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4)
배드 본 블러드-94화(94/197)
094
무구 전시장의 견학이 끝났다.
상용화도 안 된 기술이 덕지덕지 붙은 전투의체, 그리고 제국의 과학기술 집약체인 전갑의체 레기온.
우린 제국의 선물을 미리 체험했다. 수료를 앞둔 생도를 고취하는 행사인 셈이었다.
전시장을 나온 생도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근위대원은 귀족에게도 영광스러운 자리니까.’
근위대는 절대 패해선 안 될 전장에 투입된다. 그만큼 제국와 황실의 신뢰를 받는 전투부대다.
나는 근위대원으로서의 내 미래를 곰곰이 생각했다.
근위대원은 30년의 의무 복무가 끝나더라도, 즉시 다른 부대로 소속을 옮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10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다가 5, 60년은 채운 뒤에 다른 부대로 영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20년도 살지 못한 내겐 까마득한 시간이로군.’
근위대원은 근본적으로 전투병과다. 아무리 관리를 잘하더라도 1세기를 넘게 살아가면 뇌의 기능 저하가 오기 시작한다. 뇌의 노화는 정신력의 쇠퇴를 뜻한다.
노화기에 접어든 근위대원은 레기온을 다룰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전투의체의 성능도 떨어뜨려야 한다. 그때가 되면 근위대로 활동하고 싶어도 은퇴해야 한다.
‘문제는 은퇴할 때까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느냐지.’
다행인 점은 근위대가 레기온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레기온이 근위대원의 정신을 갉아먹는다는 걸 근위대에서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헤일라스가 근위대장으로 있을 시기도 기껏해야 1, 20년 남았다.’
근위대원으로서의 전성기가 끝난 헤일라스는 군부 최상층의 장성으로 이동할 것이다. 대부분 근위대장이 그러했다.
군부에는 은퇴한 근위대장을 위한 장성 자리가 늘 있었다. 근위대장만 그런 게 아니다. 군부 곳곳엔 은퇴한 근위대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뇌의 기능 저하가 올 나이라고 해도 근위대원의 역량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근위대 인맥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근위대원끼리는 강력한 유대가 존재했다. 수십 년의 복무 기간 동안 쌓아온 유대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피보다 더 끈끈할지도 모른다.
소속감과 유대.
나도 그 가치를 내심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펠릭스를 기억하고 있다. 재기불능이 된 그조차 흐릿해진 의지를 짜내 내 앞길의 무운을 빌었다.
나는 성공을 손에 넣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이름도, 근위대라는 소속도.
그러나 감시자라는 무거운 짐마저 짊어지고 있다. 내가 조금만 무너져도 그 짐이 날 깔아뭉갤 것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키누안의 은퇴도 머지않았다. 후임자인 내가 그의 감시자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다.
“루카…….”
일레이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넌 항상 혼자서 해결하려는 나쁜 버릇이 있어.”
“나쁜 버릇이 아니라 강인한 거지.”
내가 거칠게 대꾸했다. 일레이는 이런 내 태도에 익숙하기에 웃기만 했다.
“얼마 전에 본가에서 연락이 왔어.”
일레이가 뜬금없이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미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녀석이 아니다.
“본가에서?”
난 예의상 반문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아마 은퇴까지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아. 적어도 내가 근위대원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진 버텨주셔야 할 텐데 말이야.”
냉혹하지만 현실적인 발언이었다. 앞으로 일레이는 전신의체 시술받고 재활도 해야 한다. 나아가 레기온 적응 훈련도 마쳐야 했다. 지금 시기에 카르티카 가주 역할까지 수행하긴 힘들다.
“네 형은 재기불능이라면서? 차기 가주는 네가 확실한 거 아니야?”
“내가 준비를 마치기 전에 아버지가 무너지시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아버지의 형제는 물론이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유능한 사촌도 있어. 지금이다 싶은지 본가에 얼굴을 비추더라고.”
나는 일레이가 다음에 꺼낼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일레이.”
“저번엔 내가 널 도와줬잖아. 내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각별한 사이라는 걸 보여주면 어쭙잖은 반발은 사그라들 거야.”
“그래 봐야 나는 양자야.”
“지젤과 같이 카르티카 가문의 연회에 방문해줘. 조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지젤에게 내 약혼녀인 척해줄 수 있냐고 물어줄 수 있을까? 정말로 약혼한다는 말은 아니야. 당분간의 반발만 억누르면 되니까.”
일레이의 웃음이 어색하게 변했다. 그도 상당히 곤란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내 역량에서 벗어난 일이야.”
내 목소리가 서늘했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감정이 식었다.
“내 생각엔 네 부탁이라면 헤일라스 대장님이나 지젤이 가짜 약혼을 허락할 거야. 모두 너를 아끼고 좋아하니까.”
맞는 말이다. 아마도 헤일라스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지젤은 화를 내더라도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일레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꽤 중한 일인 게 확실했다. 자칫하면 카르티카 가문의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상의는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
내가 그리 말하며 일레이를 밀쳤다.
* * *
헤일라스는 근위대의 힘을 빌려 바오 자카난을 조사하고 체포할 생각이었다.
근위대원을 동원한다지만, 어디까지나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람이 이 일에 중심이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현장에서 움직일 순 없네. 그렇다고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람이 바오 자카난 체포할 때 없으면 안 되지. 이번 임무에서 내 대리인은 자네야.’
헤일라스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내가 헤일라스의 대리인으로 근위대원과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그냥 근위대원이 아니라, 근위대의 최상위 부대인 제1백인대 소속이었다.
“루카, 넌 생도지만 자신의 의견을 누르지 말고 말해라. 권위에 짓눌려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리라 믿는다.”
제복 대신에 평복을 입은 근위대원 이스칸이 말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베테랑이었던 괴물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이레귤러였다.
‘이스칸은 혼인도 하지 않았다. 귀족 가문에서 데릴사위 제안도 여럿 들어왔을 텐데도 독신을 유지하고 있지.’
정말로 자신의 실력 하나만으로 올라온 사내였다. 이력만 봐도 내 존경을 얻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스칸과 함께 바오 자카난의 염탐을 맡았다. 이스칸 말고도 근위대원 두 명이 이번 임무에 참가했다.
‘제국이 아니라 헤일라스의 개인적 복수를 위해 행동하고 있다.’
이스칸과 근위대원들은 기꺼이 헤일라스를 도왔다. 자칫하면 자신의 경력에 해가 될 수도 있는 임무였다.
“바오 자카난이 나왔습니다.”
내가 건물에서 나오는 바오 자카난을 보며 말했다.
우린 2인 1조로 바오 자카난의 일거수일투족을 교대로 감시했다. 가장 좋은 건 테러리스트나 불온분자와 내통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더라도 틈을 노려 납치해 고문할 생각이었다.
끼리릭.
나는 전자식 마스크를 입가에 댔다. 마스크가 확장되면서 내 하관을 가렸다.
기잉.
그리고 오른쪽 의안과 렌즈를 낀 왼쪽 눈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눈동자 색과 홍채 패턴마저 바뀌었다.
이스칸은 나처럼 번거로운 위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밀 임무를 위한 위장용 전신의체를 여럿 가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신분 노출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넌 왼쪽, 난 오른쪽으로 따라간다.”
이스칸이 능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세부적인 지휘는 노련한 그의 몫이었다.
웅성, 웅성.
바오 자카난이 상층 구역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하층 구역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거리와 단정한 고층 건물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빼곡한 인파가 벽처럼 우릴 가리고 있었다.
삑.
나는 오른쪽 의안의 추적 기능을 활성화했다. 바오 자카난이 시야 바깥으로 사라져도 예상 경로가 금방 나왔다.
‘오늘도 곧장 자택으로 돌아가는 건가?’
바오 자카난은 전형적인 제국 관료였다. 책임감이 있고 행실은 고요했다. 그리고 직장과 집만 오가며 기계적인 삶을 살았다.
사흘이나 미행했지만, 바오 자카난은 일정한 하루를 반복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특이점이 없다.’
그래서 수상하다. 나도 그간 제국의 수많은 인물을 보았다. 고위직부터 하층민까지 접했다.
우린 완벽한 기계가 될 수 없다. 불안정한 욕구와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우리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끌어내렸다.
기이잉.
내 생각이 깊어졌다. 바오 자카난에게서 일탈과 이상행동을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벅, 저벅.
내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리곤 누군가 들고 있던 음료를 소매치기하듯 가로챘다. 내 귀신같은 솜씨에 음료를 뺏긴 이는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살폈다.
난 인파를 밀치며 나아갔다. 바오 자카난에게 다가가며 속도를 붙였다.
퍽!
난 어깨로 바오 자카난을 세게 밀었다. 내게 밀린 바오 자카난이 비틀거리더니 넘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넘어진 바오 자카난이 고개를 들며 나를 쳐다봤다. 조각처럼 단정한 얼굴의 사내였다.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옷자락만 툭툭 털었다. 대단한 감정 통제였다. 역시 제국의 고위 관료답다.
“원래 제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진짜로 급한 일이…… 어, 어어! 죄, 죄송합니다.”
난 들고 있던 음료를 놓친 척하며 바오 자카난 머리에 쏟았다. 이야, 연기가 많이 늘었구나, 루카.
“제 실수로 옷이 더러워졌으니 세탁비라도…….”
바오 자카난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내 크레딧칩을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사과하시려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이라도 내보이는 게 예의라고 생각되는군요.”
드디어 바오 자카난의 목소리에 노기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정보보위부의 고위 관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신원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후에 ‘세련된 방법’으로 보복하겠지.
“하하, 그건 좀 곤란하네요. 괜히 신분을 밝혔다가 제 집안을 보고 들러붙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아, 그쪽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여튼 복장을 보아하니 제국의 관료 같으신데…… 그쪽 얼굴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아버지께 말해 밀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특진하시면 제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좋아, 정말로 더럽게 재수가 없는 말투다! 내가 이런 말을 들었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코뼈부터 부러뜨리고 봤을 거다.
눈치도 없고 멍청한데 오만하기까지 하다. 정말로 최악의 인간군상이로군.
……사실 엔리코 라간을 떠올리며 따라 한 것이다.
“잠, 잠깐! 나는……!”
바오 자카난이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재빨리 인파로 사라졌다.
나는 바오 자카난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이스칸과 합류했다. 이스칸은 내 돌발행동을 전부 보고 있었다.
“……제 경험상, 저렇게 철저한 사람일수록 깔린 욕망이 어두운 법이거든요. 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조만간 풀지 않고선 못 버틸 겁니다.”
내 행동의 이유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이스칸은 천천히 입꼬리를 깊게 말아 올렸다.
“대장님이 널 아끼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이스칸이 시선을 멀리 있는 바오 자카난에게 두더니 말을 이어갔다. 바오 자카난은 더러워진 외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더니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나중에 사석에선 나를 아저씨라고 불러도 된다. 나도 술자리에선 대장님을 이름으로 부르니까.”
이스칸이 손을 뻗더니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