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0)
배드 본 블러드-90화(90/197)
090
난 시야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는 ‘준비된 제물’이었다.
황제 유리 크라치아는 자신의 아들을 훗날 죽일 생각이었다.
아비가 자식을 이용하다 못해 죽이려고 한다.
차라리 밑바닥의 하층민이 저런 계획을 짠다면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정점에 있는 황실에서…… 그것도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을 열면 동요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루카, 자네가 황태자 암살을 실행해야 할 수도 있네. 감시자의 주 임무는 전투나 암살이 아니지만…… 간혹 해야 할 때가 있지.”
키누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제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맡겠습니다.”
기계적인 대답이 나왔다.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었다.
“하나 물어보마, 어린 감시자야…….”
내 대답을 들은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는 수없이 본 초대 황제의 초상화와 닮아있었다.
역대 황제들은 나이가 들수록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와 닮아간다. 유리 크라치아도 마찬가지였다. 완숙한 중년의 얼굴에는 초대 황제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보이도록 얼굴을 제작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제국을 위해서가 아닌 ‘내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황태자를 죽일 수 있겠느냐?”
황제가 천천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의 동공은 소용돌이치듯 빛났다. 어쩐지 사람이 아닌 듯한 초현실적인 위압감이 있었다.
내 오감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몸이 황제에게 굴복하고 싶어 했다, 난 우수하다. 여기서 내뱉어야 할 모범적인 대답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가슴은 삐걱거렸고, 목구멍은 까끌까끌했다. 나는 종종…… 중요한 순간에 엇나가곤 한다. 힘에 굴하기 싫어하는 더러운 성질머리가 가끔 고개를 든다. 아무리 짓눌러봐도 사람의 본성은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다.
“폐하가 곧 제국이니 그것 역시 제국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참지 못했구나, 루카.
“하지만?”
황제의 반문에는 은은한 노기가 실려 있었다. 그가 살면서 자신의 의견이 반박당한 적이 있을까? 있더라도, 나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재상이나 장관 정도 되는 관료겠지.
“……아비의 명으로 죄 없는 자식이 죽는 건 불쾌한 일입니다. 설사 그게 제국을 위해서라도요. 저만이 아니라 제국 신민들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떨구듯 숙이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었다.
고작 이딴 말을 하고 죽으려고 여기까지 아득바득 버티면서 살아남은 거냐? 아주 병신이 따로 없네!
머릿속의 또 다른 내가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나도 절벽에서 무작정 뛰어내리는 머저리는 아니다. 방금 발언 정도로 내가 죽진 않을 것이다. 이건 직감이었다.
“키누안, 난 언제나 자네를 믿고 있었지. 이 아이는 아직 어리지만…… 감시자의 자질이 있긴 하군.”
황제는 미미한 노여움조차 걷어내며 웃었다. 내 직감이 맞았다.
“똑 부러지는 녀석입니다. 저보다 더한 놈이죠.”
“확실히 자네는 유들유들한 구석이 옛날부터 있었어.”
나를 두고 키누안과 황제가 떠들었다.
내 모든 언행이 평가의 항목이었다. 황제는 ‘어떤 기준’을 두고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방금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것 같았다.
도대체 감시자의 자질과 기준이 뭐란 말인가?
단순히 아키에스 빅티마 적성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 프란세크는 반드시 죽어야 한단다. 제국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니까.”
황제가 강조했다. 그와 키누안은 내 앞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냉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키진 않으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 말했다. 떨리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사실이니까.
“하하, 그거면 충분해. 훌륭하구나. 슬슬 소개해 줄 때가 되었군.”
황제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딱!
황제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소리를 냈다. 그리곤 그의 등 뒤에서 기척이 일었다.
또각, 또각.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선명했다. 발소리의 주인은 내가 아는 자였다.
마음 한구석으로 어렴풋이 예상했다. 진홍의 황태자가 가짜라는 소리에, 내 뇌리에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걸어 나왔다. 풋내나는 얼굴과 달리 눈동자는 요염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호한 매력을 풍기는……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기에 내 본능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동식물은 대게 독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마주하니 반갑기 그지없네. 용케도 머리를 제자리에 달고 있구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보랏빛 소년이 살벌한 말을 살갑게 내뱉었다.
오늘 나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었을 것이다, 내가 인지도 못 하는 사이에.
“머리가 어깨 위에 달린 채로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전하. 추한 몰골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이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네가 골라준 이름이니 마음에 들어. 황제가 돼도 이 이름을 쓸 생각이야.”
나는 황제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네 감시자가 될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제가 여자였다면 부군으로 삼을 만큼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하, 루카우스는 네가 싫은 모양이구나.”
“이해합니다. 저라도 저 같은 인간을 싫어할 테니까요. 잔인하고 변덕스러우며 괴팍하기까지 한 인간을 좋아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반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그것 또한 황제의 자질 중 하나지.”
황제는 이반의 기질을 긍정했다.
“루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아서 내 곁에 서. 그럼 그간의 모든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반이 내 앞에 서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중성적이고, 숨결에서는 꽃향이 났다. 그러나 그는 뱀이다. 화려한 무늬로 위장해 피식자를 유인하는 독뱀.
“그럴 생각입니다. 제 영혼과 정신이 썩어 문드러지더라도요.”
하지만 난, 너희들의 뜻대로 소모 당할 생각이 없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건 내 의지와 내 선택이다. 한때, 릭 카이저 앞에서 내가 확실한 생존 대신에 저항하는 죽음을 택했듯이 말이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 * *
나는 황제와의 알현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키누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감시자.’
난 어린 견습이고, 예비 감시자일 뿐이다.
‘황실이 원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처분당한다.’
적어도 ‘순종적인 인물’이 기준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다. 하기야 순종이 기준이라면 애초에 날 감시자로 삼을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반항적인 성향이 내게 있다는 건 잘 알 테니까.
‘키누안과 나의 공통점.’
그게 일단 감시자의 자격이라고 보면 된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자질.’
이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마음 편하게 쉬질 못했다. 쉬고 싶어도 훈련된 내 사고는 생존을 위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내 행실은 키누안과 황제, 그리고 이반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
‘평가의 기준을 모른 채로 평가를 당한다.’
마치 아키에스 전투술을 익힐 때와 비슷했다. 아키에스 전투술을 훔쳐서 익히는 게 입문 조건이었다.
‘감시자도 마찬가지겠지.’
평가의 기준을 스스로 알아내는 것도 평가 항목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가.’
황제는 물론이고 이반도 날 호의적으로 대했다. 키누안도 날 아끼고 있다.
‘그러나 그 태도와 감정이 전부 진실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를 보라.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지끈, 지끈.
두개골에 실금이라도 간 것처럼 두통이 세졌다. 난 이마에 손을 대고선 인공 피부로 열감을 느꼈다.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이마의 체온이 높았다.
과부하가 심했다. 좁아지고 느려진 사고로 더 생각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몸의 상태가 더 나빠질 뿐이다. 의식을 가다듬고 불안을 일시적으로 치워야 한다.
‘필요한 건 휴식.’
하지만 훈련받은 내게도 지금의 불안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잠을 자야 한다.
다행인 점은 난 우수한 생도라는 것이다.
전쟁터는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길바닥의 돌처럼 널린 곳이다. 나는 그런 곳에서도 숙면할 수 있게 훈련을 받았다.
찬찬히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나도 피곤하긴 한가 보다. 신경계가 바짝바짝 메마른 느낌이다. 조금만 긴장을 이완해도 금방 피로가 쏟아졌다.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길 바라며 깊은 잠에 빠졌다.
삑.
처음에는 무시했다. 얕게 깨어났던 의식이 금방 가라앉았다.
삐- 삑.
조금 급한 일인가보다. 하지만 근위대의 호출이나 중요한 임무라면 강제로 망막 디스플레이에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시하고 좀 더 자자.
삑! 삑! 삑!
나는 단말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의식을 끌어올렸다.
“염병…….”
눈꺼풀이 닫힐 것처럼 무거웠다. 머릿속은 바늘이 중간중간 박힌 듯 따끔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얼추 세 시간을 잤다. 평소의 내겐 적은 수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네, 다섯 시간은 더 자야 신경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거다.’
머리가 둔하고 사고는 탁했다. 생각이 이어지다 말고 턱턱 걸려서 멈췄다.
‘가브리엘.’
나는 송신자의 이름을 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별거 아니기만 해봐.’
나는 홀로그램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루카, 네 여동생이 찾아왔어!
가브리엘이 말하는 여동생은 하나뿐이지. 망할, 지젤 쿠스토리아.
-젠장, 어떡할까? 음료라도 내와야 해?
찬물이라도 휙 던져서 쫓아 보내면 좋겠다.
-야! 왜 연락이 안 돼! 아씨, 물어보는 게 많은데 대답해도 되는 거야?
-넌 꼭 중요할 때면 연락이 안 되더라아아아-!!
가브리엘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도 적잖게 짜증이 치솟았다.
난 메시지를 확인하고선 곧장 외투를 걸쳤다. 지젤, 너는 또 하필이면 많고 많은 날 중에서 오늘이냐.
곧장 검문소를 통과해 하층 구역으로 내려가는 승강기를 탔다.
‘멋대로 하층 구역에 내려가지 말라고 했잖아, 지젤.’
지젤은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거겠지. 문을 나선 나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만 좀 날 괴롭혀. 이미 충분히 힘드니까.’
약한 소리가 목구멍까지 절로 치밀었다.
나는 악에 받친 걸음으로 하층 구역을 가로질렀다. 내 얼굴이 어찌나 험악한지 평소에 그리 붙던 부랑배나 소매치기조차 설설 기듯 피했다.
끼익! 쾅!
난 갱단 사무실의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 개 같…….”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나는 욕을 내뱉을 준비를 했다.
빠- 앙!
화약 터지는 소리가 났다.
피로로 너덜너덜해진 신경계가 위급 상황을 감지하고선 악착같이 신호를 보냈다. 전투 반사가 내 몸을 움직였다.
철컥!
난 칼을 역수로 쥔 채로 뽑아 올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충격권총을 뽑아서 예열을 시작했다.
교차한 내 손과 손목은 얼굴을 가렸고, 팔뚝과 팔꿈치는 심장과 폐를 보호했다. 기습적인 총격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죽진 않을 것이다.
쿵!
문이 그제야 전부 열렸다. 갱단 사무실의 1층이 보였다.
“어, 왔어. 그럼 축하를, 어…… 야, 총은 치워.”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쓴 가브리엘이 말했다. 그는 생일 폭죽을 손가락 마디마다 끼우고선 하나씩 터트릴 준비를 했다. 아까 화약 소리도 생일 폭죽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부를 둘러봤다. 가브리엘을 비롯해 갱단원 여덟 명이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로 서 있었다. 테이블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케이크가 덜렁 있었다.
아무리 봐도…… 생일 파티 분위기였다.
“가, 브리엘, 혹시 네 생일이냐?”
내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루카, 뭔 소리야.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동생님이 그렇게 말하던걸?”
참고로 난 생일이 없다.
내 시선은 바에 서 있는 지젤에게서 멈췄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어깨만 으쓱했다.
이건 또 무슨 지랄인 거냐, 지젤.
“야, 이…….”
난 다시 한번 욕을 내뱉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내 뒤에서 기척이 일었다.
“아, 오늘이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루카 님. 이건 디바가 보낸 선물입니다.”
외눈의 그레이스가 선물 상자들을 자기 머리보다 높게 들고선 내 곁을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동생님이 네 생일 챙기잖아. 다들 축하하러 왔어. 인상 좀 그만 쓰고. 생일주나 마셔.”
술병을 든 가브리엘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목과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는 앞니로 뚜껑을 과감하게 따더니 내게 술병을 건넸다.
“하, 시발…….”
나는 욕설이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가브리엘이 건넨 술을 받았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스트레스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걸지도.
어쨌든 일단은 놀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