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96)
배드 본 블러드-96화(96/197)
096
이스칸은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질주했다. 그는 재차 건물의 끄트머리를 박차며 뛰었다. 속력을 줄이지 않는 주법이었다. 심지어 좁은 틈새가 나오면 우회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저러면 부딪힐 텐데…….’
내 예측과 현실이 엇나갔다. 이스칸은 소리 없이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이스칸의 신체는 딱딱한 금속으로 이뤄진 전신의체다. 그러나 그의 몸은 부드럽게 녹아들 듯 틈을 비집었다. 그의 자취를 따라 옷자락이 액체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찼다. 이스칸의 적응형 입체기동 실력은 내 예상을 까마득히 벗어나 있었다.
‘아마도 입체기동 능력만큼은 헤일라스보다 이스칸이 더 뛰어나겠지.’
헤일라스라고 만능은 아닐 것이다. 부분적인 능력은 자기보다 앞서는 근위대원이 많을 터다.
‘그리고 근위대장에겐 전투력만 중요한 게 아니야.’
부하의 지지를 얻어내고 따르게 만드는 통솔력. 그게 더 중요할 것이다.
카득!
내가 이스칸을 따라 틈으로 몸을 날렸다. 내 몸집이 더 작은데도 어깨와 무릎이 벽에 부딪히며 갈렸다.
‘염병.’
욕이 절로 나왔다. 이스칸에게 내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창피했다.
틈을 빠져나오자 성벽처럼 높게 솟은 경계선이 보였다.
‘상층과 하층의 경계.’
그 위로는 감시 시설과 드론이 오가고 있었다.
바오 자카난이 탄 블랙 택시는 아무렇지 않게 그 위로 지나갔다. 사전에 자유 통행 허가를 받은 듯했다.
그러나 나와 이스칸은 기밀 임무를 수행 중이다. 당연히 통행 허가 따윈 없다.
이스칸도 경계벽이 보이자 속력을 조금 줄이더니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달그락!
이스칸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는 구슬이 끼워져 있었다.
휙, 휙.
이스칸은 구슬을 끼운 손을 아래위로 빠르게 휘저었다. 그러자 불이 붙은 것처럼 구슬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루카, 이걸 던지고 나서 5초 안에 경계벽을 통과해야 한다. 휴식이 필요하면 지금 말해라. 일 분 정도는 숨돌릴 시간이 있으니까.”
구슬 내부의 빛이 서서히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당장 시작하죠.”
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마도 이스칸의 구슬은 전자기 교란과 방해를 일으키는 전자폭탄일 것이다. 저 정도로 소형화된 형태는 나도 처음 본다.
“잘 따라와라. 늦으면 버리고 갈 테니까.”
이스칸이 뒤로 물러나더니 도약할 준비를 했다. 경계벽 근처에선 감시 드론이 오가고 있었다.
이스칸이 시범을 보이듯 달려갔다. 난 카메라로 찍듯이 그의 동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나도 놓칠 생각은 없다.
휘릭!
뛰어오른 이스칸이 허공에서 빙글 돌았다. 그리고 구슬 폭탄이 정밀 사출장치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파직.
구슬이 터진 자리에서 빛이 점멸하며 전기 파동이 짧게 일었다. 일시적으로 주변의 감시 시스템이 공백 상태가 됐다.
이스칸은 그 상태로 경계벽의 끄트머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는 손가락과 손목의 힘만으로 재차 뛰어오르더니 반대편 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그와 똑같이 따라 뛰고 있었다. 이스칸처럼 구슬을 뿌릴 필요도 없었기에 도약만 하면 된다.
허공에 뛰어오른 나와 경계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도약할 때에 반걸음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의체 조율을 받은 지 오래돼서인지, 전기 폭탄이 내 의체에도 미미한 영향을 끼친 탓인지…….
‘어쨌거나 망했다.’
나는 경계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 팔 길이만큼의 거리가 부족했다.
‘어쩌지.’
루카, 생각해라. 이스칸은 이미 반대편 벽을 타고 내려간 뒤라 날 도와주지도 못한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미끄러져 벽과 바닥에 처박힐 것이다. 벽을 긁으면서 낙하 충격을 줄여볼까? 그럼 죽진 않겠지.
그러나 생존할지라도 임무에서 낙오할 것이다. 그건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찌익!
나는 바로 외투를 찢듯이 벗었다. 그리고 찢은 외투를 채찍처럼 뻗었다. 지금만큼은 비가 오는 게 다행이다. 젖은 외투는 괜찮은 마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휘릭!
외투의 소매 부분이 경계벽 난간에 감겼다. 그러나 내 몸무게를 버티는 건 찰나다.
제발, 제발!
나는 빠르게 외투를 당겨서 몸을 경계벽 가까이 끌어당겼다.
으득!
내 손가락을 난간 아래에 겨우 걸렸다. 급작스러운 충격에 손가락 마디의 완충장치가 벌어지며 이격이 생겼다.
“하아, 하아.”
난간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숨을 고르고 싶었지만 쉴 시간도 없었다.
‘움직여.’
나는 내 몸에 악착같이 신호를 보냈다. 시간은 2초 남았다. 바로 뛰어내려야 한다. 밑을 보고 지형을 인식할 시간도 없었다.
후웅!
쓰러지듯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내려가면서 비와 어둠 사이로 시야가 확보됐다.
아아, 정겨운 풍경이 보인다. 여기서부턴 하층 구역이다.
키이이익! 쿵!
나는 발뒤꿈치로 벽을 긁으며 내려갔다. 마침내 내가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여차여차 통과하긴 했다. 어떻게 했는지는 나도 신기할 따름이다.
끼릭, 끼릭.
나는 이격이 생긴 손가락을 살짝 비틀면서 밀어 넣었다. 내부의 부품이 맞물리면서 불쾌한 소리와 이물감이 사라졌다.
휙.
난 누더기처럼 찢어진 외투를 다시 걸치며 두건을 눌러썼다. 저 골목길에선 이스칸이 보였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두고 갈 뻔했어, 신입.”
“어림도 없죠.”
내가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러나 내 등골에 스민 액체가 땀인지 비인지 모르겠다. 난 방금 진짜로 뒈질 뻔했다.
* * *
전신의체로 바꿨어도 인간의 욕망은 여전했다.
나는 바오 자카난이 하층 구역의 매춘거리로 갈 거라 생각했다. 상층 구역에도 매춘부가 있지만 거기서 풀지 못할 욕구가 종종 있는 법이니까.
난 하층 구역의 사창가에서 봤던 홀로그램 광고들을 떠올렸다. 언급하기가 역겨울 정도다.
휘릭!
이스칸과 나는 하층 구역의 건물 위로 뛰어다녔다. 엉망진창으로 증축한 건물들은 상층 구역보다 훨씬 불규칙하기에 예상하기 더욱 힘들었다. 입체기동의 달인인 이스칸조차 가끔 머뭇거리며 속도를 줄이곤 했다.
“사창가는 이쪽입니다. 바오 자카난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군요.”
내가 보조하듯 말했다. 하층 구역의 지리에 대해서는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놈이 아크바란을 벗어나지 않길 바라야지. 아니, 생각해 보니 오히려 나가는 게 낫겠군. 납치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이스칸이 중얼거렸다. 그도 사창가를 지나친 블랙 택시의 동선에 의문이 생긴 모양이다.
“그래도 그리 멀리 가진 못할 겁니다. 블랙 택시의 운행비를 생각하면요. 은밀한 욕구 해소라곤 하지만 취미 활동에 그만큼 돈을 쓰긴 힘들겠죠.”
켄 노마의 투기장 기습 사건 때, 나는 블랙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단거리였는데도 당시 결제액은…… 생각만 해도 속이 쓰리다. 고위 관료라도 부담될 수준이다.
“이미 이동 거리가 상당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 정도의 크레딧을 쓸 가치가 본인에겐 있는 거겠지.”
이스칸이 저 멀리 점으로 보이는 블랙 택시를 응시했다. 지나가던 공중차량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곤 했다. 추적기가 없었다면 진즉 놓쳤을 것이다.
“블랙 택시가 외곽으로 빠졌습니다. 어쩌면 아크바란을 벗어날지도 모릅니다. 차량을 준비해 둘까요?”
“골치가 아프군. 차량은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리 개인차량이라도 탈것을 이용하면 은밀하게 움직이기 힘들다. 블랙 택시에게 들키지 않고 미행하려면 도보가 최선이었다.
이스칸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블랙 택시가 느려지고 있었다. 난색을 표하던 이스칸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블랙 택시가 착륙한 곳은 아크바란 외곽의 폐허였다. 나도 폐허를 임무 때문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 심성만큼이나 외형이 뒤틀린 놈들이 폐허엔 득실거렸다.
‘아크바란의 폐허. 밑바닥 인간 중에서도 최악의 종자가 모인 곳. 회색지대를 넘어선 무법지대.’
그런 곳에 제국의 고위 관료가 방문했다.
“이건 예사롭지 않군.”
이스칸도 위치를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욕구 해소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와 접선일 수도 있겠군요.”
내가 말에 이스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블랙 택시라도 반제국주의 반역 행위까지 보호하진 못해. 아무리 잘나 봐야 일개 기업에 불과하니까.”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도 태생이 하층 구역이다 보니 블랙 택시에 대해 묘한 환상이 있었던 모양이다.
환상을 걷어낸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블랙 택시를 응시했다. 블랙 택시는 결제 중인지 허공에 살짝 뜬 채로 멈춰있었다.
우린 잔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천천히 이동했다.
“루카, 넌 아키에스 빅티마를 수련했다고 들었다. 그쪽 전투술 사용자는 기이할 정도로 직감이 뛰어나지. 믿어도 될 수준인가?”
“꽤 괜찮은 수준입니다. 저는 제 직관과 직감을 믿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집니다.”
나는 겸손하게 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
군인은 자신의 능력을 과장해서 말하면 안 된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려고 능력을 낮춰 말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면 이변 감지는 네게 맡기겠다. 아크바란의 폐허는 제국의 감시와 통제 바깥에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가브리엘이나 투기장 갱단, 라비앙로즈 등이 활동하는 하층 구역은 제국도 내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계선도 뚜렷하지 않은 폐허는 완전히 버려진 지구다. 제국조차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파악하긴 힘들다.
‘하층 구역의 사람들조차 가지고 있는 얄팍한 도덕과 윤리조차 부재한 곳.’
폐허엔 버려진 건물이 많았다. 폐허라고 황무지는 아니다. 여러 이유로 개발이 중지되거나 버려진 시가지가 폐허가 될 뿐이었다. 부랑자와 무법자는 남겨진 시설을 이용해 살아가고 있다.
바오 자카난이 블랙 택시에서 내렸다. 임무를 마친 블랙 택시가 상승하더니 우리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위이잉.
이스칸은 단말기를 조작해 추적기에 신호를 보냈다. 블랙 택시에 붙어있던 손톱만 한 추적기가 이스칸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파직.
이스칸은 추적기를 손가락으로 비벼서 가루로 만들었다.
“바오 자카난이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넌지시 말했다.
바오 자카난은 폐허의 건축물로 들어가더니 2분여가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겉보기엔 황량한 폐건물이었다.
“따라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루카, 앞장서.”
언뜻 보면 부하를 사지에 밀어 넣는 듯한 발언이다. 하지만 아키에스 전투술 사용자인 내가 먼저 들어가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지금까진 이스칸에게 질질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능력을 발휘할 때다.
적어도 이변과 위험 감지만큼은 이스칸 못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잘해야 한다.
나의 가치를 증명할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