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5)
배드 본 블러드-95화(95/197)
095
아크바란의 밤이 깊어간다.
나와 이스칸은 바오 자카난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바오 자카난의 자택은 고급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였다. 52층의 펜트하우스는 층 하나를 전부 차지할 정도로 컸으나, 저 집조차 바오 자카난에겐 출퇴근용일 뿐이었다. 그의 지위와 재력을 가늠할 만했다.
우린 바오 자카난의 펜트하우스조차 내려다볼 수 있는 초고층 건축물 꼭대기에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건축할 때 임시로 쓰다가 버려진 통로였다.
통로의 폭은 사람 한둘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바닥은 철망인지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나사가 반쯤 풀린 난간은 기대기가 무서울 정도로 부실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비마저 쏟아졌다.
쏴아아아!
불쾌한 날씨였다.
아크바란의 시민 중에선 비를 좋아하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비는 의체와 기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특히 아크바란의 비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 더욱 탁했다. 닦지 않고 놔뒀다간 시커먼 얼룩이 남는다.
‘미적지근한 비.’
나는 어깨를 따라 흐르는 검은 비를 보았다. 오늘은 빗물의 상태가 더 나빴다.
정제되지 않은 화학 물질과 미세한 금속이 빗물에 잔뜩 섞여 있다. 먼지 따윈 이물질 축에도 들지 못했다.
“아크바란도 많이 변했지. 루카, 왜 상층 구역과 하층 구역이 나뉘었는지 알아?”
이스칸이 아련하게 도시를 내려다봤다.
우리가 있는 건물은 이 부근에서 가장 높았다. 날씨가 좋았다면 아크바란의 외곽 경계까지 보일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로부터 머저리 같은 귀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요?”
이스칸은 하층 구역 출신의 이레귤러다. 이런 말을 해도 웃을 것이다 난 이스칸과 며칠을 지내며 그의 성향을 대충 파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하하, 그 말도 맞지.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혼돈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야. 제국은 지나치게 정제된 체제를 가지고 있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기계처럼. 하지만 시대를 바꾸는 혁신은 계산할 수 없는 혼돈에서 탄생해. 제국은 그런 혼란과 혼돈에서 기어 나온 이레귤러를 상류 사회에 편입시키면서 정체가 아닌 변화를 도모하지.”
어려운 말이지만 와닿는 게 있었다.
나란 이레귤러가 제국 상류 사회에 들어오면서 많은 변화가 일고 사건이 생겼다.
‘제국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너뜨리는 것도 안 된다.’
키누안의 말이 떠올랐다.
“완벽하다면 변화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나는 바오 자카난의 자택 창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직 내부에선 움직임이 있었다.
“아무리 정교한 기계도, 완벽해 보이는 사회와 체제도…… 시간이 지나면 낡고 불완전한 것으로 변하지. 변화야말로 어찌 보면 완벽에 가장 가까운 단어야.”
“흠, 철학자이신지는 몰랐습니다.”
“팔십 년 정도 살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게 많거든.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가는 영감들은 나를 어리게 여기겠지만…… 원래 인간에게 팔십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야. 세상사에 통달하고도 남을 시간이지. 아, 그리고 지금 뭐라도 먹어둬.”
이스칸은 그리 말하며 손톱만 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뇌에 필요한 영양분이 담긴 간이식이었다. 그는 사탕 하나만 먹어도 하루 내내 버틸 수 있었다.
전신의체의 에너지원은 여러 가지다. 기본적으로 전신의체는 음식물의 열량을 전력으로 바꾸는 인공 소화기관이 달려 있었다. 일상에서는 음식물 섭취를 통해 축전지에 쌓이는 전력만으로도 별도의 충전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빠른 건 역시 외부 전력을 통한 충전이다.
이스칸은 임무에 앞서서 전신의체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왔을 것이다. 뇌에 영양분만 적절히 공급하면 보름이나 한 달도 거뜬히 버티겠지.
하지만 나는 전신의체가 아니다. 팔다리만 의체이고, 생존에 필요한 기관계는 아직 생체였다.
부스럭.
나는 간이식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아무리 군용 간이식이 간편하더라도 식사 시간이 별도로 있어야 한다. 소화도 돼야 해서 에너지 공급 속도도 늦다.
이스칸은 식사하는 나를 대신해 바오 자카난의 자택을 계속 감시했다. 나는 생체 기관의 열등함을 모처럼 느꼈다. 생도와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루카, 전신의체로 바꾼 우리도 여전히 복잡하고 번거로운 소화기관은 유지하고 있지.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동력원을 달아두면 더 유용할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인간에게 식사라는 행위가 필요해. 아무리 신체를 기계로 바꿔도 결국 뇌는 인간이니까. 식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스칸이 내 생각을 읽듯이 말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선배님도 저처럼 부끄러워하신 적이 있군요.”
“네가 경험하는 대다수 감정과 생각은 이미 내가 거친 것이니까.”
“하지만 우린 인간이기 전에 군인이 돼야 합니다. 군인에겐 에너지 공급 절차가 간소할수록 좋죠.”
“이래서 젊은이는 즐겁다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던 이들일수록 레기온에게 빨리 잡아먹혔지.”
이스칸이 바오 자카난의 자택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레기온을 오랫동안 자주 운용할수록 정신이 무너진다. 근위대원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레기온에게 잡아먹힌다.’
헤일라스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그레이스의 말도 떠올랐다.
으적, 으적.
나는 평소보다 급하게 바형 간이식을 먹어치웠다. 오늘은 아마 속이 더부룩할 것 같았다.
“그렇게 먹다가 체하겠다, 짜식아.”
이스칸이 낄낄 웃었다.
“실례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말해봐.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으니까.”
“로우젠이라는 이름의 근위대원을 아십니까?”
이스칸이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그는 기억해냈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아, 로우젠, 로우젠. 그 예전에 기억이 나는군. 그 녀석도 너와 나처럼 이레귤러였지. 그래서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넌 로우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는 사람이 로우젠의 근황에 대해 궁금해하더군요. 딱히 기밀이 아니라면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레이스에겐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뭐, 죽었어. 지나치게 성실해서 오래 버틸 성격은 아니었지. 근위대원은 너처럼 악바리 기질이 있어야 해. 가끔은 상관이고 뭐고 다 찔러 죽일 것 같은 독기도 품고 있어야 하고.”
“근위대에서 하극상을 권장하는지는 몰랐습니다.”
“부하에게 하극상을 당할 정도로 무능한 자는 필요 없으니까. 근위대의 장점 중 하나지. 다른 부대와 달리 가문의 후광만으로 중책을 꿰차는 자는 없어.”
동의하는 바다. 근위대 양성과정에서도 그랬다. 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도 기준이 미달되면 버티지 못한다.
‘로우젠은 죽었군.’
그레이스에게 알려줘야겠다. 생사야 어쨌든 근황이 알고 싶을 테니까.
“……잡담은 끝이다, 루카. 준비해라. 바오 자카난이 움직인다.”
이스칸의 눈동자는 주변의 빛을 끌어모으듯 빛났다.
* * *
바오 자카난은 드디어 일탈의 움직임을 보였다.
저 멀리서 블랙 택시가 옥상의 착륙장으로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블랙 택시가 비가 내리는 밤하늘에 녹아내리듯 섞여 있던지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스칸이 나보다 먼저 블랙 택시를 알아채곤 품에서 막대기를 여럿 꺼내 조립했다. 윤곽을 보니 저격총이었다.
끼릭, 끽.
이스칸은 조립한 저격총을 매만지더니 추적 탄환을 장전했다. 그 솜씨가 무척 빨라서 조립부터 장전까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라면 삼십 여 초는 걸렸을 것이다.
키잉.
이스칸이 자신의 팔을 받침대로 삼아 저격총을 견착했다. 그가 비스듬하게 총구를 기울인 채로 블랙 택시를 응시했다. 언뜻 보면 미동도 하지 않는 듯했으나, 아주 미세하게 조준하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피- 슛!
얇은 총성이 비가 내리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삑.
이스칸의 단말기에서 울림이 일었다. 추적기가 블랙 택시에 제대로 붙어서 작동하고 있었다.
‘블랙 택시의 보안도 대단한 수준이겠지만…….’
우린 근위대의 추적 장비를 쓰고 있다. 블랙 택시가 악명이 높더라도 기껏해야 사설 업체다. 놈들이 우리의 장비를 감지하고 파훼할 순 없다.
블랙 택시는 추적기를 감지하지 못한 듯이 옥상의 착륙장에 내려앉고 있었다.
기이잉.
이스칸이 눈을 빛내며 옥상을 응시했다. 그의 동공은 흰자위를 전부 잡아먹듯이 커졌다.
나도 어렴풋하게 바오 자카난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바오 자카난이 블랙 택시에 탑승했다.
“우리도 이동한다.”
이스칸은 비가 쏟아지는 건물의 외벽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중간중간 튀어나온 구조물을 잡으며 속도를 줄였다.
“……씁.”
망할 선배님께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뛰어내렸다. 나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나도 난간을 잡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거의 자유낙하를 하는 기분이다.
‘아찔하네.’
솔직히 나 혼자라면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비까지 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미끄러지거나 실수했다간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내 생체 부위는 연약하다. 튀어나온 철근에 찔리기만 해도 즉사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출발한 이스칸이 적당히 속도를 줄이더니 사뿐히 착지했다.
쿵!
나도 가까스로 착지하며 무릎을 붙잡았다. 찡한 충격이 정수리가 치고 올라왔다.
일어선 나는 발자국이 남은 바닥을 응시했다. 몸무게가 훨씬 가벼운 내가 더 요란하게 떨어졌다. 이스칸이 얼마나 노련한 의체 사용자인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더 나를 갈고닦아야 저들을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내심, 릭 실바 누네즈와 비등하게 싸운 이후로 내 실력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어지간한 근위대원과 맞서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릭 실바 누네즈와의 전투를 상정하고 장비를 준비하고 시뮬레이션 훈련도 했다. 그래서 맞설 수 있었다.
‘다른 근위대원과 싸운다고 가정하면, 상성이 내게 유리하고 운도 따라주는 상황에서는 이길 수 있겠지.’
그러나 패배할 확률이 더 높다. 착지 동작만 봐도 이스칸의 격이 나보다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케도 따라붙었군.”
이스칸이 나를 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아주 재밌나 보다.
“지는 건 싫어하는 편이라서요.”
“네가 고집쟁이라는 건 얼굴만 봐도 알아. 어쨌거나 우린 탑승물 없이 도보로 추적할 거다. 적응형 입체기동은 잘 배워뒀겠지?”
“입체기동 성적은 차석이었습니다.”
당시의 수석은 일레이였다.
“좋아, 시작하자고.”
이스칸은 나를 시험하듯 나아갔다. 그는 벽과 벽을 디디며 단층 건물로 올라갔다. 이윽고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고속기동을 시작했다.
적응형 입체기동은 불규칙한 장애물이 빼곡한 도심지나 밀림, 암석지대 같은 험지를 통과하는 기동 공식이다.
단순한 험지 주파가 아니라 각종 시설과 환경을 이용해 평지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동한다는 게 특징이다. 이를 위해선 근위대원처럼 강화된 신경계가 필요하다.
휘릭!
나도 이스칸을 따라 건물 사이를 뛰며 상층 구역을 가로질렀다.
“얌전히 내가 개척한 경로로 따라와라, 루카. 비까지 오니 네겐 버거울 거다.”
이스칸이 한 건물 앞에서 말했다.
적응형 입체기동은 눈앞의 지형지물을 실시간으로 인지하고 최적의 경로를 찾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경로 개척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선두에 서면 나머지는 따라가는 게 효율적이다.
단순히 쫓아가는 거라면 어렵지 않다. 신경계 강화를 하지 않은 일반인도 신체 능력만 받쳐준다면 할 수 있다.
‘네겐 버거울 거다.’
그 말이 내 뇌리에 맴돌았다. 발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그러나 지금은 임무 중이다. 경쟁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긴 하다.
“잘 보고 따라가겠습니다.”
말은 순종적으로 했지만, 내 못된 병이 도지고 있었다.
……날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스칸에게 내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