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89)
배드 본 블러드-89화(89/197)
089
현 황제의 이름은 유리 크라치아다.
그는 제국의 안정기를 연 황제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유리 크라치아의 치하에서 제국은 큰 분쟁 없이 무탈하게 확장하고 성장했다.
벨라토나 코라와 국지적인 충돌이 있더라도, 유리는 능수능란한 외교로 갈등을 봉합했다. 나아가 암암리 시장을 개방해 벨라토와 코라의 기술과 자원을 일부 받아들였다.
제국의 묵인하에 벨라토와 코라의 흔적이 제국 기저에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키누안을 설명을 듣다가 질문을 던졌다.
“개방은 불화와 갈등의 씨가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개방 없이는 진보도 없네. 우리 아크레시아 제국이 다른 형제국을 제치고 가장 우월한 공학기술을 가지게 된 것도…… 벨라토와 코라보다 먼저 외계종족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나는 움찔했다. 제국은 외계인을 배척한다. 외계인은 제국 내에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소수의 외계종족만이 ‘쓸모’를 인정받아 체류증과 영주권을 얻는 정도였다.
‘그런 제국이 제일 먼저 외계종족의 기술을 받아들였다고?’
내 표정을 본 키누안이 웃었다.
“어차피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야. 우리가 열 번은 죽고 다시 태어나야 채울 수 있는 시간만큼의 과거지. 어쨌거나 제국이라고 무작정 변화를 배척하진 않네.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예전 연회에서 진가우 소장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듣기론 기술연구를 위해 벨라토 연방과도 교류한다고 하더군요.”
“자네도 봤으니 알겠지만, 진 소장님은 굉장히 특이한 부류의 사람이지. 제국보단 벨라토에 더 잘 맞는 사람이야. 그래서 벨라토와의 기술 교류를 담당하고 있지.”
“제국에서 여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하하, 답은 뻔하지 않나? 이레귤러 루카.”
그렇다. 답은 하나뿐이다.
“능력이 독보적으로 뛰어났겠죠. 성격적 결함과 단점을 뒤덮을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는 그 어떤 집단에서도 쉽게 내치지 못하지.”
“교관님처럼 말입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자넨 벌써 내 생존의 비결을 터득했군. 역시 우수해.”
키누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또각, 또각.
복도에선 우리의 발소리가 깊게 퍼졌다.
나는 이름도 모를 건물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간결하면서 웅장한 금빛 장식을 보니 여기가 황실의 사유 재산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끼릭.
나는 복도의 구석을 살폈다. 방금까지 작동하던 카메라가 정지하더니 축 늘어졌다. 아까부터 느낀 위화감이었다.
‘어느 시점부터 감시장비가 전부 가동을 정지했다.’
키누안을 중심으로 제국의 감시 체계가 마비된 것 같았다. 키누안의 이동 경로는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루카, 이게 감시자의 특권이네. 자네도 머지않아 가질 수 있을 거야. 제국의 그 어떤 기관도 내 흔적을 쫓거나 감시할 수 없어. 제국의 네트워크에 연결된 전자장비라면 나를 보더라도 무시하지.”
키누안이 비밀스러운 행적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근위대조차 키누안의 뒤를 캐지 못했던 게 당연했다.
“그야말로 제국의 유령이로군요. 하지만 변절한 감시자가 생긴다면 누가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또 있겠지, 변절한 감시자를 처형하는 존재가. 자네도 이젠 알지 않는가?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제국의 전체를 보지 못하네. 나도 마찬가지야.”
감시자의 시야조차 비좁기 그지없었다. 우린 모든 걸 보는 자가 아니다. 그저 황제의 눈 중 하나일 뿐이다.
난 극도의 중압감에 짓눌린 채로 고속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감각 기능의 저하까지 오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복도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난 어지러움을 참으며 간신히 똑바로 걸어 나갔다.
‘곧 황제를 만난다.’
차라리 적이 우글거리는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싶었다. 그게 속 편했다. 승산이 희박한 상황에서 강대한 적과 싸우는 건 이골이 났다.
지난 4년간, 나는 싸우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황제는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충성하며 그 어떤 부조리한 명령과 요청에도 내 목숨을 기꺼이 내놓아야 할 절대자, 그게 바로 황제다.
“루카, 적당히 긴장을 풀게. 설사 이 자리에서 자네가 불온한 태도를 보이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당장은 죽진 않을 거야.”
키누안이 날 놀리듯 말했다. 하기야 내가 키누안 입장이라도 저럴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을 실컷 내려다보며 놀릴 기회는 흔치 않다.
“……그 말이 더 섬뜩하군요.”
황제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면, 생존인지 처분인지 계속 고민하며 벌벌 떨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저벅.
키누안이 문 앞에 섰다. 정면에서 보는 눈을 형상화한 아크레시아 제국의 상징이 황금색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키에스 빅티마 상징도 눈을 형상화한 문양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아키에스 빅티마 상징이 곁눈질로 훔쳐보는 눈이라면, 아크레시아 제국의 상징은 위압감 있게 대상을 짓누르는 느낌의 눈이었다.
키누안이 제국 상징의 중심에 손바닥을 댔다.
“루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믿어. 난 자네가 감시자가 될 인물이라 판단했지. 오늘만큼은 자네의 능력이 아니라 내 통찰력의 깊이를 믿게.”
키누안은 대단한 사람이다. 헤일라스와 다른 의미로 괴물이다. 그는 모든 걸 꿰뚫어 보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그런 키누안이 날 선택했다.
오늘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을 받은 것 같았다. 실제로도 들끓던 내 마음은 얼음이라도 떨어진 듯이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가다듬었다. 공황으로 흐려지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끼익.
키누안이 문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을 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척!
앞서가던 키누안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해야 할 말만 곱씹으며 뇌까렸다. 수백 번은 연습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가…… 신민의 영도자이자 제국의 수호자, 유리 크라치아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내 영혼까지 낮춘 채로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반갑구나, 아이야.”
황제의 첫 마디는 놀라울 정도로 자비로웠다,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제국 신민 중에서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다. 황제의 조각이나 초상화는 제국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자란 보육원에도 황제들의 초상화가 있었다. 특히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와 현 황제 유리 크라치아가 가장 크게 걸려 있었다.
유리 크라치아의 이목구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심상만으로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거라.”
먼발치에서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황제를 접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난 제국의 주인과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 크라치아.’
황제가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얼굴이 낯익은 사내가 서 있었다.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 크라치아.’
원칙적으로 공직에 진출하지 않은 황족의 신상은 기밀 정보다.
그러나 후계자인 황태자만큼은 대중도 익히 알고 있다. 아무리 정당성과 혈통의 위엄이 있더라도, 어느 날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황제라고 말한다면 충성스러운 신민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는 일찍부터 황제를 보좌하며 업적과 치적을 쌓는다.
진홍의 황태자가 황제와 같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항상 붉은 옷을 입기에 진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것도 일종의 정치적 행위일 것이다. 자신을 대중에게 쉽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내 눈에 당장 보이는 건 황제와 황태자,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난 방에 들어서면서 이물감과 위화감을 느꼈다. 적어도 두세 명의 호위가 어딘가에 있었다. 기둥이든 커튼이든, 아니면 창밖이든 말이다.
‘황제의 호위는 원칙적으로 근위대의 임무다.’
그러나 내 감각의 그물에 걸린 이들은 근위대원이 아닐 것이다.
근위대는 표면적으로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군인 집단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선 황제도 항상 근위대를 대동한다.
‘이런 자리에선…… 비공식 직위를 가진 호위를 데리고 다니겠지.’
조금 낯 뜨거운 표현을 하자면, 어둠의 근위대인 셈이다.
헤일라스도 저들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나도 근위대의 일원이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보다 황제와 더 가까운 무력 집단이 제국에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의문이 들었다.
‘황제와 황태자는 그렇다 쳐도, 감시자의 직위와 임무를 저 호위들에게 노출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황제가 웃었다.
“하하, 귀엽구나, 루카. 저들은 내 허락 없이는 보지도 듣지도 못해. 물리적인 의미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황제는 내 마음을 읽듯이 말했다. 그의 언행이 묘하게 소탈해서 내 마음이 자꾸만 느슨해질 것 같았다.
진홍의 황태자라는 별명에 맞게, 프란세크는 오늘도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로 나를 쳐다봤다.
“자네가 다음 감시자로군. 키누안이 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같이했듯…… 너도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겠지.”
내가 제국의 감시자로 살아간다면, 프란세크와 함께 할 시간이 매우 길 것이다. 프란세크도 그걸 인지하고 있기에 내게 다정히 말했다.
……뭐라 답해야 할까. 매 순간이 고욕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앞으로…….”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프란세크가 걸어왔다. 그는 상체를 숙여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겉치레는 됐어! 자네가 상관에게 아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건 견실한 충성과 우수한 능력이네. 무뚝뚝한 태도나 말실수 따윈 개의치 않아. 원한다면 내 유모처럼 건방지게 말해도 돼. 유모는 항상 내 생활 습관이나 여성 편력에 대해 매번 잔소리하지.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난 자네의 말도 유모의 조언처럼 듣겠네.”
프란세크는 제국 신민에게 인기가 많은 황태자였다. 막연하게 황실을 동경하는 이들은 프란세크를 좋아했다. 직접 경험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쾌남.’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인물상이었다.
“프란세크, 장차 네 종사이자 감시자가 될 아이를 잘 봤느냐?”
황제가 프란세크 등 뒤에서 말했다.
프란세크는 미소를 지으며 팔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이내 벌렸던 팔 하나를 가슴에 대며 예를 갖췄다.
“직접 보니 더 마음에 듭니다. 빨리 즉위하고 싶어질 정도로요.”
“아직 난 멀었다, 프란세크.”
농담이 오갔다. 이렇게 들으니 평범한 부자의 대화 같기도 했다.
차가운 제국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저리도 평온하고 살갑게 떠들어댈 줄이야…….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태자라도 감시자의 임무와 업무엔 개입할 수 없으니까요.”
프란세크가 뒷문을 통해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을 감싸던 기척도 하나 없어졌다.
“프란세크 님은 여전히 호쾌하신 분이군요.”
키누안이 말했다.
“뭐, 잘 키웠다고 생각하네. 덕분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내가 되었지. 방아쇠가 되기엔 충분할 정도로 장성했어. 녀석의 죽음으로 모든 게 뒤바뀔 거야.”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방아쇠? 죽음?’
일순간이나마 데워졌던 내 가슴이 빠르게 식어갔다. 극심한 온도의 차이 때문에 내 마음이 깨질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지금, 이들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단 말인가.
마치 황태자 프란세크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인 것처럼.
……황제와 키누안은 황태자 프란세크의 처분과 소모를 논의하고 있었다.
“동요하지 말게, 루카. 진짜 황태자는 따로 있으니까.”
키누안이 날 돌아보며 말했다. 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도 내 동요를 예상했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제국은…… 목을 빼고 들여다봐도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