 만든 게 아닌가 싶은 맛입니다.”
나는 단숨에 찻잔을 비우며 말했다. 찔끔찔끔 마시는 게 더 힘들었다.
“난 차를 가지곤 장난치지 않네. 나름 다도에는 진심이거든.”
난 알싸하게 식도와 위장을 데우는 찻물의 움직임을 느꼈다. 속이 가라앉은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근래 아키에스 전투술 사용자과 싸운 적이 잦았습니다. 켄 노마를 포함해서요. 그때 그 사람들은 혀를 튕기는 기술을 쓰더군요.”
“반향정위를 말하는 거군.”
“네, 소리의 반사를 통해 주변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눈 대신 귀로 사물을 보는 거죠. 꽤 좋은 기술이라고 생각해서 익히려고 했는데 쉽진 않았습니다.”
“켄 노마에게 반향정위를 가르쳐준 게 나네. 굳이 자네에게 따로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있어.”
“어려워서입니까?”
“근위대원이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습득은 어렵지만,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거군요.”
키누안도 반향정위에 대해 떠올리는 중인지 뜸을 들였다.
“반향정위를 쉽게 익히는 방법은 후두엽과 측두엽에서 시각과 청각을 담당하는 영역을 외과적 시술로 가까이 당겨 엮는 거네. 켄 노마가 그런 경우지. 인접한 감각 영역이 섞이면서 시각도 청각도 아닌 공감각이 형성되거든. 하지만 쉬운 만큼 위험한 방법이지. 시각과 청각을 둘 다 잃어버릴 확률도 있어.”
키누안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어려운 방법은 차근차근 훈련하는 겁니까?”
“반향정위를 익히면 시각의 정밀도와 해상도가 떨어져. 말 그대로 시력이 나빠지네. 시각 정보처리에 할당해야 할 뇌 자원을 청각 정보처리에 써야 하거든. 더군다나 청각 처리정보에 익숙해질수록 시각 정보에 대한 뇌의 반응이 늦어지네.”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입을 뗐다.
“고성능 의안을 가진 제가 익힐 이유는 없다는 거군요.”
“반향정위가 나름의 장점이 있는 건 사실이네. 하지만 고성능의 의안을 가진 자가 시력 저하를 감수하면서 익힐 이유는 없어. 자네의 오른쪽 눈은 빛 한 점 없는 어둠조차 꿰뚫지.”
“하지만 굳이 익히고 싶다면요?”
집요한 내 말에 키누안이 웃었다.
“연습한다면 말리진 않겠네. 그런 향상심이 자네가 상급자에게 사랑받는 이유지. 한 가지만 더 알아둬. 결국, 핵심은 시각 정보를 일시적으로 차단한 채로 청각 정보를 시각화하는 거네. 눈을 감아야 쓸 수 있다는 이야기지. 눈을 뜬 채로 시각과 반향정위를 동시에 처리하진 못할 거야.”
“기억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키누안이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다리를 꼬며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올렸다. 그의 동공이 찰나였지만 차갑게 빛났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겠군, 루카.”
올 게 왔다.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말해야 한다.
쿠스토리아 가문은 제국에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에게 숨긴 채로 일을 처리한 건 사실이다.
‘헤일라스는 날 신뢰하기에 가문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그 판단은 헤일라스의 실수였다.
지금부터 난 쿠스토리아 가문에게 불리한 사실조차 고할 것이다. 거짓을 고해 속이기엔 ‘제국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어쩌면 키누안은 모든 정황을 다 알면서 묻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감시자.’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직위인가.
단, 한 번의 보고 누락조차 ‘처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키누안은 날 좋아한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수십 년을 친우로 지낸 릭 실바 누네즈조차 고민 없이 처리했다. 고작 수년을 알고 지낸 나 따윈 말할 것도 없다.
……떨 것 없다, 루카.
내 충성심의 본질을 떠올려라. 쿠스토리아 가문도, 근위대원이라는 직책도…… 전부 스쳐 가는 배경일 뿐이다.
날 선택하고 인정해준 건 제국이다.
“쿠스토리아 가문과 가주 헤일라스는…….”
키누안은 아무런 말 없이 내 보고를 들었다. 난 그간 있었던 일을 토했다. 정말로 토하는 심정이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동태는 제국이 눈으로 보고 있다. 그 눈이 바로 나다.
“……이상입니다.”
키누안이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로 뺨을 괴고 있었다. 거만해 보이는 자세였다. 해가 지면서 창밖의 빛이 걷히듯 사라졌다.
키누안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어둠에 잠긴 얼굴에선 동공의 테두리만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딱.
키누안이 앞니를 떨 듯 입을 열었다. 숨결도 낮게 흘러나왔다. 그 의미가 안도인지 한탄인지 나는 모른다.
“폐하를 만날 준비가 된 것 같구나.”
난 방금 생사의 경계를 넘은 것이리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