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2)
배드 본 블러드-92화(92/197)
092
가짜 생일의 밤이 깊어간다.
나는 손가락으로 술잔을 튕기듯 연거푸 두드렸다.
길다의 노래 솜씨는 훌륭했다. 청명한 목소리가 시원스레 쭉쭉 올라갔다. 나긋한 노랫가락 덕분인지 갱단원들도 한결 조용히 술을 마셨다.
지젤은 그레이스가 내 애인인지 물었다.
난 대답을 고민했다. 물론, 그레이스가 진짜 내 애인이라서 고민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레이스를 내 애인이라고 말해두는 게…… 지젤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내…….”
난 말하면서 지젤을 응시했다. 그녀는 술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훑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묘하게 서글퍼 보였다.
“……동업자 중 하나야.”
찰나 동안 나는 생각을 바꿨다. 지젤이 작정하고 물어보면 금방 들킬 거짓말이다. 괜히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꽤 각별한 거 아니야?”
“근위대 생도 출신이라서 나와 사고방식이 맞아서 그래. 너처럼 짜증 나게 굴지 않거든. 추궁하듯 말하지도 않고.”
내 말에 지젤이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술을 마셔 잔을 비웠다. 그리고 강권하듯 내 잔에 술을 따랐다.
난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주는 생일주야, 마셔. 아니면 내가 주는 건 마시기 싫다는 거야?”
지젤은 내가 마시지 않으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너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나는 애써 어두운 욕망을 접어서 가두었다.
나는 내 잔을 기울여 비웠다.
“이젠 내 차례지? 왜 갑자기 가짜 생일 파티를 연 거야?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럴 이유가 있어?”
“네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었거든. 하지만 생각보단 재미가 없었어. 의외로 사교성이 좋네.”
“반은 성공이야. 처음엔 상당히 곤란했거든. 그게 전부야? 고작 그런 이유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날 불러냈다고?”
내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지젤이 발끈하며 내 멱살을 세게 잡아당겼다.
“너도 항상 내게 거짓말하잖아! 난 네게 거짓말하면 안 돼? 날 미끼로 삼은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나중에는 내게 상황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잖아. 마치…… 네게 도구로서 이용당하는 기분이었다고.”
지젤은 날 붙잡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우린 바바라를 놓아줬지.’
바바라는 지젤이 가진 불안의 근원이다. 지젤을 향한 마녀의 집착은 나조차도 섬뜩할 정도였다.
하지만 바바라를 자유로이 놔줘야 한다, 제국을 위해서.
이 모든 사정을 지젤에게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지젤은 바바라를 놓아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우린 모두 누군가의 도구야. 너도나도 마찬가지고. 이용당한 게 억울하다면…… 대갚음해 줄 힘을 키워.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사람이 돼야지. 난 그럴 생각이야.”
“지금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크게 다를 건 없어.”
나는 지젤의 손을 잡아서 내 멱살에서 떼어놓았다.
“바바라를 놓아준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거고.”
“이유는 그때도 설명했잖아. 거래가 최선이었지. 바바라를 몰아세웠다간 우리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 모든 게 틀렸다 싶으면 자폭할지도 모르거든.”
난 끝까지 잡아떼듯 말했다. 이게 지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최선이었다.
“그래, 아주 잘났어, 정말.”
“내가 못난 건 아니잖아. 그나저나 길다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한 거야? 처음 보는 사이잖아.”
나는 화제를 바꾸려 했다. 궁금하기도 한 부분이었다.
지젤도 시선을 돌려서 길다를 쳐다봤다. 길다는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의 시선을 느끼곤 가볍게 윙크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잘 맞아서. 길다는 기계와 의체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 설계에 대한 지식까지 있더라고. 왜 하층 구역에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실력이 좋아.”
나도 길다의 실력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층 구역에서 태어났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지. 길다 같은 수준의 정비기술자가 상층 구역엔 널렸잖아. 실력이 좀 좋은 정도로는 계층 이동을 할 수 없어. 특출나게 뛰어나야 하지.”
내가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이다.
“어쨌거나 난 길다와 협업을 할 거야.”
이번엔 내가 눈을 찡그렸다.
“협업? 귀족인 네가 하층 구역 사람과?”
“상층 구역에서 정식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면 아카데미도 졸업하고 성인이 돼야 해. 하지만 하층 구역에선 복잡한 절차 따윈 상관이 없잖아. 합법적 허가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길다를 대리인으로 내세울 거고…….”
지젤은 준비 중인 계획을 차분히 풀어서 말했다. 듣다 보니, 마치 나와 가브리엘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게 상층과 하층 관계의 축약판이었다.
“뭘 하든 간에 하층 구역은 위험해. 내가 항상 널 지켜줄 수도 없고.”
내가 경고했다.
“너한테 지켜달라고 말한 적은 없어.”
짜증 나는군. 지젤이 요청하든 말든 간에, 나는 그녀를 지켜야 한다. 일단은 가족이니까.
“무슨 속셈이야? 날 귀찮게 만들려고?”
내가 말했어도 굉장히 까칠한 말이었다.
“네가 말했잖아. 성인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건 핑계라고. 그래서 네 말대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본 거야.”
지젤은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내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았다.
난 기억을 더듬었다.
‘정식으로 성인이 돼야 뭐라도 할 수 있다고. 그래야 종사도 받고 사업체도 꾸릴 수 있으니까.’
‘그 말은 내가 듣기엔 그냥 핑계야, 지젤.’
확실히 우린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입을 꿰매고 싶네.”
나는 술잔을 입술에 대고 마셨었다. 내 잔이 비니 지젤이 바로 채워 넣었다. 내게 술을 잔뜩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마침 동업자를 찾고 있었어. 길다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적당한 사람을 골랐을 거야.”
“하층 구역에서 뭘 할 건데?”
“내가 생각해 둔 이론과 기술을 이곳 사람들의 의체에 실제로 적용할 거야.”
“인체실험이라도 하려고?”
“하층 구역에선 구하지도 못할 고성능 파츠와 모듈을 의체에 달아줄 거야. 크레딧 손실은 고스란히 내가 감당할 거고. 아마 내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지겠지. 그 데이터를 여기서 미리 쌓을 거야.”
“인체실험 맞네.”
내가 입술을 씰룩이며 빈정거렸다.
“내 생각에는 정당한 거래야. 어차피 이곳 사람들은 다들 크고 작은 폭탄을 안고 의체를 운용하잖아. 아니면 내가 자원봉사라도 할 거라 생각했어?”
지젤이 따지고 들었다.
나도 할 말은 없었다.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 것도 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사업을 못 하는 건 핑계라고 말한 것도 나다.
이건 내가 뿌린 씨앗이다. 감당해야 했다.
“알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가브리엘에게 말해.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경비 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거니까. 생긴 건 저래도 이 바닥에선 꽤 유능해.”
나는 지젤의 사업 구상에 대해 좀 더 들었다. 대부분은 나와 거리가 먼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저 듣는 척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루카, 진짜 생일은 언제야? 나중에 제대로 된 선물이라도 주려고.”
지젤은 술기운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생일이 따로 없어.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르는걸. 생일 축하를 받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야.”
“처음이라고?”
지젤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랄 건 없어. 이쪽에선 흔한 경우니까.”
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생일이라는 것도 내겐 의미가 없었다. 당장 내일의 생존도 급급한 세상에서 태어난 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기념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젤은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참에 오늘을 생일로 삼는 게 어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담담히 말했고, 지젤은 웃었다.
어느덧 파티는 끝나가고 있었다. 가브리엘과 갱단원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길다는 주변을 대강 정리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잠을 잘 생각인 듯했다. 늦은 시간이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길다는 언제나 자기 앞가림을 잘했다. 뭐, 하층 구역 사람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없지만.
“너도 돌아가야지. 늦었어.”
내가 지젤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꽤 취했는지 비틀거렸다.
“알아. 가까운 비행장에나 데려다줘.”
지젤이 내 팔을 끌어안으며 기댔다. 혼자서 걷기 힘든 것 같았다.
나는 가까운 공공 비행장으로 향했다. 내가 호출한 쿠스토리아 가문의 공중차량이 지금 저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피곤하네.’
그러나 짜증보단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돌아가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날 둘러싸고 있던 걱정거리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늘 밤은 즐거웠다. 뜻밖의 사태였지만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의도야 어쨌든 자리를 마련해준 지젤에게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저벅, 저벅.
거리는 고요하다. 나와 지젤은 말없이 걸었다. 내 팔에 닿은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공공 비행장의 불빛이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유흥을 목적으로 하층 구역에 놀러 온 부유층이었다.
“지젤, 다 왔어.”
난 쿠스토리아 가문의 공중차량이 착륙하는 걸 응시했다.
“……넌 근위대 숙소로 돌아가는 거야? 오늘은 본가에서 자지 그래?”
지젤이 흐트러진 발음으로 말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본가로 간다면 공중차량에서 지젤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 그건 곤란하다.
“근위대 업무가 내일도 있어.”
내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흐응, 바쁜 사람을 내가 불러냈네, 미안해.”
“아니, 나도 재밌었어.”
나는 내 팔을 붙잡은 지젤을 밀어냈다. 지젤이 움찔하더니 옆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느꼈다면 다행이고.”
쿠스토리아 가문의 공중차량이 공공 비행장에 내려앉았다. 지젤을 기다리는 문이 위로 열렸다.
난 공중차량으로 걸어가는 지젤을 응시했다. 그녀의 걸음이 조금 불안했지만 난 굳이 부축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그녀가 혼자 가길 기다렸다.
우뚝.
지젤이 공중차량 앞에 서더니 나를 돌아봤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네, 루카.”
“끝이지.”
짧게 대답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나를 보다가 공중차량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우우웅.
떠오른 공중차량은 도시를 가로지르며 사라졌다.
“하아.”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온갖 문제를 이미 충분히 끌어안고 있다. 여기서 더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 바보가 될 뻔했다.
오늘 지젤, 길다, 가브리엘, 그리고 뭐, 기타 등등. 그들과 보낸 시간은 좋았다. 그러나 거긴 내가 있을 세계가 아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해라, 루카.
정신과 육체를 갈고 닦아 칼날처럼 예리하게 만들어라. 무뎌지면 죽는다.
나는 비행장 계단을 내려오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술기운마저 달아났다.
……짧은 휴가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