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20
〈 120화 〉 끝이 다가올수록 주의해라(2)
* * *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니엘은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학사일정을 확인하고, 남은 수업의 개수를 손가락으로 세본다. 그러다 보면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면, 광장을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단정하기보단 가볍고, 조금 풀어진 듯한 하복을 입고 아플리아를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여섯 달.’
자신이 라니아로서 살아간 지 벌써 여섯 달이다. 반년이란 시간을 전혀 다른 인물로서 살았다. 지난 반년을 회고하며 라니엘은 중얼거렸다.
“시간 참 많이 흘렀네.”
누군가에게 반년은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초 단위로 쪼개어 살던 잿빛 마법사의 입장에서··· 반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교수로서 살고 있는 지금은 어떠한가.
‘짧았지.’
반년이 짧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시간 참 빠르게 흘렀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
라니엘은 잠시 펜을 놨다.
짧게 숨을 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그것을 짐작해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난 삶을 반추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지냈으니까.’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연구하고, 마탑의 재정 관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차기 마탑주 시절.
잠은커녕 제대로 된 휴식조차 하지 못한 채, 허구한 날 최전선으로 강행군을 해대던 현자 시절.
그 두 시기를 생각해 보자면··· 아플리아의 교수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여유롭기 짝이 없다. 별다른 굴곡이 없다. 사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자였을 시절에 비하면 턱도 없다.
굴곡 없는 삶은 평탄하다.
평탄하기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여름이네, 겨울이네, 일 년이 다 가네··· 같은 말 따위를 내뱉고 있겠지.
‘그래선 안 돼.’
라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은 귀중하며, 한정된 재화다.
한정된 재화를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마법사의 덕목이다. 라니엘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잔을 매만졌다.
“여름.”
일 년의 절반.
“학기 말.”
한 학기의 끝.
그것을 코앞에 둔 채, 라니엘은 지난 수업들을 떠올려 본다. 학생들이 겪었을 아플리아의 생활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리곤, 툭 하니 내뱉는다.
“뭔가 좀 싱겁지 않나?”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있다. 카페에 앉아있던 몇몇 학생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진다. 그들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시선이 라니엘을 향해 쏟아진다.
“흠.”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라니엘은 입가를 매만지더니, 빈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계절 학기」
「추가 과제」
「보강 수업」
삐딱한 글씨체로 적힌 것들.
하나같이 학생들이 기겁할만한 내용이다.
‘이게 아니야.’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
라니엘은 쭉, 글자 위에 선을 그어버리곤 새로운 글자를 적었다.
「학기 말을 장식할 무언가.」
주제를 적어놓곤 한참을 고민한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걸 라니엘은 좋아하지 않는다. 유의미한 시간.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기억에 남을만한 굵직한 사건.
하나쯤은 그런 게 있어야 한다.
“아.”
짝, 하고 라니엘은 박수를 쳤다.
그리곤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이윽고 완성된 계획서를 보며 라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네.”
꽤나 만족스러운 계획이었다.
남은 것은 결재를 받는 것뿐이다. 계획서를 든 채 라니엘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의 바깥으로 걸음을 옮긴다.
끼익, 쿵.
그렇게 카페의 문이 닫힌다.
그러기를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그들의 시선은 방금까지 아플리아의 악몽이 점거하고 있던 자리로 향한다.
햇살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
그곳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창밖을 보고 있는 라니아 교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 더러운 성격과 반비례하듯 외모만큼은 뛰어난 인물이다.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잿빛 머리칼.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옆모습.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사이로 은은한 푸른빛을 흘리는 눈동자.
자꾸만 시선을 끄는 외모다.
그 외모에 눈을 흘기던 학생들이 몇 있다.
‘예쁘긴 하지. 예쁘긴 하신데······.’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방금, 뭐라 하셨지?”
아름다움이란 휘발성이 짙은 법이다.
한순간의 시선을 빼앗길진 몰라도···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다른 것들이다.
“나만 들은 거 아니지?”
“···나도 들었어.”
학생들의 마음에는 한마디의 말만이 남아있다.
「뭔가 좀 싱겁지 않나?」
···싱거워?
대체 뭐가 싱겁단 말인가?
“설마 저번 주에 과제가 없었던 게···.”
“에이 설마, 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누군가의 추측에, 학생들은 너스레를 떨며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친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농담으로 넘기려 한다.
“······.”
그러나 얼마안가 침묵이 찾아온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학생들은 떠올린다.
지난 반년간 겪은 공포를.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던 악몽을.
잠이 들지 못했던 밤을.
그것을 떠올리고, 라니아 교수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오히려 높은 편이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그 교수라면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침묵이 감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연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
“그렇지? 하긴, 아무리 그래도 학기 말인데.”
“응, 그렇지.”
다들 한마디씩 덧붙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그래, 라니아 교수님도 사람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의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덧붙이던 학생이 뒷말을 흐린다.
잠깐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 바깥으로 빠져나온 건 의문이었다.
“···있나?”
그 누구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서늘한 침묵만이 학생들 사이에 감돈다.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2.
로얄 가드의 개인 집무실.
자신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보며, 칼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단장, 하인켈에게서 온 편지였다.
“···또 일거리가 늘어난 기분이군.”
요즘 들어 일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해서 터진다. 칼트는 편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초인들의 동향.
하인켈이 보내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초인.’
그 단어를 되새기며 칼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얼마 전의 기억이다. 턱밑까지 다가온 죽음을 체감했던 당시의 경험. 그것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검의 초인.
소드 마스터, 쿤텔.
배교자가 부리는 사역마가 되어 마주했던 옛 스승이자 은인. 그가 휘두르던 검격이 눈앞에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날카로운 검이었다.
아름다운 검이었다.
군더더기가 없어, 완벽한 검이었다.
녹이 슬고 부러진 칼. 비틀린 팔. 심지어 한쪽 팔은 없는 상태로도 쿤텔은 검을 휘둘렀다. 검이 그리는 궤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칼끝은 고요하다.
칼이 한번 휘둘리면 무언가 베인다.
휘두르고, 벤다. 그 간결한 과정만이 무한히 반복됐다. 칼트가 그 공간 속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베이는 것이 자신의 목이 되지 않도록 대상을 바꾸는 것 뿐이었다.
‘죽을 뻔했었다.’
빈말이 아니다.
턱밑까지 죽음이 다가왔었다.
조금이라도 쿤텔의 육체가 멀쩡했다면, 잿빛 마법사가 배교자를 쓰러트리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자신이 한 번이라도 눈을 더 깜빡였다면.
분명,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
칼트는 말없이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턱밑부터 그어진 흉터가 괜스레 따끔거렸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다.
그리고, 우연 속에서 칼트는 느꼈다.
‘벽.’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저마다 정해진 한계.’
사람에겐 정해진 한계가 있다.
재능의 크기에 따라 그것이 어느 지점에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한계. 그것을, 검의 수행자들은 벽이라 표현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넘을 수 없는 것.’
단순한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
그 벽을 넘은 이들이 곧 검의 초인이 된다. 스스로의 한계를 무너트린 이들은 초인이라 불렸다.
‘벽을 넘는다면···.’
칼트는 눈을 떴다.
제 손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다시 한번.’
빛나는 그들의 곁에 설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칼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렵겠지.”
전장에서도 넘지 못한 벽이다.
당장은 벽의 크기를 가늠할 뿐, 넘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휴.”
할 일이 많았다.
잡생각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지. 칼트는 짧게 숨을 뱉으며 편지를 들어 올렸다.
「드라카 동향 보고서.」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칼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에 적힌 것을 보았다.
검귀(??), 드라카.
광기와 집념만으로 초인이 된 인물.
그 실력은 출중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기사단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초인.’
그렇기에 더 주의해야 한다.
칼트는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거쳐, 현재는 북부에 머무르고 있음.」
현재의 위치를 보며 칼트는 내심 안도했다.
사실 드라카의 위치 파악에 있어, 칼트가 신경 쓸 부분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선배님과 마주칠 일은 없겠네.”
잿빛 마법사 라니엘.
그녀와 드라카의 동향이 겹치는가? 만약 겹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한쪽을 뜯어말려야 했다.
‘두 분, 상성이 최악이니까.’
칼트는 똑똑히 기억한다. 전장에서 드라카와 라니엘이 마주쳤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는지.
너, 뭐라 했냐?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 답했다. 내 말이 틀렸나? 잿빛 마법사. 이편이 효율이 더 좋을 텐데?
너 혹시 델로힘 교단 출신이냐? 왜 씨팔, 사라 그년이랑 말하는 게 똑같지? 그 입 안 닥쳐?
애새끼처럼 떼쓰지 마라, 잿빛.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다. 이게 가장 효율이 좋다.
야.
산을 무너트려 통째로 매장한 후···.
그 입 닥치라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난 분명 경고했다.
바라는 바다. 애새끼가 제 주제를 모르는군.
배교자를 앞에 두고 일어났던 내부분열.
“어으.”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했다.
칼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편지를 접었다. 어찌 됐든, 그 둘이 만날 일은 없을듯싶었다.
드라카는 머나먼 북방에 있다.
그리고, 잿빛 마법사는 이곳 왕도에 있다.
‘만날 일이 없지.’
둘이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운 것이다.
「이상 없음.」
칼트는 짧게 문자를 써서 답했다.
3.
“라니엘, 편지가 왔구나.”
“예? 편지요?”
보낼 사람이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한테 온 건데요?”
“글쎄. 편지의 재질이 독특하구나. 이 문양도 어디서 본 듯 싶은데······.”
잠깐의 뜸을 들인 후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아, 그레이스 가(家)의 문양이로군.”
“그레이스? 라크네 가문이요?”
“그래. 아무래도 북방에서 온 편지 같구나.”
나는 편지를 받아 열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담백했다.
“초대장이네요?”
“초대장?”
“예, 라크가 절 추천한 모양이네요? 대충 초대해서 대접을 하고 싶다는 내용 같은데···.”
좋은 기회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네요.”
“잘됐다니? 뭐가 말이냐.”
“안 그래도 한 번 북방에 들러야 했거든요.”
기왕 북방에 가는 김에 겸사 겸사 들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째 일이 잘 풀리는데.’
여행가는 마음으로 가볍게 다녀오면 되겠지. 나는 초대장을 고이 접어 로브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 * *