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1)
배드 본 블러드-91화(91/197)
091
“내가 바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
“남자! 남자!”
가브리엘이 목구멍을 박박 긁어대며 노래했다. 그가 마이크를 앞으로 겨누듯 뻗자, 술에 취한 갱단원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끼야아앗호오오오!”
신이 난 들창코가 탁자에 올라서며 바지를 벗었다. 그는 추한 아랫도리를 내보이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들창코는 내게 처벌을 받아 한쪽 눈을 잃은 갱단원이다. 그래서 아직도 날 어려워하며 무서워했다.
난 바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초창기에 갱단에 영입한 털보와 개눈깔도 이 자리에 있었다.
“나, 약을 끊었어. 진짜라고. 이젠 정말로 끊을 거야.”
풍성한 턱수염에 맥주 거품을 잔뜩 묻힌 털보가 말했다. 그도 처음부터 털이 저랬던 건 아니다. 신체강화제 부작용으로 다모증이 생겼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겠어?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보스가 말하길 일할 때만 안 하면 된다잖아.”
개눈깔이 말했다. 그는 의안 시술에 실패해서 양쪽 동공의 초점이 달랐다. 신경계통 문제라서 재이식을 하더라도 평생 저렇게 살아야 했다.
이젠 나도 갱단원의 개인 사정까지 알고 있었다. 싫으나 좋으나 귀에 들어오니까.
가브리엘 갱단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무사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능력보단 마르티나 디바와 그레이스의 지원 덕분이었다.
“디바는 루카 님과 한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그 신의에 답해야 할 겁니다.”
외눈 안대를 찬 그레이스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도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평소보단 나긋해 보였다. 흐릿한 미소마저 옅게 걸려 있었다.
‘나와 디바의 거래.’
마르티나 디바는 내가 없는 동안 가브리엘을 보살펴 줄 것이다. 그 정도 비호가 있으면 어느 날 가브리엘이 갑작스레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혹여 일이 생기더라도 목숨은 건지겠지.’
대신, 나는 마르티나에게 친분을 제공했다. 내가 훗날 지금보다 더 출세할 때 즈음, 마르티나는 내게 사적인 부탁을 할 것이다. 빚을 진 나는 꼼짝없이 들어줘야 하겠지.
“루카 님, 로우젠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없습니까?”
그레이스가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로우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내겐 너무나 많았다.
‘이레귤러 로우젠.’
그레이스가 생도를 관두게 된 원인이 로우젠이었다. 근위대원이 된 로우젠은 서서히 인격이 변하다 못해 무너지고 있었다.
그걸 본 그레이스는 마르티나 디바의 도움을 받아 생도 생활에서 벗어났다. 마르티나 디바에게 고위 관료의 인맥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난 기억을 정리하며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보채는 게 아니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기회가 될 때 알아봐 주시면 되니까요.”
그레이스는 생도 출신답게 눈치가 빨랐다. 내가 까먹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하지.”
“아마 진짜 생일은 아니시겠지만…… 그래도 한 잔 따르겠습니다. 디바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스가 찬장에서 잔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녀는 따로 준비한 술을 따더니 내 잔에 따랐다. 냄새만 맡아도 상당한 독주였다.
“술은 누가 처음 마시려고 했을까? 따지고 보면 독이잖아. 맛도 없는데, 정신을 마비시키고 몸을 둔하게 만드는 독.”
내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어쩌면 삶이 괴로워서 죽으려던 자가 마셨을 수도 있지요. 독을 마시고 죽을 생각으로요.”
그레이스도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녀와 내 술잔이 부딪치며 술이 찰랑거렸다.
우린 단숨에 잔을 비웠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마시는 게 맞나 싶었다.
“흠.”
난 살짝 찡그렸으나 그레이스의 표정은 평온했다. 괜히 진 느낌이 들어서 나는 술병을 들어 서로의 잔을 빠르게 채웠다.
“하지만 처음 술을 마신 사람은 죽진 않았겠죠. 대신에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매일 술을 마시며 자신의 몸을 축내지만…… 어떻게든 내일까지 살아갈 힘을 얻었던 거죠.”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지금 내겐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잔을 들어서 그레이스의 술잔과 마주했다. 우린 연거푸 독주를 마셨다. 서서히 내 신경계에도 술독이 스며들고 있었다. 훈련으로 정돈된 감각이 하나둘씩 올이 풀리듯 흐트러졌다.
“넌 겁쟁이야, 그레이스. 로우젠이 레기온에게 잡아먹혔다고 냉큼 도망가? 그깟 기계 따위가 무서워서?”
내가 험악하게 말했다.
“그땐 저도 어렸으니까요. 하지만…… 전 지금의 삶에 만족합니다. 다시 돌아가도 디바의 곁을 택할 겁니다.”
“그건 패배자의 자기합리화야. 넌 자신의 능력으로 거머쥘 수 있는 모든 명예와 지위를 놓친 거지. 겁을 먹고 도망간 것뿐.”
난 그간 속에 담아뒀던 말을 쏟아냈다.
나와 그레이스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축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 술이 문제로군.
그러나 그레이스는 취객과 이야기하는 게 익숙한 듯이 웃기만 했다. 그녀도 나와 비슷하게 마셨을 텐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죠. 전 레기온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로우젠처럼요.”
“너도 결국…… 하층 구역에 널리디 널린 패배자에 불과했군.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안 된다고 멋대로 판단하고선 자신의 가능성을 닫았어. 내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야.”
내 험담에도 그레이스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술병을 들었다. 그녀는 고요히 내 잔을 채웠다.
그레이스의 평온한 미소를 보니 정신이 들었다. 방금 내뱉은 말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젠장, 솔직히…… 지금은 그레이스가 더 어른스러웠다. 난 이성이 흐트러진 것이 창피해 술 대신에 물을 마셨다.
“루카 님, 저는 당신보다 재능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딱 하나 더 앞서는 점은 나이입니다. 제가 십여 년 정도는 더 살았겠죠.”
“저 멍청한 가브리엘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이가 많은 게 자랑이야?”
내 외침에 노래하던 가브리엘이 움찔했다. 그는 곧 씨익 웃더니 마이크를 입에 대고 외쳤다.
“그래, 내가 형이라고! 형이라고 불러! 루카! 특별히 가비 형이라고 부르게 해주지! 여자가 아닌데도 애칭을 허락하는 건 네가 처음이다!”
“좀 닥쳐! 멍청아.”
난 손에 잡히는 접시를 가브리엘에게 내던졌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옆으로 젖혀 접시를 피했다. 깨지는 소리만 요란했다.
“성질머리하곤.”
가브리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계속 노래했다.
나도 다시 옆을 쳐다봤다. 그레이스는 술잔을 입에 대며 기울였다. 그녀는 여전히 고풍스레 술을 마셨다. 워낙 흐트러짐이 없어서 술을 어딘가로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후우.”
그레이스가 독주의 향이 담긴 숨결을 내뱉었다. 향긋한 냄새가 기분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레이스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날 보곤 웃었다. 지금까지 본 그녀의 표정 중에서 가장 감정이 짙게 드러난 미소였다.
……갑자기 나는 그녀와 둘이서 술을 마시는 게 껄끄러웠다.
“뭐, 대화는 즐거웠다, 그레이스.”
내가 일어서려 했다.
척!
그레이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간만에, 남자와 자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루카 님도…….”
“시, 시끄러워.”
그레이스가 내 손목을 놓았다. 그녀는 바에 팔꿈치를 올리고선 턱을 괴었다.
“방금 얼굴은 붉히는 게 좀 귀여웠습니다. 그런 반응도 보이시는군요. 어쨌든 이게 경험이라는 겁니다, 루카 님. 전 당신보다 조금이나마 오래 살았기에 여러 방면에서 경험이 더 많죠. 성적 경험도 그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정신력이 특출한 자라도…… 처음 겪는 낯선 상황에선 대처가 늦거나 적절하지 못한 법입니다.”
마땅히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난 순간 당황했다. 노련한 대답과 반응을 하지 못했다. 세상사 모르는 순수한 소년처럼 굴었다.
“……조언은 기억하지.”
“좋은 밤 되시길. 그럼 전 이만.”
그레이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일어섰다. 그녀는 갱단 사무실을 벗어났다.
방금 내가 당황한 이유는 여럿이다. 황제 알현의 중압감과 수면 부족으로 신경계의 상태가 불안정했고, 독주에 취해 머리가 둔해졌다. 이게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말대로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잠자리 제안은, 내가 받은 훈련과 교육에선 대처법이 딱히 없었다. 내 경험에서 답을 찾아야 했다.
마지막 이유는…… 그레이스에게 이성적 호감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가정을 꾸린다면 그녀 같은 여자도 나쁘지 않겠지. 성격이 잘 맞을 것이다.
“으음.”
난 타인의 시선을 느꼈다. 바에서 다섯 의자 정도 떨어진 자리에는 지젤이 있었다.
지젤은 냉담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생각날 정도로 눈빛이 차가웠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지젤은 고개를 휙 돌리며 다른 사람과 대화했다. 그녀는 예상 밖의 인물과 장시간 이야기하고 있었다.
‘길다.’
길다도 내 생일이라는 말을 듣고 뒤늦게 찾아왔다. 그녀는 갱단의 전담 정비사가 되다시피 했다. 단골이 많아지니 그녀에게도 이득이고, 갱단 입장에서도 믿고 맡길 사람이 있으니 든든할 것이다.
길다와 지젤은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드륵.
두 여자는 오랜 이야기를 마치고선 일어섰다. 그리고 사업가처럼 악수했다.
“그럼 다음엔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길다.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은 당신이네요.”
지젤이 정중히 말했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끝났다.
길다는 지젤과 인사를 마치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햇살처럼 화사한 여자였다.
“생일 축하해요, 루카! 뭐랄까, 어느덧 남자 분위기가 물씬 나네요. 예전엔 소년 소년 남자였다면, 요즘은 남자 남자 소년이라는 느낌이죠.”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좋은 의미로 말한 거겠지.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까요.”
길다는 내 뺨에 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팔다리는 기계가 아니라 생체라서 더욱 포근했다.
“새삼스럽지만 절 구해준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낳는다면 이름도 루카라고 지을 거고요. 남자든 여자든 간에요.”
난 아이라는 말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가브리엘과 길다는 친하게 지낸 지 꽤 됐다.
“혹시…… 가브리엘과 사귀는 건 아니죠?”
“에이, 가비는 좀 그렇죠. 저는 성격보단 얼굴을 봐요. 가비한테는 비밀이에요.”
길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더니 내 등을 퍽퍽 쳤다.
“흐음, 그렇군요.”
“아, 그나저나 요즘 아저씨는 바빠요? 통 방문하지 않던데.”
아저씨는 키누안을 말한다.
“바쁘긴 할 겁니다.”
내가 일축했다. 길다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나와 대화를 마친 길다는 가브리엘과 갱단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밀치며 마이크를 뺏더니 자기가 노래를 불렀다.
마이크를 빼앗긴 가브리엘은 당황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리에 앉은 그는 다른 갱단원과 함께 손뼉 치며 길다의 노래를 금세 따라 불렀다.
길다의 선곡은 한결 부드러웠다. 얼핏 들어보니 사랑과 연애에 관련된 가사였다.
탁!
지젤이 자신의 술잔을 내리치듯 내 앞에 두었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마침 잘 됐다. 나도 지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너…….”
“너…….”
우린 동시에 말했다. 나도 그녀의 말을 기다렸고, 그녀도 내 말을 기다리느라 침묵이 잠시 일었다.
“됐…….”
“됐…….”
됐으니까 너부터 말해.
우리가 말하려고 한 말일 것이다.
휙.
지젤이 손을 뻗더니 가위, 주먹, 보를 차례대로 내밀었다.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팔을 내밀었다.
지젤은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까먹곤 했다.
난 지젤의 반응과 손을 관찰해서 원하는 대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다.
휙.
나는 바위, 지젤은 가위였다.
“젠장, 내가 등신이지.”
지젤도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진 쪽이 먼저 말하시죠, 아가씨.”
난 음식이라도 권하듯 손바닥을 비스듬히 내밀며 말했다.
지젤이 호흡을 가다듬더니 고운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입술 화장이 더 짙었다.
“그레이스라는 여자가…… 네 애인이야?”
……별것이 다 궁금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